“20세기 인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파시스트 폭력과 문화대혁명이다.”

중국의 소설가 펑지차이가 ‘백 사람의 십 년’(박현숙 옮김·후마니타스)이란 책의 서문에 쓴 말이다. ‘백 사람의 십 년’은 평범한 중국인 100인이 문화대혁명 10년 동안 겪었던 비극을 기록한 책이다. 펑지차이는 1980년대 중반 지역신문 ‘금만보’에 문화대혁명 경험담을 찾는다는 공고를 냈다. 이때 도착한 편지만 4000여통. 펑지차이는 이 중 100사람의 이야기를 선정해 1986년부터 연재를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책이 바로 ‘백 사람의 십 년’이다.

펑지차이는 이 책을 펴낸 이유에 대해 “역사의 잘못은 얻기 힘든 재산이며 그 재산을 잃어버린다면 새로운 맹목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는 민초들의 진실이 곧 역사의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작가와 그 어떤 일면식도 없었고, 금전적인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들의 뼈아픈 경험을 통해 문혁의 실체를 드러내고 싶을 뿐이었다. 이 책에는 문혁 당시의 믿기 힘든 중국인들의 열일곱 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다. 펑지차이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그 어떤 가공이나 허구를 섞지 않았다.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이야기 가운데 인상 깊은 네 가지 이야기를 꼽아봤다.

나는 죄가 있는 건가요?

“나는 내 손으로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20년 만에 내뱉은 한 여성 의사의 고백이다. 1966년 8월 26일 아침, 중학생 홍위병 한 무리가 그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의 아버지가 자본가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당시 가택수색 및 가산 몰수 운동이 한창이었다. 홍위병들은 그의 집에 있는 물건을 모조리 박살냈고, 가족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재판을 받아야 했다. 문혁 시절 홍위병들의 기세는 상상 이상이었다. 8월 26일 시작된 홍위병들의 행패는 8월 28일까지 계속됐고, 그와 부모는 방안에 갇혀 가죽혁대로 두들겨 맞았다.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전부 잘렸다. 그렇게 그들은 꼬박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홍위병들에 대한 두려움은 극에 달했다.

결국 그와 부모는 함께 죽기로 결심했다. 의사였던 그는 칼로 경동맥을 끊으면 바로 색전증으로 죽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부모는 그에게 “엄마, 아빠의 고통을 없애주는 좋은 일이니 걱정 말라”며 재촉했다. 그는 아버지의 경동맥을 더듬어 단번에 찔렀다. 곧바로 뜨끈뜨끈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이제 어머니 차례였다. 그 순간 갑자기 둘째 오빠가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는 순간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하고, 3층으로 뛰어올라가 그대로 뛰어내렸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현장에서 즉사했고, 어머니도 투신을 한 뒤 치료를 받지 못해 숨졌다고 했다.

1966년 9월 7일 그는 구속됐고, 1968년 ‘문혁에 항거한 살인죄’라는 죄목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아버지를 문혁의 박대로부터 구해주었다는 게 구체적 이유였다. 그렇게 그는 12년 동안 감옥에서 지냈다. 4인방(四人幇)이 몰락하자 법원은 그 사건을 재심리했고, 결국 1979년 3월 23일 출옥했다. 하지만 그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아직도 그를 괴롭히는 질문이 있다. “나는 아버지를 해친 걸까요, 구한 걸까요?”

세상 모든 종이를 주워 남편 구하려 한 여인

1965년 변금련의 한 공사 초등학교 국어교사(이하 이씨)의 이야기다. 이씨는 말재간이 뛰어났다. 들은 이야기든 본 이야기든 죄다 기억해서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그 당시 중국인들은 경쟁적으로 마오 주석에 대한 충성을 표현할 때였다. 마오 주석에 대해 조금이라도 반항적인 언행을 한 사람은 우파분자로 몰려 처벌을 받았다. 이씨가 수업 때 마오 주석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날이었다. 이씨는 학생들에게 “마오 주석이 류양에서 백군에게 쫓겨 도랑 속에 엎드려 적들의 추격을 따돌렸던 재치를 보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발언이 화근이었다. 동료 교사들이 이 수업 내용을 문제 삼아 이씨를 공안국에 우파분자로 신고한 것이다. 어떻게 위대한 지도자 마오 주석이 도랑 따위에 숨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공안국이 어떤 책에서 그 내용을 봤는지 말하라고 했지만, 이씨는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결국 이씨는 징역 8년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 당시 이씨의 아내는 임신 6개월이었다.

아내는 이씨의 석방을 위해 그가 말한 내용이 담긴 책을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아내는 길거리에 인쇄된 종이라도 보이면 무조건 줍기 시작했다. 종이를 주우면 주변 친척이나 심지어 초등학생에게까지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왜냐하면 아내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 주변 사람들은 아내를 향해 “글자도 모르고, 세상에 글이 얼마나 많은데 그 이야기를 찾을 수 있겠냐”고 걱정했다. 하지만 아내는 포기하지 않았고, 꼬박 7~8년을 글자가 적힌 종이를 줍고 다녔다.

그렇게 이씨의 형기 만료를 반 년 앞둔 어느 날 밤. 아궁이에서 불이 나 집안 가득 쌓여 있던 종이에 불이 옮겨 붙어 큰 화재가 났다. 결국 아내와 아이는 불에 타 죽고 말았다. 감옥에서 이 소식을 들은 이씨는 삼베 조각에 목을 매 자살을 시도했다. 그 순간 삼베 조각이 ‘툭’ 하고 끊어져 땅바닥으로 자빠졌다. 이씨의 눈에 순간 불꽃이 번쩍였다. 삼베 조각이 끊어지면서 안에 감춰진 종이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글자가 등사된 종이가 눈앞에 있었는데, 그렇게 찾아헤매던 도랑에 숨은 마오 주석의 이야기였다. 오늘 같은 날만 기다리던 이씨의 아내와 아이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중국 광둥성 산터우시 외곽에 있는 중국 유일의 문화대혁명박물관 내 희생자 추모벽. 학생들이 ‘문혁은 당과 국가, 각 민족, 인민에게 엄중한 재난을 가져온 내란이었다’는 중국공산당의 결의 내용을 읽고 있다. ⓒphoto 조중식
중국 광둥성 산터우시 외곽에 있는 중국 유일의 문화대혁명박물관 내 희생자 추모벽. 학생들이 ‘문혁은 당과 국가, 각 민족, 인민에게 엄중한 재난을 가져온 내란이었다’는 중국공산당의 결의 내용을 읽고 있다. ⓒphoto 조중식

여덟 살짜리 사형수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형장에 끌려간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다. 시 위원회 숙소의 마당 벽에 반동 표어가 출현한 사건이 발생했다. 벽에는 ‘타도 마오 주석!’이라고 쓰여 있었다. 공안국에서 현장 검증을 통해 키가 120㎝쯤 되는 아이가 썼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공안국은 세 가지 근거를 댔다. 반동표어의 위치가 땅에서 1m 위였기 때문에 아이가 적기에 적당하다. 글씨체가 삐뚤빼뚤한 게 어린아이의 필적이다. 마지막으로 성인이 썼다면 ‘타도 마오 주석!’이 아니라 ‘타도 마오쩌둥!’이라고 썼을 것이다. 시 위원회 숙소에 살고 있던 용의선상에 오른 아이들은 모두 11명. 그때 이 사건을 담당한 파벌의 반대편에 서 있는 세력의 자녀인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가 유력한 범인으로 지목됐다.

조사관들은 당시 여덟 살이던 아이를 데려가서 사탕과 동화책을 선물하며 범인임을 인정하라고 구슬렀다. 이렇게 어린아이를 이용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이를 이용해 조직의 간부였던 아버지를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조사관들은 아이를 구슬러도 통하지 않자 아빠를 때리겠다고 협박하거나 의자를 걷어차며 아이에게 겁을 줬다. 결국 아이는 반혁명분자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 그러던 어느 날, 조사관들은 아이를 총살시키겠다며 형장으로 끌고 갔다. 아이는 총상당할 죄인들과 함께 나란히 섰다. ‘탕’ 하는 총소리가 울렸다. 아이가 너무 놀라 옆을 봤을 때는 머리가 박살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아버지가 달려와 아이를 꼭 껴안았다. 결국 명백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자 아이는 풀려났다. 그렇지만 아이는 ‘어린 반혁명분자’라는 꼬리표를 문혁이 끝날 때까지 무려 10년이나 달고 살아야 했다.

파괴된 세대

1970년 5월 17일, 지식청년들은 베이다황(北大荒)을 향하는 기차를 탔다. 기차역은 온통 울음바다였다. 청년들은 창문으로 팔을 내밀어 안간힘을 다해 가족들의 손을 붙잡았다. 일부 청년들은 열정적으로 징을 치고 북을 두드리며 구호를 외쳤다. 청년들의 머릿속에는 오직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홍위병 운동의 집단적 열기에 들떠 있을 뿐이었다. 기차는 한밤중에 농장 역에 도착했다. 큰 트럭이 청년들을 태우고 농장에 데려다주었다.

숙소는 끔찍했다. 아주 큰 구식 텐트였는데 구멍이 뚫려 바람이 숭숭 들어왔으며 바닥은 진창 구덩이였다. 상황을 깨달은 청년들은 돌아가겠다고 울었지만 소용없었다. 청년들에게 작은 낫이 주어졌다. 날이 밝으면 밭으로 나가 해가 져야 일을 마칠 수 있었다. “(혁명의) 작은 낫 만세! 뼈가 부러져도 힘줄은 이어져 있다.” 그들은 일을 하면서도 구호를 계속 외쳐댔다.

청년들은 병이 들어야만 특식과도 같은 ‘환자식’을 먹을 자격이 생겼다. 환자식은 잘게 썬 파에 굵은 소금을 치고 콩기름을 둘러 볶은 뒤 끓인 국수 한 사발에 불과했다. 그만큼 국수 한 그릇도 절실할 정도로 청년들의 농촌생활은 비참했다. 이렇게 청년들이 농촌으로 간 이유는 농촌 하방 활동 때문이었다. 하방(下放) 활동은 문혁 기간에 농민들로부터 혁명 사상을 배운다는 미명 아래 수많은 도시 청년을 농촌에 보낸 사회정치적 운동이다.

당시 청년들에게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 주석의 저작 외에는 그 어떤 책도 허락되지 않았다. 가령 모파상의 ‘두 친구’라는 소설이 전달되면 비밀리에 돌려가며 읽을 정도였다. 작고 흰 자작나무들이 뒤덮인 농촌의 풍경은 조용하고 신비스러웠다. 농장 직공과 여성 지식 청년 사이에 정분이 난 사건이 빈번했다. 1975년이 되자 청년들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소위 ‘백’이 있고 빠져나갈 길과 방법이 있는 청년들은 모두 농촌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농촌 사람들은 청년들에게 반감을 갖게 되었다. 10대 때 농촌으로 간 수많은 청년들은 재능은 있었지만 학력이 없었다. 그들은 문혁이 끝난 뒤에도 대학생이나 대학원생들과 경쟁할 재간이 없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허리디스크, 류머티즘, 위장병 등 각종 질병뿐이었다. 그 당시 지식청년들은 파괴된 세대라고 불린다.

펑지차이는 이 책을 통해 “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민중과 울분을 참고 있는 수많은 대중을 만나고 싶었다”고 말한다. 역사는 늘 유명한 사람들을 편애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문혁은 중국의 정치, 문화, 민족의 뿌리 깊은 문제들이 한꺼번에 분출된 것이므로 하루아침에 정리할 수는 없다. 다만 백 사람의 서로 다른 경험으로 10년간 문혁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작가는 최선을 다했다. 여기에 적힌 내용들은 단순히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문혁을 통해 고통받았던 한 세대의 모든 중국인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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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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