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에서 평화협정 체결 현수막을 걸어놓고 거리투쟁을 벌이고 있는 ‘평화협정운동본부’ 회원들. ⓒphoto 평화협정운동본부 홈페이지
서울 광화문에서 평화협정 체결 현수막을 걸어놓고 거리투쟁을 벌이고 있는 ‘평화협정운동본부’ 회원들. ⓒphoto 평화협정운동본부 홈페이지

지난 10월 7일 금요일, 서울 광화문광장 주변을 걷다 보니 KT 본사 건물 앞 인도에 대형 현수막을 걸어놓고 서명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현수막에는 ‘No THAAD, No War!(사드 반대, 전쟁 반대) Peace Treaty Now!(지금 당장 평화협정체결)’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현수막 아래쪽에 ‘평화협정운동본부’라는 단체의 이름이 보였다.

현수막 문구를 자세히 보니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사드 반대와 전쟁 반대를 내세우면서도 막상 한반도 평화를 가장 위협하는 북핵에 대한 반대 문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이 전시해 놓은 시위용 피켓에도 ‘사드가 웬 말이냐 평화협정 체결하라’ ‘평화협정 체결하고 남북분단 끝장내자’ ‘NO 사드, NO 탄저균, 양키고홈 YES’ ‘미군기지 반환받고 평화공원 조성하자’는 등의 평화협정 체결 주장과 반미 구호 일색이었다.

평화협정운동본부가 어떤 단체인지 알아보기 위해 홈페이지를 찾아보았다. 블로그 형태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단체의 성립 과정과 현황, 활동내역 등이 비교적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이 단체는 지난 7월 27일 출범했으며,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

이 단체의 홈페이지에는 박교일·박희호·송무호·이적·지창영 등이 상임대표나 공동대표, 지역지부대표 등의 집행부로 소개되고 있다. 단체 고문으로 서경원 전 국회의원 등도 눈에 띄었다. 가입단체로는 자주평화통일실천연대, 민족작가동맹, 민통선평화교회 등 6개 단체가 있다고 밝혔다. 소개된 ‘평화협정운동본부’ 관계자 전원이 ‘백남기 농민 사망 국가폭력 규탄 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단체를 출범하기 직전 가칭 ‘평화협정실현연대’를 만들어 전국 순회기자회견을 여는 등 홍보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단체 출범 후 9월을 평화협정 행동의 달로 정하고 광화문 미국대사관 옆에서 거리투쟁에 돌입했다’고 자신들의 활동을 소개했다. 이에 따라 9월 1일 대형 배경막을 설치하고 사드 반대와 전쟁 반대,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자칭 ‘노숙투쟁’과 ‘서명전’을 시작했다. 이 단체의 출범과 활동 개시 시기는 ‘위민크로스DMZ(Women Cross DMZ)’라는 미국의 여성단체가 활동한 시기와 대체로 비슷하다. 위민크로스DMZ는 지난 5월 북한을 방문하고 판문점을 통해 남한으로 넘어왔다. 이후 이들은 미국의 국회의원들을 만나거나 시위, 강연, UN 설명회 등을 통해 평화협정 체결 캠페인을 펼쳤다.

평화협정운동본부 단체에 소속된 인물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고문으로 소개된 서경원 전 국회의원은 평민당 국회의원 시절이던 1988년 8월 몰래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을 면담하고 왔다가 이듬해 간첩혐의로 구속되었다.

상임대표 송무호씨는 ‘한·미 FTA 저지 안양시운동본부’ ‘안양희망연대’ 등의 대표를 지낸 인물이며, 또 다른 상임대표 이적씨는 민통선평화교회 목사로 활동 중이다. 이 목사는 민통선이 속해 있는 김포시 시민단체 10개를 모은 연합 시민연대를 만들어 애기봉 등탑 반대운동, 대북 전단지 살포 반대 운동 등의 활동을 벌여왔다. 공동대표 박희호씨는 ‘분단과 통일시’라는 시동인지를 펴낸 시인이며, 다른 공동대표 박교일씨는 길거리와 페이스북 등을 통해 활발한 평화협정 체결 운동을 벌이고 있다. 박교일씨의 페이스북에는 미군을 ‘부끄러움을 모르는 철면피’나 ‘전쟁괴물’로 표현하는 등 미군과 박근혜 정부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낸 표현과 게시물이 다수 올라와 있다.

평화협정운동본부 구성원의 면면을 살펴보니 이들이 내세우는 ‘사드 반대’나 ‘전쟁 반대’ 주장이 별로 새삼스러울 것이 없어 보였다. 소개된 회원들 다수가 이미 오랫동안 반미 활동에 몸담고 있는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현수막 문구를 처음 보고 예상했던 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궁금증은 이들이 노무현 정부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평화협정 체결’ 문제를 다시 주장하는 배경이다. 평화협정운동본부가 발표한 출범선언문에 이 부분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선언문에는 ‘북·미 사이의 평화협정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요, 민족의 상생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라고 밝혔다. 선언문은 또한 ‘평화협정을 통해 정전협정을 폐기하고, 미·북 사이의 적대관계를 해소하여 평화통일을 이룩하자’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평화협정 체결 당사자는 북한과 미국”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최근 핵실험으로 국제적 고립이 심화된 김정은이 국제적 제재를 피하기 위해 내세우고 있는 것이 평화협정 체결 같은 평화 공세”라며 “앞으로 이에 호응한 국내의 좌파단체들이 ‘전쟁이냐 평화냐’를 들고나오며 선전선동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핵무기를 만들고 있는 북한이 한반도 평화 파괴의 주범인데, ‘평화’라는 눈속임 용어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며 “북한이 해석하는 대남적화전략하의 ‘평화’와 우리가 이야기하는 ‘평화’는 근본적인 의미부터 다르다”고 말했다.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사면초가 상태인 김정은이 미국 내 좌파세력을 상대로 평화 공세를 벌이도록 추동하고 있다”며 “최근 미국에서 일고 있는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백악관 청원 서명운동 등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북한이 이토록 평화협정 체결에 목을 매는 것은 베트남전에서 ‘미국·베트남 평화협정’ 체결로 주한미군을 철수시킨 베트콩이 베트남을 간단하게 먹어치운 사례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평화협정운동본부 출범선언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평화협정 체결 당사자가 우리와 북한이 아니라 북한과 미국이라는 것이다. 한국이 제외되는 미국과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주장은 북한이 수십 년간 일관되게 고수해온 입장이다. 1990년 초반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를 지낸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대표는 우리가 정전협정 서명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평화협정 체결 당사자가 아니라는 북한과 좌파적 학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평화협정이라는 것은 전쟁을 겪은 당사자 간에 전쟁을 완전히 종식하고 평화 상태를 회복하기 위한 조약입니다. 6·25전쟁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해서 일으킨 전쟁이기 때문에 남한을 제외한 미군이 협상의 독립된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평화협정은 전쟁 당사자 간 평화의 조건을 마련하는 협정입니다. 한반도에서 평화의 핵심조건은 주한미군이었습니다. 그동안 주한미군이 전쟁 억제력을 담당해왔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협정 내용은 1953년 휴전 이후 한반도에서 전쟁 재발을 막아온 안보의 기둥인 ‘전쟁억지력’과 ‘그 장치를 일거에 제거 내지 무력화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대표는 “북한이 추구하는 미·북한 평화협정 내용에는 주한미군 철수, 한·미연합사령부 해체, 한·미합동군사훈련 중단, 주한 유엔사령부의 해체 등의 요구가 포함된다”며 “북한은 이 과정에서 한국은 상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단 한 번도 바꾼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동복 대표는 “일각에서 미국과 북한이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않을까 우려하는데 북한의 핵기술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 어떤 형태의 평화협정이라도 가상하는 것 자체가 북한의 전략에 말려드는 것”이라고 충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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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흔 조선pu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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