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7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 ⓒphoto 뉴시스
지난 10월 27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 ⓒphoto 뉴시스

‘최순실 게이트’로 새누리당이 고난을 겪고 있다. 새누리당은 지난 4월 총선 패배 후 8월 전당대회를 거치며 가까스로 당의 지도 체제가 안정을 보이는 듯했다. 그런데 벼락같이 터진 최씨 국정 농단 파문에 당·정(黨·政)이 동반 추락하는 형국이다. 문제가 커진 원인과 관련해서는 친박(親朴)계 중심의 당 지도부가 발이 묶인 상황에 놓여 여론 악화를 방치한 측면이 있다는 시각이 있다. 또 이런 가운데 친박과 비박(非朴)계의 중간에서 ‘낀박’이라고 불리는 정진석 원내대표가 나홀로 분투하는 듯한 모습도 관측되고 있다.

‘낀박’ 정진석의 분투

새누리당은 8·9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회 멤버 9명 가운데 비박계 강석호 최고위원을 빼고는 모두 친박계이거나 정 원내대표처럼 친박에 우호적인 인물들이 선출됐었다. 또 4월 총선에서 당선된 의원 129명 가운데 친박계가 70여명에 이른다. 지금 시점에도 새누리당의 주류(主流)는 친박계인 것이다. 친박계는 그동안 박근혜 대통령을 중심으로 강한 결집력을 보였고 이로 인해 대야(對野) 투쟁 등에서 일사불란하게 뭉치는 측면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몇몇 의원에게 부여된 ‘돌격대’ 평가 등은 당 안팎으로부터 “선거 승리의 핵심인 중도층을 더욱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라는 지적도 받았다.

여기에 박 대통령이 ‘최순실 파문’으로 큰 위기에 처하자, 더 이상 의원들이 적극적으로 옹호하기도 쉽지 않게 된 상황으로 관측된다. 실제 지난 10월 26일 최순실 사태 대응책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의원총회에서 발언에 나선 23명의 의원 가운데 친박계는 6명뿐이었다. 친박들은 “박 대통령을 도와야 한다”는 취지로 말하긴 했다. 하지만 한 참석자는 “그동안 의총에서 일부 의원이 대통령 비판 발언을 하려고 하면 몇몇 의원이 험한 말로 막아서곤 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모습은 없었다”며 “그보다 전반적으로 의원들이 큰 충격을 받은 듯 침체된 분위기였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비박계는 전반적으로 당 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키우는 모습이다. 비박계는 의총에서 친박계가 적극적이지 않던 ‘최순실 특검’을 만장일치로 관철시킨 데 이어 일부 의원이 “친박 중심 지도부를 해체하고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요구도 했다. 이정현 대표를 비롯한 최고위원단이 비상 사태에 제대로 대응을 못 했고, 사태 수습을 위해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에 정 원내대표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지만, 당을 수습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입장으로 비박계의 주장에 즉각 동조하지 않았다. 정 원내대표는 이어 지난 10월 27일에는 “이번 일이 개헌(改憲) 논의의 걸림돌이 아니라 기폭제가 돼야 한다”고도 밝혔다. 친박 일각에서 “대통령이 제안한 개헌 논의는 계속돼야 한다”고 한 것과 비슷하게 보일 수 있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정 원내대표는 두 달 전에 우병우 민정수석에 대한 의혹이 터져나오자 “우 수석을 교체해야 한다”며 가장 먼저 선제 대응에 나섰었다. 당시 친박계에서는 “정 원내대표가 또다시 우리 말을 안 들었다”며 부글부글 끓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정 원내대표는 우 수석 교체에 관한 한 끝까지 일관된 입장을 보였다. 이번 최순실 국면에서도 정 원내대표는 “대통령이 직접 해명하시라”고 했고 그의 말대로 상황이 굴러갔다. 청와대의 대대적인 인적 쇄신을 앞장서서 주장한 것도 정 원내대표였다.

그러나 정 원내대표는 당 지도부 체제를 바꾸는 문제에 있어서는 신중하게 접근하려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 관계자는 “정 원내대표가 예산 국회가 시작되는 상황에서 물러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라고 보고 일단 상황을 수습하려는 것 같다”며 “다만 앞으로 지도부에 대한 퇴진 요구는 계속 거세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따라서 정 원내대표는 적절한 타협은 계속하겠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탈출구’를 모색하려 애쓸 것”이라고 했다. 앞으로도 비박계의 요구사항과 여론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당 지지율을 회복할 방안을 찾을 것이라는 얘기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 ⓒphoto 뉴시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 ⓒphoto 뉴시스

무너지는 대선 밑그림

최순실 사태는 새누리당에 선거의 한 구심점을 빼앗아가는 결과로도 나타나고 있다. 친박계는 그동안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영입 또는 자체 후보를 제시하는 방법 등으로 내년 대선의 밑그림을 그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핵심 구상 요소가 박 대통령의 역할이다. 친박계는 TK(대구·경북)와 5060세대 등 박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상수(常數)로 놓고 여기에 충청과 호남 일부를 연합하는 구도의 ‘보수 결집’ 전략을 그려왔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굳건한 지지층은 비박계에서도 무시 못 할 존재였다. 이번 사태가 터진 직후에도 상당수 대선주자들이 대통령에 대한 비판보다는 “대통령이 잘되려면…”이라는 어조로 나온 것도 “보수층을 떠나게 만들 수 있다”는 판단이 더해진 결과로 알려졌다. 실제 새누리당은 지난 몇 년간 박 대통령을 중심으로 선거를 치르지 않은 때가 없다. 하지만 이번 사태 후 여론조사 추이 등을 살펴보면 박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포함해 오히려 보수 세력의 이반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새누리당의 한 중진 의원은 “최순실 사태에 관한 한 보수층의 마음이 용서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고 했다.

변화된 보수의 지형은 반 총장에게도 상당한 변수로 작용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 비박계 관계자는 “4월 총선에서 크게 졌을 때도 보수층은 반 총장 영입에 대한 희망을 붙들고 새누리당에 대한 지지를 거두지 않았던 측면이 있다고 본다”며 “다만 그때는 박 대통령에 대한 애정이 반 총장에게 승계되는 ‘그림’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그림은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다른 비박계 관계자도 “비박계 주자들 입장에서는 일단 반 총장을 영입해야 경선이 흥행된다고 보고 줄기차게 반 총장의 경선 참여를 요구해왔던 것”이라면서 “이제는 반 총장에게 ‘입당하라’고 요구하기조차 민망하게 된 것 아니냐”고 했다.

선거 경험이 풍부한 당료들은 “보수 세력의 반 총장 영입 시나리오는 상당 부분 수정되거나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치는 게 불가피해진 것 아니냐”는 얘기도 한다. 당 관계자는 “예컨대 반 총장이 당장 입당이 어려워졌다면, 외곽 지대에서 활동하다가 당 대 당 연합 등으로 자연스럽게 합칠 가능성은 남았다고 본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반 총장이 ‘여권 주자’로는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도 “다만 새누리당도 당명 개정 등 상응하는 큰 변화를 거쳐야 가능한 얘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새누리당의 ‘정신적 구심점’이 사라지는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반 총장에 대한 주목도가 커질 수 있다”는 얘기도 한다. 실제 반 총장 영입에 적극 나섰던 의원 등 일각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더욱 결집하려는 조짐도 보이고 있다.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는 “당이 지리멸렬한 상황에서 반 총장이 ‘보수의 아이콘’으로 등장하면 오히려 그가 별다른 저항 없이 당에 안착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러나 반 총장 측은 최순실 사태와 관련해서는 아직까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는 분위기다.

비박계 주자들 기회인가

이런 사정 때문에 앞으로 대선까지 남은 1년4개월 동안 각 주자 진영이 나름의 구상을 실행에 옮겨가는 과정에서 기존보다 한층 복잡해진 변화들이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일단 현재로서 최순실 사태는 비박계 주자들에게 활동 공간을 넓히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 평가다. 그동안 여권 내 대선주자 지지도는 반 총장이 30% 이상의 압도적인 지지율이었고, 주로 비박계 주자인 2위권 아래로는 10%도 못 미치는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를 반 총장으로 인한 ‘유리천장 효과’로 설명해왔다. 반 총장과 친박 연합이 보수의 ‘파이’를 대부분 가져간 상황에서 기존 비박 주자들이 기를 펴지 못해 지지도가 낮게 형성될 뿐, 잠재력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최순실 사태의 해법과 관련해서 친박계에서는 여전히 “비선 의혹이 국정운영 마비로 이어지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영남권의 한 친박계 의원은 “특검으로 빨리 상황을 정리하고, 국정 운영이 차질을 빚지 않도록 당이 뭉쳐야 한다”고 했고 다른 중진 의원은 “박 대통령에 대한 탈당 요구는 아직 이르다”고 했다. 친박계는 비박계의 ‘당·청 관계 혁신’ 요구에 대해 “지나친 면이 있다”고도 보는 분위기다.

그러나 비박계에선 “친박계의 무조건적인 대통령 엄호가 보수진영 전체를 망쳤다”며 “더 빨리 수습할수록 대선 승리 가능성이 커진다”고 하고 있다. 한 비박계 대선주자는 “‘보수’라면 건전한 시장경제와 안보관 등을 바탕으로 ‘깃발’을 들고, 여기에 모인 사람은 모두 포용하려는 자세를 보여야 대선 승리가 가능하다고 본다”며 “그동안 당 일각에서 보인 특정 인물 중심의 계파 활동을 빨리 떨쳐내야 대선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비박계 일각에서는 반 총장이 입국하는 내년 1월 중순까지 ‘반 총장의 부재(不在)를 대비한 대선 시나리오’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비박계 관계자는 “비박계 주자들은 서로 치열한 경쟁과 때로는 연대를 거치며 지지율도 오를 것으로 본다”며 “다만 대선까지 남은 시나리오를 지금 시점에서 예측하기는 너무 이르다고 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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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민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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