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시위에 참석한 문재인 전 대표. ⓒphoto 연합
지난 11월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시위에 참석한 문재인 전 대표. ⓒphoto 연합

지난 11월 12일 저녁 ‘대통령 하야’를 외치는 촛불시위가 벌어지던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일대. 문화제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앞쪽에서부터 “문재인 파이팅”이라는 함성이 파도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이어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모습을 나타내자 사람들은 앞다퉈 악수를 청하고 지지의 환호성을 올렸다. 이날 행사 참가를 마치고 세종문화회관 옆 통로를 통해 현장을 빠져나가던 문 전 대표는 환하게 웃으며 지지자들의 손을 맞잡았다. 얼굴은 상기된 표정이 역력했다. 문 전 대표는 지지자들의 환호와 박수에 떠밀리듯이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최순실 게이트’로 박근혜 대통령이 퇴진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여야(與野)의 대선주자 가운데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그에게 정치권 안팎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제1야당인 민주당 지도부는 문 전 대표와 긴밀하게 교감하며 현 정국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고, ‘촛불시위’에 나선 거리의 민심도 그의 말과 행동에 주목하고 있다.

문 전 대표는 ‘최순실 게이트’ 관련해 박 대통령에 관한 퇴진 주장을 가장 늦게 한 대선주자다. 그는 지난 11월 15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통령이 조건 없는 퇴진을 선언할 때까지 국민과 함께 전국적인 퇴진 운동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문 전 대표와 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이날 동시에 야 3당과 시민단체들이 참여하는 ‘비상시국 기구’를 구성해 대통령 퇴진 운동에 나서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는 “우선 대통령이 조건 없는 퇴진을 선언해야 한다. 그런 이후 ‘질서 있는 퇴진’이 논의돼야 한다”며 “(질서 있는 퇴진은) 비상시국 기구에서 논의돼야 한다”고 했다. 민주당과 문 전 대표가 밝힌 비상시국 기구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지도부였던 ‘국민운동본부’와 비슷한 형태로 운영될 것으로 보인다. 야당과 시민단체가 같은 자격으로 참여한다. 투쟁 방식은 원내와 장외에서 동시에 이뤄지게 된다.

6월 항쟁 때와 비슷한 비상시국 기구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 민주당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성남시장 등이 일찌감치 박 대통령 퇴진 촉구 서명 운동에 나서고 거리 시위에도 참여했던 것에 비하면 그의 행보는 상대적으로 뒤늦은 편이다. 문 전 대표 또한 지난 11월 12일 ‘촛불시위’에 참여했었지만 박 대통령에 대한 퇴진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다. 이는 차기 대선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그의 정치적 위상과 관련돼 있다. 야권의 친노(親盧) 진영을 대표하고 있는 문 전 대표는 보수층과 중도층 유권자 사이에서 “너무 급진적인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한 자릿수에 불과할 정도로 대부분의 국민들이 현 정권에 등을 돌린 상태지만, 문 전 대표가 지나치게 현 정국에서 목소리를 높일 경우 보수층과 중도층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문 전 대표 측 인사들의 공통된 판단이다. 민주당의 한 친문(親文) 의원은 “아무리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에 실망한 여론이 크다고 해도 이 사람들이 그 대안으로 문 전 대표를 지지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며 “최대한 신중하게 현 정국에 대처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일단 박 대통령 퇴진 요구를 공식화한 뒤부터는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다. 연일 박 대통령과 친박 진영을 겨냥한 강력한 메시지를 내놓고 있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사실상 퇴진 요구를 거부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가 ‘미래권력’의 대표 역할을 자임하며 대여 투쟁의 선봉에 나서는 듯한 모양새다. 이에 대해 당내 일각에서는 우려도 나온다. 민주당 한 중진의원은 “현재 차기 대선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기는 하지만 문 전 대표가 스스로 그런 상황을 인식하는 듯한 행동을 보여주면 국민들 시선이 차가워질 수도 있다”며 “정치적 계산을 모두 버리고 오로지 국민만 바라보면서 가야 한다”고 했다.

탄핵을 꺼리는 이유들

문 전 대표는 박 대통령에 대한 퇴진 요구를 공식화하면서도 탄핵에 대해서는 거리를 뒀다. 현재 박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진과 일부 친박 의원들을 중심으로 ‘진지전’에 나서면서 하야(下野) 요구에 응할 생각이 없다는 의사를 비치고 있는 상태. 그렇다면 야권은 탄핵 절차에 들어가는 게 자연스럽지만 문 전 대표와 친문 의원들은 이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국회가 합법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탄핵에 대해선 “지금은 탄핵을 논의할 단계가 아니다”라며 “압도적 민심은 즉각적인 퇴진에 있다. 민심을 확인했다면 즉각 퇴진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하야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강제적으로 하야시켜야 하고, 탄핵은 그런 단계에서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퇴진 운동의 방법으로 지역별 촛불집회와 시국 토론회 등을 거론하면서 “퇴진 운동이 확산돼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그는 “박 대통령에게 퇴로를 열어주고 싶었지만, 박 대통령은 이러한 저와 우리 당의 충정을 끝내 외면했다”고도 했다.

문 전 대표 측이 탄핵에 대해 우려하는 이유는 불확실한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선 탄핵안의 국회 통과를 장담할 수 없다. 재적 의원의 3분의 2인 200명이 찬성해야 탄핵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는데 무소속까지 포함해 국회 내 야권 의원은 모두 171명이다. 새누리당에서 최소한 29명이 동조해야 한다. 국회 문턱을 넘더라도 보수 성향이 강한 헌법재판소에서 인용 결정을 내릴지가 불확실하다. 9명의 헌법재판관 중 6명의 찬성이 필요한데 이 가운데 6명은 보수적 성향으로 분류된다. 탄핵 심판 과정에서 국회를 대표하는 검사 역할을 하는 법제사법위원장이 새누리당 소속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국회와 헌재 어느 쪽에서든 탄핵안에 제동이 걸리면 박 대통령에게 면죄부(免罪符)를 주는 모양새가 된다는 것이다.

탄핵 절차에 걸리는 시간도 위험 요소로 보고 있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되면 헌재는 6개월 이내에 심판을 마쳐야 한다. 박 대통령이 ‘2선 후퇴’를 선언하지 않는다면, 이 기간에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게 된다. 정국 주도권을 다시 여권에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가진 것이 많은 문 전 대표로서는 어떤 변수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탄핵 정국을 앞장서 만들어갈 이유가 없는 상황이다. 민주당 한 중진 의원은 “황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게 되면 어떤 방식으로 정국을 흔들지 알 수 없고, 문 전 대표에게도 전혀 예상치 못한 위기가 올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개헌에 대해서도 “지금 논의할 시기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개헌 논의 시점을 묻는 기자들 질문에 “우리 헌법은 손볼 대목이 많다”며 “당연히 개헌이 필요하다고 저도 개헌의 필요성에 대해선 공감하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개헌을 공약한 바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개헌을 논의하면 국면 전환을 초래해서 그렇게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문제는 문 전 대표의 이런 입장이 차기 대선 구도와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차기 대선 후보로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문 전 대표로서는 분권형 개헌은 반드시 피해야 할 의제다. 대통령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로 인해 ‘최순실 게이트’가 벌어졌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여야 일각에서 대통령과 내각 수반이 되는 총리가 각각 외치와 내치를 담당하는 이원집정부제 혹은 아예 의원내각제로 헌법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지고 있지만 문 전 대표는 부정적이다. 이에 대해서는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을 비롯한 일부 유력 대선주자들도 유보적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현 정국이 장기화할 경우 개헌에 관한 근본적 논의는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문 전 대표로서는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될 수 있는 지점이다.

지난 11월 1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앞 ‘우병우 구속수사’ 촉구 더민주 천막농성장을 방문한 문재인 전 대표(가운데). ⓒphoto 뉴시스
지난 11월 1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앞 ‘우병우 구속수사’ 촉구 더민주 천막농성장을 방문한 문재인 전 대표(가운데). ⓒphoto 뉴시스

‘호남 패배 시 정계 은퇴’ 여전히 논란

차기 대권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보이는 문 전 대표에게도 여전히 몇 가지 불안 요소가 있다. 박 대통령이 지난 11월 16일 엘시티 비리 의혹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엄중한 문책을 강조하면서 정치권 안팎에서는 “부산에 기반을 두고 있는 여권의 비박계와 야권의 친문계를 겨냥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그러자 문 전 대표의 대변인 격인 김경수 의원은 11월 17일 “지금은 저열한 음모와 협잡으로 거대한 민심의 파도를 피할 수 있는 그런 국면이 아니다”라며 “엘시티 비리 의혹,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엄단하라는 명령은 우리가 할 얘기인데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무슨 염치로 그 얘기를 하는지 헛웃음만 나온다”고 했다. 김 의원은 “야권 일각을 겨냥해 연루 의혹을 제기한 흑색선전이 SNS를 통해 조직적으로 전국에 도는 걸 보면 저들이 급하긴 급한 것 같다”며 “이제 기댈 데가 이런 것밖에 없는 모양”이라고도 했다.

그가 지난 4월 총선 당시 했던 ‘호남 패배 시 정계 은퇴 발언’은 지속적인 뇌관(雷管)이 되고 있다. 지난 11월 15일 문 전 대표의 대통령 퇴진 촉구 기자회견에서도 이와 관련된 질문이 나왔다. 한 매체의 기자가 “4월 총선 때 ‘호남이 저에 대한 지지를 거둔다면 미련 없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대선에도 도전하지 않겠다’고 한 발언은 어떻게 된 것이냐”고 질문을 한 것이다. 이에 문 전 대표는 “맥락에 맞지 않는 질문 같아 보인다”면서도 구체적으로 해명에 나섰다.

문 전 대표는 “그 당시 그 선거에서 우리가 말하자면 승리하고 또 새누리당의 과반 의석을 막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 당 정권 교체의 기반을 구축하고, 그걸 위해서 광주와 호남에서 우리 당이 지지받기 위한 그런 여러 가지 전략적 판단으로 했던 발언이었다”고 했다. 이어 문 전 대표는 “그것이 만약 광주·호남 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한 점이 있다면 죄송하고, 그 발언의 맥락을 잘 살펴달라”며 “광주·호남 민심 지지가 없다면 대선을 포기할 것이란 부분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했다. 그는 “저는 야권을 대표하는 대선 주자, (대통령) 후보가 돼서 정권을 교체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발언 이후 인터넷에선 “결국 진정성을 갖고 한 말이 아니라 선거 전략으로 그냥 했던 말이란 얘기 아니냐”는 지적이 이어지면서 다시 논란이 일었다. 국민의당도 반발했다. 국민의당 김경록 대변인은 논평에서 “문 전 대표는 전략적 거짓말을 해서 미안한 것인지, 아직도 정계를 은퇴하지 않아서 미안한 것인지 분명히 밝혀라”라며 “대통령 되는 것이 꿈이면 호남을 전략적으로 이용해도 되는 것인가”라고 했다. 김 대변인은 “호남을 더 이상 모욕하지 말라”고 했다. 민주당 한 중진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박 대통령 퇴진 정국이 잘 마무리돼도 문 전 대표가 야권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호남의 전폭적 지지를 얻어야 대권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점에서 아직도 큰 숙제가 남아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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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현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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