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에 열린 이세돌 기사(오른쪽)와 알파고의 대국은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photo 뉴시스
지난 3월에 열린 이세돌 기사(오른쪽)와 알파고의 대국은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photo 뉴시스

2016년 12월이 며칠 남지 않았다. 바둑대회 주최 및 후원에 관해 의논하고 싶다는 영국바둑협회의 연락을 받고 설렘 반 걱정 반으로 런던을 방문한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당시 런던은 서울만큼 춥진 않았지만 짙은 구름 탓에 스산한 기운이 만연했다. 킹스크로스역 근처 한 식당에서 존 디아몬드 당시 영국바둑협회 회장과 토비 매닝 부회장을 만났다. 국제바둑연맹 일을 하며 국제행사, 회의 석상 등에서 여러 번 만났던 분들이다. 그날 몇 시간 동안 에피타이저에서 디저트까지 긴 점심식사를 하며 나눈 대화는 이후 4개월간의 놀랍고 힘겨웠던 여정의 시작이 되었다.

영국바둑협회의 소개로 연락을 하게 된 매디 리치는 당시 딥마인드의 프로그램 매니저로 알파고 팀을 담당하고 있었다. 몇 번의 전화통화와 이메일을 주고받은 후 런던의 딥마인드 사무실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상냥한 미소가 인상적이었던 그녀는 친절하고 차분했다. 오전에 시작한 회의는 딥마인드의 구내식당 점심을 거쳐 늦은 오후까지 이어졌다. 그녀는 직접 바둑을 두지는 않았지만 알파고 팀에서 일한 덕에 바둑에 관한 상당한 지식이 있었다. 오후에 약 30분간 만난 딥마인드의 CEO 데미스 하사비스 역시 나를 밝은 미소로 반겨주었고 프로 바둑계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딥마인드의 목표는 명확했다. 세계 최고의 프로기사에 도전하는 것, 최대한 정당한 승부가 될 수 있도록 대국 규칙과 환경을 조성하는 것, 전 세계의 모든 바둑 팬과 관심 있는 사람들이 대국을 쉽고 재미있게 관전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고 승부 자체에 대한 관심에 인공지능과 과학의 발전에 대한 의의가 묻히지 않도록 하는 것, 또한 세계 최고의 기사에 대한 정의도 뚜렷했다.

현재 정상급 기사이며 오랜 세월이 흘렀을 때 확실히 바둑계의 전설로 남을 수 있는 기사. 지난 10여년간 세계대회 18회 우승 전력을 가진 이세돌 9단은 회의가 진행되던 작년 12월에도 제2회 몽백합배 세계바둑오픈 결승에 진출한 상태였다. 최근 세계 정상급으로 올라선 커제 9단과 박정환 9단 역시 고려 대상이었지만 그들의 세계대회 우승 경력은 3회를 넘지 못했고 추후 전설로 남을 만큼 장기적으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이에 딥마인드는 이세돌 9단을 초대하기로 결정하였고, 자연스럽게 대국 장소 역시 서울을 택했다.

런던에서의 회의는 순조로웠지만 귀국 후 딥마인드의 행사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맞이한 어려운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딥마인드가 네이처에 제출한 논문이 게재될 때까지 알파고에 대한 철저한 보안이 요구되었는데, 논문이 발표되는 1월 말까지 기다리면 3월 초 대국 예정일까지 준비 기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따라서 이세돌 9단을 비롯한 대국 준비에 필요한 인원에게 비밀유지계약서 서명을 받아야 했다.

대국을 공동주최한 한국기원과 딥마인드 사이의 언어장벽도 어려운 점이었다. 서울과 런던 사이의 시차 탓에 항상 업무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회의 및 전화통화를 해야 하는 것도 힘들었다. 게다가 국제바둑연맹의 사무국장으로서 나는 지난 2월에 중국에서 열린 국제마인드스포츠협회 엘리트 마인드 게임스 행사의 바둑 부문 기술감독을 맡아 할 일이 산더미였다. 결국 저글링을 하듯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르게 대국일이 다가와 있었다.

이세돌 9단과 처음 알파고에 대해 대화를 나눈 건 지난해 12월, 그가 농심배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였다. 오랜만에 연락한 후배 기사가 반가웠는지 그는 맛집이라며 한 순두부찌개 식당으로 나를 초대했다. 저녁식사를 하며 중국 바둑계에 대한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조용한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이세돌 기사는 비밀유지계약서에 서명한 후 딥마인드의 초청과 알파고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의 반응은 침착하면서 신중했다. 짧은 침묵과 함께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그는 초청에 응하겠다고 했다. 그는 무엇보다 알파고의 실력이 궁금하다고 말했고, 구글의 인공지능과 벌이는 이 행사가 결과를 떠나 역사에 남을 것 같다는 의견을 표했다. 이후 지난 3월 대국이 시작되기까지 이세돌 9단과 여러 번 만날 일이 있었는데 그는 이 대결에 대해 언제나 밝고 협조적이었다.

대국 이후 미·유럽에서 바둑 붐

대국일이 다가오며 알파고에 대한 국내외 언론의 관심이 나날이 높아졌다. 이세돌 9단 인터뷰 의뢰와 대국 중계에 대한 문의 역시 하루가 멀다 하고 들어왔다. 연일 수십 건의 전화, 이메일, 문자에 답했다. 이와 함께 기자회견, 개막식, 생중계, 대국장, 검토실 준비를 돕고 이세돌 9단을 챙기느라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바빴다. 세계의 바둑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기쁘고 행복했지만 가슴 한편에는 두려움도 있었다. 몇 개월을 같이 일하며 딥마인드 직원들과 많이 친해졌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이세돌 9단이 꼭 이겨주기를 바랐다. 바둑을 위하는 열정 하나로 세계가 주목하는 무대를 만들었는데, 이세돌 9단이 지고 바둑에 역효과가 돌아올까 무서웠다. 물론 이세돌 9단의 실력을 믿었지만, 구글과 같은 세계적 기업이 11억원의 우승 상금을 걸고 공개적으로 도전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세상이 지켜보았듯, 이 대결은 알파고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3국이 끝났던 날에는 이세돌 9단에게 딥마인드의 초청장을 전달한 일이 너무 미안해 슬프고 힘들었다. 하지만 앞 세 판의 패배는 이세돌 9단의 4국 승리와 대결 내내 기자회견에서의 진솔하고 감동적인 인터뷰로 퇴색했다. 이 덕에 알파고와 이세돌 9단 모두 영웅이 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기적 같은 결과였고, 이를 이뤄낸 이세돌 9단의 능력에 감명받았다.

이 대국이 서양 바둑계에 끼친 큰 영향도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 중 하나였다. 지난 6월 중국 우시에서 개최된 제37회 세계아마바둑선수권전 기자회견에서 앤드루 오쿤 미국바둑협회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알파고가 미국 바둑계에 끼친 영향은 세 단계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새로 바둑을 배우는 인구가 늘었고, 둘째로 바둑을 그만두었던 사람들이 다시 바둑을 두기 시작했으며, 셋째로 유단자들의 기력 증진에 동기부여가 되었다.”

이에 마틴 스티아스니 유럽바둑연맹 회장이 덧붙였다. “유럽 역시 비슷한 현상이었다. 바둑을 보급하는 사람들이 큰 혜택을 받았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특별활동으로 바둑을 가르치는 강사들이 새로운 학교에 강의 제안을 할 때 예전에는 바둑이 무엇인지 오래 설명해야 했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학교가 이미 알거나 강사가 알파고 행사에서 파생된 뉴스 등을 쉽게 활용할 수 있다.”

이 증언들을 뒷받침하듯, 올해 7월과 8월에 각각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보스턴에서 열린 유럽 바둑 콩그레스와 미국 바둑 콩그레스가 모두 작년 행사보다 20% 이상 참가 등록을 기록하며 역대 최다 참가자 수를 경신했다. 돌이켜보면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일이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이제는 이 모든 경험이 천금보다 소중하다. 정말 운 좋게 내가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20년 이상을 바둑계에서 보낸 바둑인으로서 바둑을 전 세계에 알린 알파고와 딥마인드 팀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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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진 전 국제바둑연맹 사무국장·전 프로바둑기사 4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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