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인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웃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2008년 4월 사진이다. ⓒphoto 뉴시스
고향인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웃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2008년 4월 사진이다. ⓒphoto 뉴시스

“진보 진영은 능력 이상의 목표 지향

나는 현실의 한계와 실용주의를 받아들였다”

“내 임기 중 무슨 진전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2007년 대선 패배는 내 책임 아니다

대선은 현직 대통령이 아니라 후보를 평가하는 것”

“언론과의 전쟁은 피할 수 있었던 싸움,

나에게 너무 큰 과업이었다”

“남과 북 각각 송전·가스 라인 교환

생명선 쥘 만큼 신뢰관계 쌓고 싶었다”

“부시가 아니라 네오콘들과의 갈등

반미 감정 우려 美 ‘작통권 환수’ 받아들여”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5개월 전 한 학자와 고향 봉하마을에서 가졌던 인터뷰 내용이 공개됐다. 김형아 호주국립대 교수는 최근 학술지 ‘저널 오브 컨템퍼러리 아시아(Journal of Contemporary Asia)’ 온라인판에 게재한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인터뷰와 한국에서의 노무현 현상(President Roh Moo-Hyun’s Last Interview and the Roh Moo-Hyun Phenomenon in South Korea)’이라는 영문 논문에서 2008년 12월 8일 봉하마을을 방문해 노무현 전 대통령과 3시간 반 동안 가졌던 인터뷰 일문일답을 공개했다. 논문에 첨부된 일문일답만 A4 용지 37쪽 분량으로, 이 논문은 오는 3월 발간되는 ‘저널 오브 컨템퍼러리 아시아’ 3월호에 발표될 예정이다.

김 교수가 노 전 대통령을 인터뷰했던 2008년 12월은 ‘박연차 게이트’를 파헤치던 검찰 수사의 칼이 노 전 대통령을 겨누기 시작할 때였다. 그해 12월 22일 박연차 태광그룹 회장이 기소되면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도 본격화돼 결국 노 전 대통령은 2009년 4월 30일 검찰에 출두했고, 그 후 한 달도 안 돼 5월 23일 봉하마을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김 교수는 “노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꾸밈이 없었고 솔직했으며 자신의 절망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며 “인터뷰 도중 너무 힘들어해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과 내 연구들로 화제를 돌린 기억이 난다”고 했다.

봉하마을서 3시간 반 인터뷰

김 교수는 지난 8년간 인터뷰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국 사회와 정치 한복판에 던져져 있다시피 해서 그분의 마지막 인터뷰가 어떤 연유이든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인터뷰 내용을 공개한 이유에 대해 김 교수는 논문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마지막 인터뷰는 ‘노무현 현상’, 특히 2017년 대선과의 연관성하에서 고려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2017 대선은 야당의 최대 지분을 가진 친노(親盧) 그룹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한국의 많은 주요 시민단체들이 ‘대전환’을 필사적으로 모색하는 상황에서 한국인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특히 김 교수는 논문에서 권위주의 통치를 앞세운 박근혜 대통령의 실패로 말미암아 임기 중 성과에 대한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탈권위주의’ ‘사람 사는 세상’ 등을 강조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조명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형아 교수는 본래 박정희 시대 연구자로 명성을 쌓은 학자. 특히 박정희 시대 추진됐던 중화학공업 정책에 대한 실증 연구를 진행해왔다. 오원철 전 경제수석 등 박정희 전 대통령의 참모들과의 인터뷰와 정책 자료를 바탕으로 ‘Korea’s Development under Park Chung Hee: Rapid Industrialization, 1961~1979(박정희 지도하의 한국 발전: 급속한 산업화, 1961~1979)’라는 저서를 2004년 출간했다. 이 책은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 유신과 중화학공업’이라는 제목으로 일조각에서 2005년 발행됐다. 김 교수는 1970~1980년대 산업전사(産業戰士)로 불린 대한민국 1세대 남성 기능공들의 성장사를 2000년대 초부터 추적 분석해 ‘Industrial Warriors: South Korea’s First Generation of Industrial Workers on Post-Developmental Korea(산업전사들: 구조조정 이후의 대한민국의 1세대 기능공들)’이라는 논문을 2013년 ‘아시안 스터디스 리뷰(Asian Studies Review)’라는 학술지에 발표했고 현재는 이 연구의 단행본 출판 준비를 하고 있다.(주간조선 2013년 11월 18일자 커버스토리 참조) 김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야 관련 자료를 읽었을 뿐 그 이전에는 아는 바도 없었고 연구 동기도 없었다”며 “하지만 지금은 한국 현대사가 박정희와 노무현 두 사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현대 한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08년 12월 8일 봉하마을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인터뷰한 김형아 교수.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2008년 12월 8일 봉하마을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인터뷰한 김형아 교수.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 일문일답 주요 내용

다음은 김 교수와 노 전 대통령과의 일문일답 중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을 중심으로 주요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임기 중 이룬 성과에 대한 아쉬움부터 털어놓는다. “나는 내가 대선에서 당선된 것 자체가 역사의 진전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라 믿었고, 그것 자체로 진전이라고 믿었다. 내 임기 동안 중요한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내가 기대했던 이유다. 하지만 돌아보면, 내 임기 중 무슨 진보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요즘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얼마만큼 진전을 이뤘는지도 의문”이라는 말도 한다. “예를 들자면 나는 권력의 절제와 법치주의, 그것이 문화로서 정착하기를 바랐다. 많은 사람들은 권력의 절제와 그것으로 인한 규범과 상식의 지배가 하나의 사회적 풍토 내지 문화로서 수립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탈(脫)권위주의가 그러한 것들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독단적인 권력이 아니라 규범 또는 사회 상식에 의한 지배가 사회적 문화로서 정착되어야 하고 다시는 후퇴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요즘 보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탈권위주의라는 것이 그래야만 하지만, 나는 얼마나 진전을 이뤘는지 회의가 든다.”

그는 자신이 자주 언급한 탈권위주의라는 용어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법의 지배와 자기 억제”라면서 “권력의 자기 억제와 법의 지배가 핵심적인 중요성을 갖는다”고 강조했다.

“보수 진영의 위기감은 근거 없는 불안감”

그는 민주주의를 세 가지 요소로 정의하기도 했다. “권력층이 규범을 준수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첫 번째 요소다. 그것이 법의 지배다. 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법을 준수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권력층이 법과 법의 원칙을 존중하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권력을 견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권력이 스스로를 절제하는 것도 중요하다. 내가 말하는 것은 민주주의는 권력의 자기 절제라는 것이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 문화가 민주주의의 (두 번째) 핵심 요소다. 그리고 (세 번째 요소로)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자유와 평등이 진전되고 그것이 그 결과물로 실현되어야 한다. 바로 공평한 사회와 사회적 평등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것들이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본다.”

그는 자신의 대선 승리를 가져온 대중 운동과 관련해서도 “선거 승리 때까지는 잘했지만 그 이후는 계속할 수 없었다. 나는 시민의 능력을 계속 동원하고 조직하는 데 실패했다”고 평가하면서 한국 정치가 자신이 정치 인생을 걸고 싸워왔던 지역주의로 회귀했다는 지적도 했다. “지금 한국 정치는 완전히 낡은 지역구도로 돌아갔다. 지역구도가 깨지지 않았든지 (과거로) 회귀했든지,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민주주의에서 타협의 정치라는 것이 전혀 작동하지 못하는 구조를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임기 중 민주주의에서 얼마나 진전을 이뤘는지에 대해 무척 실망하고 있다. 성과가 없었다.”

그는 한국 사회의 분열주의를 언급하면서 “내가 어떤 글에서 ‘민주주의는 통합의 제도다. 대화와 타협이 가능하기 때문에, 논쟁 또는 경쟁 또는 투쟁을 통해서 사회통합을 이뤄낼 수 있는 제도이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위대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도 했다.

그는 민주주의의 목표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았을지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현재 한국의 보수 진영은 위기감을 느낄 수 있다고 진단한다. “민주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보수주의 가치와 기득권의 위기다. 그들은 아마 보수주의가 김대중·노무현 집권 10년 동안에 훼손됐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그들의 기득권이 위협받는 것은 진보적 사상에 의한 위협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진전에 따른 사회의 투명성에 기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좌파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믿고 있을 것”이라며 그것을 “근거 없는 불안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진보 진영의 내부에 대한 진단도 했다. “진보 진영은 서로 중첩되는 세 가지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 하나는 진보 진영이 자기들의 능력을 뛰어넘는 목표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또 그들은 매우 적대적인 내부 경쟁을 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중도실용주의를 받아들인 것을 진보 진영에 영향을 미친 세 가지 요인 중 하나로 꼽았다. “나는 광범위하게 중도실용주의에 동의했다. 목표와 현실 사이의 차이만큼 후퇴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넘어서 자유무역협정(FTA)까지는 가버렸다. 실용주의 선까지 가버린 것이다. 나는 실용주의적인 입장과 현실의 한계를 받아들였다. 나는 권력자가 마주치는 현실의 한계를 받아들였고, 그 이상으로 실용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이러한 세 가지 요소가 결합해 나에 대한 불만이 늘었다”면서 “그들(진보 진영)은 지난 정부가 바뀌고 대선에서 패배한 것도 내 리더십의 결함으로 비판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대선 패배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없음을 강조한다.

“어떤 나라든 10년이 지나면 정부가 바뀌는 것이 자연스럽다. 행정부의 자연스러운 교체일 수 있다. 대선은 새로운 후보에 대한 평가이지,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뒤섞여 있다. 그들(진보 진영)이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대선 패배에 대한 비판까지 한다.”

2007년 4월 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가진 ‘한·미 FTA와 한국 경제 워크숍’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photo 청와대사진기자단
2007년 4월 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가진 ‘한·미 FTA와 한국 경제 워크숍’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photo 청와대사진기자단

“북한, 햇볕 용어 싫어해”

그는 “(임기 중) 과오가 있었지만 목표를 낮추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피할 수 있었던 몇 가지 싸움들은 있었다”는 언급도 했다. 그가 ‘피할 수 있었던 싸움’의 예로 든 것이 언론과의 전쟁이다. “나는 시장의 강력한 플레이어들 안에 권력이 있다고 믿었다. 언론 권력이 그런 시장 권력과 나란히 간다. 그래서 현실에서 정치 권력은 그런 시장에서의 성공적인 플레이어들에게 복무한다. 이것이 내가 언론으로부터 권력을 제거하기를 원했던 이유다. 나는 국민들 앞에서 언론을 고발하고 싶었다. 국민들에게 언론의 본질을 보여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런 과업은 나에게 너무나 컸다고 생각한다.”

그는 “힘을 가진 언론과 그들의 편견과 이중으로 싸우는 것이 결국 나에게는 너무 컸다”며 “나는 이것이 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었던 주요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통합된 정당(열린우리당)을 만들려고 시도한 것도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였다고 토로한다.

“계획을 세게 밀고 나가자 범진보 진영, 특히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반감이 일었다. 지역 균열에 대해 어떤 타협도 없을 만큼 격렬하게 공박했기 때문에 민주당 내부 세력들이 불만을 가질 만한 타당한 이유를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역주의, 언론과의 싸움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 그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만약 내가 그런 싸움들을 포기했으면 무엇을 했을까? 거기에도 답이 없긴 마찬가지다. 내가 민주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역주의에 영합했으면, 내가 또 큰 싸움을 피하기 위해 언론과 싸우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몇몇 중간 선거에서 승리해 국회에 우호적인 세력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노 전 대통령은 남북관계와 관련해서는 자신의 정책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부터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는 ‘햇볕’ 정책을 ‘평화와 번영’ 정책으로 바꾼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의 대북정책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책과 달랐나? 그렇지 않다. 그런데 왜 이름을 바꿨나? 그것은 북한이 ‘햇볕’이라는 용어에 불편해 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의 파트너가 의구심을 갖는 이름을 계속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봤다. 그들은 ‘햇볕’이라는 용어가 그들이 옷을 벗어던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지 의구심을 가졌다.”

그는 자신의 대북정책이 옳았다고 주장하면서 부시 행정부도 결국은 클린턴 행정부 때의 대북정책으로 돌아왔음을 강조했다. “내가 남북관계와 관련해 특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부시 행정부도 결국 8년 전 클린턴 대통령이 떠났던 자리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폐기됐던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8년 후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미국은 급격하게 앞으로 나아가려 했지만, 우리가 미국에 되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 위치로 되돌아왔다.”

그는 “우리는 이 이슈(대북 문제)를 우리의 분명한 입장을 갖고 다뤘다. 우리는 미국의 시각으로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며 “우리는 북·미 관계를 우리 스스로의 입장에서 조율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우리가 지난 10년간 이룬 것을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다. 그건 과거와는 달랐다”고 했다.

그는 미국과의 관계도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았다고 강조했다.

“사실 미국과는 불편한 문제들이 없었다. 비록 서로 관점은 달랐지만 미국이 우리를 일방적으로 한 건 없다. 그들은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지속적으로 우리의 입장을 존중했다. 우리도 일방적으로 미국을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는 양쪽의 입장이 서로 잘 고려된 케이스로 주한미군 재배치 문제를 들었다. “우리는 이미 (주한미군) 주둔 비용을 부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비용으로 주한미군의 재배치를 원했다. 미국으로서도 서울 한복판에 부대를 주둔시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2사단을 남쪽으로 옮기자는 결정은 내 정치적 입장과 미국의 전략적 입장이 맞아떨어진 산물이었다.”

“한·미 정부 간 갈등은 없었다”

그는 미국이 당초 반대하던 자신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요청을 결국 받아들인 것은 반미 감정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고 분석했다. “미국이 만약 나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반미 감정의 근거, 반미 운동의 시작점이 됐을 것이다. 우리가 처음 작통권 환수를 요청했을 때 미국은 처음에는 동의하지 많았지만 나중에는 동의했다. 그건 한국민의 자존심과 연결된 핵심 이슈였고, 정치적 갈등으로 전환될 수 있는 이유로 비쳐졌다.”

그는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자신과의 갈등으로 비쳐진 것들이 사실은 자신과 미국의 강경파들, 즉 네오콘들과의 갈등이었다는 지적도 한다. “부시 대통령을 만나서 양쪽이 합의를 이루고 모든 것이 원만하게 풀려나간 후 괜찮은 성명이 발표된다. 그러고 나면 미국 측 일각에서 반복적으로 말을 뒤집고 바꾼다. 그러한 불평은 미국 정부 주변과 내부의 좌절된 네오콘들 사이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면 한국 언론은 그걸 워싱턴과 서울의 갈등처럼 포장을 한다. 그러나 현실에선 한국과 미국 정부 간 갈등은 없었다.”

그는 미사일 방어(MD) 구상과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PSI) 구상도 비슷한 맥락에서 설명한다.

“우리는 MD와 PSI에 대해 끝내 반대했다. 우리는 확고할 필요가 있는 입장은 확고하게 견지한다. 우리는 MD와 PSI 둘 다 반대했고 (그 문제에 대해) 두 정부가 우호적으로 합의에 도달했다. 그러나 정부 주변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두 정부 사이가 나빠졌다고 주장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미국에 양보해야 할 것은 많이 양보했다며 그 예로 서울 경기여고 대체부지 사례를 꺼내기도 했다. “미국이 경기여고 부지에 대사관을 짓겠다는 계획을 세웠을 때 나는 협조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문화재 관리위원회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용산기지에 8만평(약 26만㎡)의 대체부지를 승인했다. 미국의 체면을 세워줄 만큼 큰 규모였다.”

그는 대북 관계와 관련해서도 미국과 큰 이견이 없었다고 강조했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 노무현 정부와 미국의 입장은 결국 일치했다. 작은 차이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미국은 결국 북한을 향한 화해정책으로 돌아섰다. 북·미 관계가 잘 풀리면 우리 정부가 할일이 많지 않다. 서울이 워싱턴과 갈등을 빚을 이유가 없다.”

그는 2002년 대선 때 자신이 반미 정책을 적극 옹호한 것으로 비쳐진 것도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대선 기간 내가 했던 것에 그렇게 많은 의미 부여를 하지 말았으면 한다. 나는 하지 않았는데 언론이 그렇게 묘사한 것이다. 반미주의가 위험하고 한국이 반미주의에 빠지면 심각한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언론이 반복적으로 말하길래 ‘우리가 반미주의를 채택하면 어떠냐. 그게 우리를 망하게 하느냐. 누군가 미국에 반대하기를 원하면 그렇게 하면 된다’고 말했을 뿐이다. 나는 (대선 기간) 반미 노선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

그는 “(대선 당시) 내가 한 번도 미국에 가보지 못했다는 것이 하도 조롱거리가 돼 내 캠프에서도 몇몇은 내가 미국을 방문하지 않으면 선거에서 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했다”며 “사실은 미국을 방문할 일이 없었다. 아무도 나를 초청하지 않았고 그래서 가지 않았다”며 웃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손을 맞잡은 노무현 전 대통령. ⓒphoto 연합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손을 맞잡은 노무현 전 대통령. ⓒphoto 연합

“개성공단은 한번 폐쇄되면 복구 힘들다”

그는 이명박 정부에서 남북관계가 경색되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우려했다. 특히 지금의 상황을 예견하듯 개성공단 같은 프로젝트는 한번 중단되면 다시 복구하기가 힘들다는 지적을 했다.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금강산 관광 등 관광 프로젝트들은 재개된다. 그러나 개성공단 같은 프로젝트는 한번 폐쇄되면 복구하기가 힘들다.” “(개성공단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회사들이 남북관계를 불신하고 북한의 태도를 불신하게 되면 그들은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다. 특히 이윤을 올리는 실질적인 회사들이 다시 돌아가지 않으면, 남북관계는 그 실질성을 잃어버리고 북한의 경제회복에 심각한 부담을 지운다. 북한이 경제회복에 실패하거나 위기를 맞을 때마다 그건 우리의 부담이 된다.”

그는 북한의 개방을 전제로 우리와 중국이 경쟁 관계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북한이 개방할 때 선점할 수 있는 시장에서 누가 첫 번째 기회를 잡고, 누구의 기술·법규·시스템·스탠더드·거래 제도나 관습이 북한의 시장과 양립하고 일치하느냐가 중요하다. 경제적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북한의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잃을까봐 두렵다. 어떤 점에서 중국과 우리는 시간 싸움을 하고 있다.”

그는 남북관계의 열쇠는 ‘신뢰’라며 자신이 임기 중 추구했던 구체적인 목표를 밝혔다.

“나는 북한이 우리로부터 송전(送電)을 받을 때까지 북한을 밀고 가자는 걸로 남북관계의 목표를 삼았다. 남북교류의 신뢰가 정점에 이를 때만이 북한은 남한으로부터 전력을 공급받을 것이다. 게다가 북한에 가스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 것은 상대방의 생명선을 움켜쥘 만큼 서로의 목구멍을 틀어쥐는 행동으로 진정한 신뢰가 있을 때만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 정도의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대북정책에서의 내 목표였다.”

그가 인터뷰에서 밝힌 가스 파이프라인은 러시아로부터 북한을 가로질러 남한에 이르는 가스 공급선을 뜻한다. 그는 “만약 북한이 가스 라인을 잠그면 우리에게는 치명적이 된다. 또 우리가 전력 공급을 중단하면 북한에 치명적이 된다. 그래서 양쪽은 가스와 전력을 계속 보낼 것”이라고 했다.

그는 평화가 통일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면서 그 과정에서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자신이 미국에 작통권 환수를 요청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고 강조했다. “내가 작통권환수를 요청하고 ‘개념 계획 5029’를 ‘작전 계획(OP)’으로 변경하는 것에 반대하며, PSI에 줄곧 응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 조치들은 우리가 북한을 침공할 의지가 없고 북한 붕괴를 획책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남북) 대화가 어느 지점에 이르면 우리가 다른 나라의 어떤 (공격) 시도로부터도 북한을 방어하겠다는 신호를 지속적으로 보내는 목적도 있었다.”

그는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던 김정일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는 나에게 어떤 의심도 없이 말했다”며 “적어도 그가 나에게 말할 때 어떤 것도 숨기거나 복선을 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솔직하게 터놓고 얘기했다”고 말했다.

그는 김정일이 권좌에서 물러날 경우 “북한의 강한 리더십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누가 리더가 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리더십이 흔들릴 때 보통은 바깥을 향한 강경정책을 취하는 나라가 많기 때문이다. 리더십이 흔들릴 때 강경정책이 취해질 가능성이 높고 그런 상황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작년 10월 개봉된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 포스터.
작년 10월 개봉된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 포스터.

“나는 신념이 부족하다”

그는 일본과 비교해서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다른 부러움을 사고 있고 그런 측면에서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우리도 해보자’ 등과 같은 국가적 자부심이 한국의 꿈이었다. 지금은 속도가 좀 늦춰지긴 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할 수 있다’는 자부심에 불을 붙인 이래 그런 접근은 계속돼왔다. 국제무대에서도 모든 사람이 한국을 칭찬한다. 내 임기 동안에도 외교적인 일로 해외에 나갈 때마다 그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특히 한국을 배우기를 원하는 개발도상국의 많은 국민들이 있었다.”

그는 “어떤 나라는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반면 어떤 나라들은 우리가 부자가 된 노하우를 배우고 싶어하고 또 다른 그룹은 한국의 경제와 민주주의를 일종의 존경심을 갖고 선망의 대상으로 부러워한다”며 “일본은 부자라서 따뜻한 환대를 받지만 한국처럼 그런 부러움의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서는 “나는 국가 주도 경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단 하나 포인트는 개발도상국 모델에 관한 모든 것이 권위주의적 통치를 하는 국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런 경제적 성공이 권위주의적인 통치 국가에서만 가능한가? 그러한 국가들에 다른 공통적인 요소는 없는가? 이런 것들이 나한테 가장 헷갈리는 이슈”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의 자부심이 계속될지는 의문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한국의 미래가 불확실하고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내부적인 갈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미래로 ‘미국의 길’와 ‘유럽의 길’이 논쟁적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자신은 ‘유럽의 길’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만약 성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보면 미래는 매우 밝다. 그러나 미국처럼 부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인간사회의 문제나 지구촌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한다면 우리의 현실은 칠흑같이 어둡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안에 많은 회의와 갈등을 안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신념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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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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