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대우그룹이 해체된 지 올해로 18년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변에서 여전히 대우의 흔적들과 마주친다. 대우조선해양·대우건설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른 기업에 피인수된 옛 대우 계열사들도 포스코대우·동부대우전자·미래에셋대우·타타대우·자일대우버스·대우호텔(베트남 하노이) 등의 형태로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서점가에서도 대우학술총서란 이름으로 나오는 고급서적을 쉽게 접할 수 있다. 18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대우’란 이름이 갖는 특유의 향수 때문이 아닐까.

3월 22일은 대우그룹의 창립 50주년이다. 한국에서 대우와 창업주 김우중 회장만큼 역사적 공과(功過)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기업과 기업인도 드물다. 1967년 창업한 대우실업은 1974년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된 후 1978년 수출 1위 기업에 올랐다. 사업다각화도 빨랐다. 섬유 수출로 시작한 사업은 금융·건설·전자·중공업·자동차·조선으로 급속히 넓혀갔다. 해외시장 진출은 가장 선두에 섰다. 경쟁기업들이 중동에서 오일머니를 캐낼 때 대우는 수단(1977), 리비아(1978) 등 아프리카를 공략했다.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를 즈음해 중국·베트남·헝가리·폴란드·루마니아 등 소위 ‘체제전환국’을 제일 먼저 개척한 것도 대우다. 그가 쓴 책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16개국 언어로 번역돼 160만부 이상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됐다.

하지만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와 함께 시련이 닥쳤다. 한때 ‘개발도상국 출신 세계 최대 다국적기업’으로 불리던 대우그룹은 하루아침에 공중분해됐다. 초원에서 단기필마로 일어나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을 정복했다가 사라진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을 연상시키는 허망한 몰락이었다. 1995년 미국의 GM(제너럴모터스)을 제치고 폴란드의 자동차기업 FSO를 인수했을 때 ‘킴기즈칸’이란 별명을 얻은 김우중이었다. 한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경제대통령’이라고 치켜세웠던 김우중 회장은 졸지에 ‘사기꾼’이라며 손가락질당했다. 미국 하버드대의 연구대상으로 올랐던 ‘세계경영’은 ‘문어발경영’으로 철저히 매도당했다. 숱한 비난 속에 그는 밖으로 떠돌 수밖에 없었다.

대우 창립 50주년을 앞둔 지난 3월 6일 오후, 서울 중구 퇴계로의 대우재단빌딩 18층에 있는 대우세계경영연구회에서 김우중 전 회장을 만났다.

1936년생이니 올해 여든한 살. 대우가 공중분해됐을 때 그의 얼굴에 드러났던 울분과 억울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세월이 흘렀기 때문일까. 트레이드마크인 커다란 뿔테안경은 여전했지만, 오른쪽 귓속에는 보청기를 끼고 있었다. 그와 만난 방에는 활짝 웃는 그의 사진과 함께 ‘창조 도전 희생’이란 대우그룹의 사훈(社訓)이 걸려 있었다. 창문 너머로는 그가 세계경영을 진두지휘하던 옛 대우센터(현 서울스퀘어)와 힐튼호텔이 내다보였다. 김 회장과의 인터뷰에는 1999년 대우사태 때 ㈜대우 사장을 지낸 장병주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장이 배석했다.

- 주로 베트남 하노이에 머문다고 들었다. 한국에는 자주 들어오나. “몸이 아파서 베트남에 가게 됐다. 1년에 절반은 베트남에서 절반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다.”

- 요즘 건강은 어떤가. 식사는 잘 하시나. “식사는 잘 한다. 커피는 약하게 타서 마신다. 요즘은 잠도 잘 잔다. 내가 뇌수술, 심장수술, 위수술을 다 했다. 술은 사업을 할 때부터 한 방울도 입에 안 댔다. 사업상 접대할 일이 있을 때는 색깔이 비슷한 엽차(葉茶)로 술을 대신해 마시는 척하고 옆으로 따라냈다. 담배는 피다가 끊었다를 반복했는데 5개월 전쯤 완전히 끊었다.”

- 3월 22일이 대우그룹 창립 50주년이다. 소회가 클 텐데. “다 지난 얘기다. (조금 생각하다가) 요즘 베트남에서 대학 졸업생들을 데려다가 가르치면서 옛날에 신입사원들을 직접 채용하던 기억은 많이 난다.”

인터뷰에 앞서 김우중 회장이 조성관 편집장과 주간조선 최신호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인터뷰에 앞서 김우중 회장이 조성관 편집장과 주간조선 최신호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 ‘킴기즈칸’이란 찬사를 받다가 모든 것을 다 잃었다. 너무 앞서나간 것 아닌가. “해외진출과 사업다각화는 옳은 방향이었다. 새로운 시장에 진출할 때 먼 미래를 내다보고 선단식(船團式)으로 시장을 개척했다.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해 꽃을 못 피웠다. 시기와 운(運)이 좋지 않았을 뿐이다.”

- 대우는 해체됐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대우정신’을 얘기한다. 대우정신, 즉 김우중정신이란 무엇인가. “나는 처음부터 남들이 하는 것은 안 했다. 내 스스로 해왔다. 지금 생각해 봐도 어떻게 그렇게 용감하게 세계적으로 했었는지….(웃음) 하여간 최선을 다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새로운 것에 도전을 많이 했다. 이왕 한다고 시작을 했으니 열심히 성공적으로 많이 했다. 수출해서 돈을 벌고 하니까 남들도 따라오더라. 새로운 곳으로 가면 또 따라오고, 하여간 재미가 있으니까 계속 하게 됐다.(웃음)”

1967년 3월 22일 창업한 대우의 역사는 ‘최초(最初)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 기업 최초 남미(에콰도르), 아프리카(수단) 진출과 같은 제3세계 개척은 익히 알려진 얘기다. 중국 시장에 가장 먼저 진출한 것도 대우다. 대우는 1987년 중국 푸젠성 푸저우(福州)에 냉장고 합작사를 세우면서 ‘죽(竹)의 장막’을 열었다. 이 대목에서 인터뷰에 배석한 장병주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장은 88서울올림픽 유치에 얽힌 비화를 털어놓았다. 장 회장은 “남북 대립 속에서 공산권 국가들의 표를 얻는 일이 중요했다”며 “88서울올림픽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유치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사회주의권에 많이 진출해 있던 대우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보충설명했다.

이 밖에 대우는 1979년 국내 최초 주부사원 채용, 1980년 해외(리비아) 여성주재원 파견, 1985년 국내 최초 대졸 여사원 공채 등 기업문화 선진화에도 진기록을 남겼다. 김우중 회장은 “유고슬라비아에 가보니 한국처럼 가장이 혼자서 돈을 버는 ‘퍼스널 인컴(personal income)’이 아니고, 여성들도 함께 일하면서 전 가족이 돈을 버는 ‘패밀리 인컴(family income)’이었다”며 “대졸 여사원 공채를 통해 우리도 가족들이 함께 수입을 올릴 수 있도록 하려 했다”고 말했다. 1991년 국민차 ‘티코’를 생산해 전 국민에게 자동차를 보급하려 한 것도 김우중이 아니면 꿈꾸기 힘들었다.

- 외환위기 때 일본계 노무라증권이 펴낸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제목의 ‘노무라 보고서’가 결정타였는데. “노무라증권 보고서는 정부의 CP(기업어음) 및 회사채 발행 규제 발표 직후에 나온 것이다. 작성자 스스로도 이 같은 정부의 발표를 보고 ‘정부가 대우를 죽이려 든다’라고 판단해서 썼다고 인정했다.”

- DJ정부 경제관료와의 충돌이 격렬했다고 들었다. “외환위기 극복에 대한 관점 차이가 컸다. 경제관료들은 대기업 구조조정이라는 IMF 권고를 철저히 따라야만 경제위기에 벗어난다고 봤다. 당시 나는 전경련 회장으로서 재계를 대표해 DJ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비판을 많이 했다. 불편한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 구조조정 당시 ‘전가의 보도’처럼 쓰인 ‘부채비율 200%’에 대한 생각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코미디 같은 기준이다. 종합상사에까지 이 기준을 일괄 적용하는 것은 무리였다. 당시 일본 종합상사들의 부채비율은 모두 500%가 넘었다. IMF도 ‘부채비율 200%’를 권유한 적이 없었다. IMF 요구보다 과도하게 할 필요가 없었다.”

- ‘부채비율 200%’를 강요한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이 ‘대우맨’(대우그룹 전략담당 상무) 출신이란 점은 아이러니다. “대우에서 세계경영 현장을 같이 누볐다. 수출 중심으로 이뤄진 대우의 사업구조 특수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유감스럽다.”

- 대우사태 당시 대응에 후회가 있나.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은 정부가 외환정책을 잘못 써서 온 것이다. 기업이 잘못해서 온 것이 아니다. 대우는 수출 비중이 컸다. 환율 변동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오히려 환율이 올라 수출도 매우 잘됐다. 외환위기를 빨리 극복하기 위해서는 적정 외환을 보유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으므로 공격적인 수출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김대중 정부 때 그룹이 해체됐지만 대우는 전임 정부들과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박정희 정부와는 찰떡궁합이었다. 실제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최근 기밀해제된 ‘한국: 과도기의 경제적 의사결정’이란 보고서에서 김우중 회장을 언급한 바 있다. CIA 보고서는 김우중 회장을 언급하며 “대우의 성공은 박정희 대통령과 김 회장의 각별한 관계에 따른 개인적 도움의 결과일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CIA가 언급한 각별한 관계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우중 회장의 선친 우당 김용하 선생에 관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2대 제주지사를 지내고 6·25전쟁 와중에 납북된 김용하 선생은 대구사범학교 교사를 지냈다. 대구사범학교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제자 중 한 명이다.

서울역 앞 옛 대우센터. 지금은 서울스퀘어로 이름이 바뀌었다. ⓒphoto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서울역 앞 옛 대우센터. 지금은 서울스퀘어로 이름이 바뀌었다. ⓒphoto 대우세계경영연구회

김우중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은 대우센터 지하에 있는 일식집 홍학(紅鶴)을 자주 찾았고 들를 때마다 연락을 주었다”며 “술 한잔 드시면 ‘우중아’라고 부르며 껴안는 등 정(情)이 많은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둘의 친밀한 관계에 배석한 비서실장·경호실장·서울시장 등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우중 회장을 아들처럼 여겼다”는 호사가들의 언급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김우중 회장은 “근로자 재산 형성을 위한 ‘재형저축’, 문맹퇴치를 위한 ‘산업체 부설학교’, 농가소득 증대를 위한 ‘농촌 새마을공장’ 등 박 대통령의 정책도 이 같은 분위기에서 내 아이디어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했다.

- 당초 우호적이던 김대중 대통령이 돌아선 까닭은. “대우의 상황을 왜곡되게 보고한 경제관료들의 오도(誤導), IMF의 대기업 구조조정 압력, 외교적 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7년 12월 사면됐는데, 개인적 인연이 있나. “1980년대 말, 대우조선은 전국 노동운동 세력의 집결지였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제3자 개입’ 등의 혐의로 고발당해 구속되고 변호사 업무정지까지 받았다. 하지만 당시 노무현 변호사는 우리의 진정성 있는 노사관계 해결의지를 접하고 생각이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1990년대 중반에는 대우조선에 파업이 발생할 때마다 거제 옥포에 내려와서 적극적으로 노사 중재를 해주었다. 나를 사면해준 사람도 노 전 대통령이다.”

- ‘현대맨’ 이명박 전 대통령과는 어떤 관계였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밑에서 심부름을 할 때 몇 번 만났다. 대통령이 된 뒤로 따로 만난 적은 없다.”

김우중 회장의 생을 정리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것은 대북(對北) 사업이다. 김우중 회장은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권 시절 ‘대북특사’의 밀명을 띠고 북한을 숱하게 오갔다. 특히 노태우 정권 때인 1991년 북한과 체결한 ‘남북기본합의서’도 김 회장의 막후 역할이 주효했다. 노태우·김일성 간 남북정상회담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김영삼 정부 때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성사될 뻔한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 역시 김우중 회장이 물밑에서 움직였다. 김대중 정부 때 이뤄진 정주영 회장의 개성공단에 앞서 김우중 회장은 김영삼 정부 때인 1996년 이미 남포공단을 열었다. 김우중 회장은 “북한에 20여차례 들어갔다”며 “아마 대한민국에서 나보다 김일성·김정일과 많이 만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 최근 북한의 미사일 발사 등으로 인한 남북관계 경색국면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 “남포공단을 해보고, 개성공단을 보면서 북한에서 사업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과거부터 북한 대신에 중국의 동북3성(省)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과 접경한 동북3성에 우리 기업이 투자하고 여기에 북한 인력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延吉)에 대우호텔을 지은 것도 동북3성 진출의 일환이었다. 동북3성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올해 81세, 김우중 회장의 마지막 사업은 ‘GYBM(글로벌청년사업가양성사업)’이다. 동남아 현지에 특화된 한국의 청년기업가들을 키워내는 일이다. 2011년 베트남에서 연수생 선발을 시작했다. 2014년과 2015년에는 각각 미얀마, 인도네시아로 범위를 확대했다. 지난해부터는 태국에서도 연수생 선발을 시작했다. 지난해까지 모두 440명의 한국 학생을 선발해 동남아에 특화된 ‘비즈니스맨’으로 키워냈다. 수업료는 무료로 수업공간은 하노이문화대학(베트남), 양곤외국어대학(미얀마), 반둥공과대학(인도네시아), 방콕탐마삿대학(태국)과 각각 협정을 체결해 해결한다. 인터뷰에 배석한 장병주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장은 “학생 1인당 연간 육성비는 줄잡아 2000만원 정도 드는데 고용노동부 산하 한국산업인력공단으로부터 1인당 800만원 정도 정부보조를 받는다”며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지만 학생들을 채용한 기업들이 감사하다는 뜻에서 후원금을 보내고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 ‘GYBM(글로벌청년사업가양성사업)’에 몰두하는 까닭은. “아침 5시30분에 기상해서 밤 10시까지 현지 언어를 중심으로 공부를 시킨다. 3개월이 지나면 달라져 있다. 꿈이 생긴다. 현지 기업에서 평판도 좋고 서로 데려가려고 한다. 한국에서 주재원을 뽑아 데리고 오는 것보다 부담이 적다. 어떤 회사는 1년에 10명 이상 데려가는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앞으로 10년만 더 살 수 있다면 이들이 잘되는 것을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

- 이 시대의 기업가정신은 무엇인가. “기업가정신은 지금이나 1960년대나 똑같다.”

- 풍찬노숙하면서 세계경영을 했는데, 후회가 있다면. “젊었을 때 집사람(정희자 여사)과 어디를 놀러가고 그런 적이 없다. 아이들은 집사람이 데리고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됐다. 나는 나대로 바쁘다 보니 가족들을 잘 못 챙긴 것 같다. 지금에야 그런 것도 좀 할 것을 하고 후회가 된다. 요즘 집사람이 건강이 좋지 않은데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키워드

#커버스토리
조성관 편집장 / 이동훈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