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커버스토리
[2449호] 2017.03.20

DJ정권은 어떻게 대우를 해체했나

▲ 지난해 11월 ‘코리안 미러클’ 발간보고회에서 유일호 기획재정부 장관 겸 경제부총리(오른쪽)와 만난 대우사태 전후의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 이헌재, 진념, 이규성, 강봉균(왼쪽부터). photo 뉴시스
1998년 4월의 일이다. 서울 남산의 힐튼호텔에서 김대중 정부 초대 비서실장인 김중권 실장 주재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후일 재정경제부 장관)이 마주 앉았다. 김우중 회장은 “올해도 수출을 조금만 더 하면 500억달러 흑자 난다. 그것으로 IMF(국제통화기금)에서 빌린 돈 다 갚고도 남고, 내년에 500억달러 흑자 나면 외환보유액(Reserve)이 된다.… 우리가 미국에 귀속해서 가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했다. 수출을 도와달라는 취지였다. 강봉균 수석은 “이제 시장경제 중심으로 하니 정부가 나서서 그런 것 못 합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김우중 회장은 “그러면 강 수석은 시장경제 하는데 무엇 때문에 거기 앉아 있나? 시장 중심이면 청와대 경제수석이고 비서관이고 필요 없겠네”라고 했다.
   
   2014년 출간한 ‘김우중과의 대화’에서 김우중 회장이 언급한 일화다. 당시 사건은 1999년 8월 대우그룹 해체 직전, 김우중 회장과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의 충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정권교체 후 기세등등 했을 DJ정부 경제관료들의 분위기가 어땠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결국 대우 해체 결정은 청와대 경제수석실이 1998년 11월 김대중 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서가 결정타가 됐다. 바로 전달인 1998년 10월, 일본계 노무라증권이 펴낸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제목의 보고서에 이은 연타였다. 김우중 회장 역시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와의 대담을 모아 2014년 펴낸 ‘김우중과의 대화’에서 “경제관료들이 나를 제거하려는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다고 믿고 있다”고 토로한 바 있다. 장병주 전 ㈜대우 사장은 “김우중 회장은 원래 직선적인 성격에다가 31살 때부터 사업을 하면서 말단 사무관부터 시작해 수없이 많은 관료들을 상대했다”며 “결국 이들이 승진해 장·차관, 수석이 됐을 때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실제 대우 해체를 결정한 당시 DJ정부 경제관료들에 대한 대우맨들의 평가는 혹독하다. 지난 1월 31일 별세한 강봉균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을 비롯해, 진념 당시 기획예산위원장,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 전윤철 당시 공정거래위원장 등이 그 대상이다. 이들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두 한국 경제 사령탑인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냈다. 강봉균 전 장관은 국회에도 진출해 3선 의원까지 지냈다. 이들은 지난 1월 작고한 강봉균 전 장관 주도로 최근까지 ‘코리안 미러클’이란 한국 경제 백서를 편찬하는 작업도 지속해왔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직 대우맨은 “아무리 ‘승자(勝者)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고는 하지만 자기가 자기 백서를 펴내는 것은 자화자찬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IMF 조기졸업 vs 중진국 함정
   
   이런 극과 극의 평가는 외환위기의 원인과 처방에 대한 현격한 시각 차 탓이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과 1996년 막대한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실제 1993년의 경상수지는 20억달러 흑자였으나, 이듬해 적자로 돌아서 1994년 44억달러, 1995년 97억달러, 1996년 238억달러로 급속히 불어났다.<표 참조> 또한 정부는 ‘국민소득 1만달러’라는 허울뿐인 타이틀에 집착해 700~800원대의 원화강세를 계속 용인했다. 수출기업에서는 “원달러환율이 900원 이상 되어야 수출경쟁력이 생긴다”며 아우성을 쳤지만 정부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선진국 클럽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을 위한 외환자유화 조치도 위기를 부채질했다. 1994년 24개의 단자사가 종합금융사(종금사)로 간판을 바꿔 달더니, 너도나도 해외에서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 돈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장병주 전 ㈜대우 사장은 “시중은행 대리급 직원들이 종금사 부장으로 스카우트되고, 홍콩·싱가포르 등지에 너도나도 해외지사를 개설해 돈놀이를 하면서 흥청망청했다”고 말했다.
   
   낮은 원달러환율(원화강세)은 수출기업들의 가격경쟁력을 약화시켰다. 실력 이상으로 강해진 원화로 인해 불요불급한 사치품 수입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로 인해 무역적자가 급증하면서 외환보유고가 거덜나기 시작했다. 결국 동남아 금융위기가 홍콩을 거쳐 한국으로 번지면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는 김영삼 정부 말기, 재정경제원 차관을 지낸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도 인정한 바 있다. 강 전 장관은 재경원 차관을 마치고 야인(野人) 시절 때 쓴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이란 저서에서 “1993년에서 1996년까지의 8% 단일관세율과 원화의 평가절상은 최악의 정책조합이었다”며 “1997년 외환위기의 결정적 원인은 여기에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경제관료들은 외환위기의 원인을 정부 정책 실패가 아닌 개별 기업 실패로 책임소재를 몰아갔다. 기업들의 무분별한 차입경영, 문어발식 선단식 경영이 외환위기를 초래했다는 진단이었다. 위기극복 방안을 두고도 현격한 시각 차가 존재했다. 관료집단은 IMF에서 제시한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금과옥조로 삼았다. 소위 ‘IMF 플러스’다. 1998년 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던 최종현 SK그룹 회장이 작고한 후 회장대리로 전경련 회장직을 인수인계한 김우중 회장은 정반대의 처방을 제시했다. 원달러환율이 급등했으니 “이제 돌멩이도 팔 수 있다”며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섬유원단을 해외에 팔던 세일즈맨 출신으로 ‘수출의 귀재’란 별명을 얻은 김우중다웠다.
   
   원화약세로 원달러환율이 올라가면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은 자연히 강화된다. 반면 높은 환율로 인해 불요불급한 사치품 수입은 자연히 억제된다. 또한 외환위기 직전 국내 전체적으로 약 1조달러가량 투자한 설비를 풀가동할 경우 수출확대로 인한 외환보유고 확충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역발상이었다. 외환위기 당시 대우의 수출 네트워크를 활용한 ‘금 모으기 국민운동’을 최초로 제안한 김우중다운 발상이었다. 실제 김우중 회장의 말처럼 원달러환율 급등으로 국내 수출품은 가격경쟁력을 회복했고, 1998년 한 해는 무려 400억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반면 관료집단은 김우중 회장의 수출확대를 통한 외환위기 극복방안을 ‘허풍’으로 치부했다. 김우중 회장과 관료집단 사이에서 고민하던 DJ는 결국 경제관료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결과 1998년 정주영의 현대에 이은 재계 서열 2위였던 김우중의 대우는 하루아침에 몰락한다. 현 재계 서열 1위인 삼성은 당시 3위에 불과했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를 주축으로 한 대우맨들은 “당시 결정으로 한국이 중진국의 함정에 빠졌다”고 주장한다. 당시 IMF 방침을 금과옥조로 떠받든 DJ정부 경제관료들의 결정 탓에, 기업의 수출과 설비투자에 쓸 자금공급은 막혀 버렸다. 은행들은 기업금융 대신 부동산담보대출(모기지론) 등 손쉬운 개인금융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제조업 기반은 훼손되면서 한국 기업들은 외국 기업에 헐값으로 팔려 나갔다. 대우사태 와중에 삼성자동차와의 빅딜이 무산되면서 각각 미국의 GM과 프랑스의 르노가 헐값에 인수해간 대우자동차(현 한국GM)와 삼성자동차(현 르노삼성)가 대표적인 경우다. ‘월드카’를 염두에 두고 조성한 한국의 자동차공장은 GM과 르노의 하청 생산기지로 전락했다. 또한 은행들이 기업금융 대신 손쉬운 모기지론에 치중한 결과 부동산값은 폭등하고 가계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결과적으로 당시 결정으로 인해 정리해고의 상시화, 부동산거품이 지속되면서 국민소득 3만~4만달러의 문턱에서 수십 년째 머무는 ‘중진국의 함정’에 빠졌다는 주장이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의 활동
   
전·현직 대우맨들이 ‘대우세계경영연구회’라는 조직을 만든 목적도 공정한 역사적 공과(功過) 평가를 위해서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사단법인으로 등록된 대우세계경영연구회 발족은 1999년 대우사태 당시 ㈜대우 사장으로 있었던 장병주 전 사장이 주도했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초대 회장을 맡고 있는 장병주 전 사장은 서울대 섬유공학과 출신으로 옛 상공부, 재무부를 거쳐 1979년 대우에 입사했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대우사태 당시 금융감독위원장)는 경기고 2년 후배인 장 전 사장을 “1999년 대우사태 때 위암과 싸워가며 수렁에 빠진 대우를 살려내느라 고군분투한 인물”로 기억했다. 장 전 사장은 1999년 8월 대우 워크아웃 때는 김우중 회장 대신 눈물을 머금고 대표이사 인감도장을 찍어야 했다. 장병주 전 사장은 “이헌재 부총리와는 재무부에 근무할 때 김용환 장관 밑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다”며 “김용환 장관이 외환위기 당시 비상경제대책위 당선자(김대중) 측 대표로 취임했을 때 실무기획단장으로 이헌재를 추천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대우그룹이 몰락한 후 한참 지나 장병주 전 사장이 SK그룹의 비상근고문으로 있을 때다. 그가 사는 여의도에서 종로에 있는 SK빌딩으로 가려면 서울역 앞 대우센터를 지나쳐야 했다. 대우센터는 1977년 준공 당시 국내에서 가장 연면적이 큰 지상 23층의 빌딩이었다. 김우중과 대우의 성공신화를 상징하던 육중한 빌딩으로, 시골에서 기차를 타고 상경한 젊은이들에게 1960~1970년대 한국의 고속 압축 성장을 이보다 더 잘 각인시킨 빌딩은 없었다. 대우사태 후 미국계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에 팔렸다가 지금은 싱가포르의 펀드 소유가 돼 있다. 그랬던 대우빌딩이 리모델링에 들어가더니 ‘서울스퀘어’란 생소한 이름으로 바뀐 것.
   
   이에 장 전 사장은 대우의 공과를 정확히 하기 위해 전·현직 대우맨들을 모아보기로 했다. 원래 대우의 임원급들은 1990년 발족한 ‘대우인회’란 상부상조 조직을 갖고 있었다. 2009년 당시 1600명가량의 회원이 있었는데, 평균연령 70대로 소멸위기에 있었다. 이에 2009년 대우에서 3년 이상 근무한 대리급 이상 직원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해 ‘대우세계경영연구회’란 조직을 발족했다. 그 결과 무려 4700명이 모였다. 회원 중 500여명은 해외에 있어 32곳의 해외지회를 두고 있다.
   
   ‘세계경영’ 재평가를 주도해온 곳도 대우세계경영연구회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는 작고한 이상훈 전 ㈜대우 부사장 주도로 2010년 펴낸 ‘대우 ‘세계경영’ 내용과 시사점’이란 보고서에서 “세계경영은 당시 사회주의 경제 체제의 붕괴에 따라 출현한 ‘신흥시장’에 있어서 한국 기업이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효과적인 ‘진입 및 선점 전략’ 모델이었다”며 “세계경영은 한국 기업의 세계화 방향을 뚜렷이 제시한 경영전략이었다”고 자평한 바 있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에 따르면, 1999년 워크아웃에 들어가기 직전 대우는 396개의 해외 현지법인을 두고 있었다. 해외 현지고용 인원은 무려 15만명에 달했다.
   
   오는 3월 22일 대우그룹 창립 5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을 준비하는 곳도 대우세계경영연구회다. 김우중 회장이 ‘세계경영’을 하면서 남긴 어록들을 모아 ‘김우중 어록’을 출간하고, 세계경영과 관련한 사진들을 모아 서울 종로구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사진전과 다큐멘터리 상영을 할 계획이다. 대우그룹 해체 직전인 1998년 개관한 아트선재센터는 김우중 회장과 부인 정희자 여사가 교통사고로 먼저 떠나보낸 큰아들 김선재씨를 기리기 위해 만든 아트센터다. 3월 22일에는 서울 남산 밀레니엄힐튼호텔에서 50주년 기념식도 개최한다. 1983년 개관한 남산 힐튼호텔 23~24층 펜트하우스는 김우중 회장의 집무실이었다. 대우그룹은 1967년 창업 이래 세계경영에 매진해오면서 그간의 역사를 되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1997년 그룹 창립 30주년을 맞아 ‘대우그룹 30년사’를 편찬했으나 외환위기의 어수선한 분위기 탓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40년사는 그룹이 공중분해되어 챙길 수조차 없었다. 세계제국을 세웠으나 글로 된 역사를 남기지 못한 칭기즈칸의 몽골제국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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