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학계 출신 공직자를 일컫는 ‘폴리페서’는 경직된 관료사회에 민간의 참신성과 전문성을 불어넣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국민대·서강대 교수 출신으로 박정희 정부 때 재무부 장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내며 압축성장의 기틀을 다진 남덕우 전 총리, 뉴욕대 교수 출신으로 전두환 정부 때 최장수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내며 ‘3저 호황’에 기반한 고도성장을 이끈 사공일 전 재무부 장관 등이다. 가까이는 서강대 교수 출신으로 노태우 정부 때 보건사회부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내며 경제민주화의 기틀을 짠 김종인 전 의원 등이 대표적인 학계 출신 정치인이다.

백용호 이화여대 정책과학대학원 교수는 이명박 정부의 대표적 학계 출신 공직자다.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당시 후보의 싱크탱크인 바른정책연구원을 이끌었고, MB정부 출범 후에는 공정거래위원장(장관급), 국세청장, 청와대 정책실장 등 핵심요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학계 출신 첫 국세청장으로 이주성, 전군표, 한상률 등 전임 청장들이 각종 추문에 휘말려 망가뜨린 조직을 추스르는 중책을 맡기도 했다. 학교로 무사복귀한 지금도 이 전 대통령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주고 있다. 2014년에는 공직 경험을 모아 ‘백용호의 반전’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지난 3월 22일, 이화여대에서 만난 백용호 교수는 “관계(官界)를 제외하면 인재풀이 법조계, 언론계 등으로 한정된 상황에서 학계 인사를 기용하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백 교수는 폴리페서를 ‘현실참여형 교수’라고 정의했다. “지나치게 현실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비전을 제시하고 전문성을 국정에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 그가 든 폴리페서의 장점이다. 그렇다면 공직에 진출한 폴리페서들이 유념해야 할 점은 무엇일가. 그는 공직 기용 후 학연, 지연, 혈연을 바탕으로 한 무리한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첫 번째로 꼽았다. “대한민국에서 로빈슨 크루소처럼 은둔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인사청탁 등 다양한 요구가 불가피한 측면도 있지만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또 “본인의 소신과 생각을 너무 빨리 펼치려는 생각도 접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너무 서두를 경우 관료사회와 공감대를 이루지 못해 오히려 갈등의 소지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는 탈무드의 말을 인용해 “바다를 단번에 만들려 해서는 안 되고, 냇물부터 만들어가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청탁 거절할 수 있는 용기

백 교수는 ‘관료사회 장악’이란 표현에도 거부감을 나타냈다. “대한민국 관료들은 우수한 집단으로 이들과 동반자적·동지적 관계로 일을 해야 제대로 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소신과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에는 언제든 물러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공직에 있을 때는 집무실에 갈아 신을 구두 한 켤레 외에 개인사물을 두지 않았다고 했다.

백 교수는 대과(大過) 없이 무사히 공직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총선 출마 경험이 도움이 됐다고 했다. 사실 그는 1996년 15대 총선 때 39세의 나이로 서울 서대문 지역구에 도전했다가 낙선한 경험이 있다. 30대 젊은 혈기 탓인지 대개 휴직하고 출마하는 다른 교수들과 달리 교수직마저 사퇴하고 출마했다. 그는 “경실련 활동을 일찍부터 해오면서 직을 유지한 채 총선에 출마하는 교수들을 비판했는데 나도 차마 그럴 수 없었다”고 했다. 낙선한 뒤에는 원외 지역구위원장 등을 맡았지만 사실상 ‘반(半)백수’가 됐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경솔했다고 질타했다. 그는 “돌이켜보면 당시 경험이 정무적 감각을 쌓고 서민들의 생활을 이해하면서 정책적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됐다”고 했다.

그가 MB와 본격 인연을 맺은 것도 이즈음이다. MB는 1996년 15대 총선 때 종로에서 출마해 당선됐으나 선거법 위반으로 이내 의원직을 상실했다. 동병상련의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15세 나이 차를 뛰어넘어 동지적 관계로 맺어진 것. 이후 백 교수는 MB의 브레인이 됐고, 싱크탱크로 만든 동아시아연구원, 그 후신인 국제전략연구원(GSI), 국제전략연구원에서 분화된 바른정책연구원(BPI)을 줄곧 이끌었다.

결국 바른정책연구원은 이명박 정부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은 류우익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가 이끈 국제전략연구원과 함께 MB정부의 주요 인재풀이 됐다. 행정안전부 장관을 지낸 이달곤 서울대 교수,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낸 안병만 한국외대 총장 등이 바른정책연구원 출신이다.

그는 최근 야권에서 박근혜 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잃어버린 10년’으로 싸잡아 평가하는 데는 동의하지 않았다. “MB정부 출범 초인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1929년 대공황 이후 최대 위기로 이를 무사히 넘긴 것만도 재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사실 미국발 금융위기는 동남아발 국지위기에 불과했던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보다 더 큰 위기였다. 개방경제를 지향하는 한국에는 치명타였다. 그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2010년 유럽발 재정위기로 MB정부는 늘 위기상태로 국정을 운영했음에도 다른 나라에 비해 선방했고 이는 외국에서도 모두 인정한다”며 “G20 정상회의 신흥국 최초 개최 등 외교 분야 역시 지금과 비교해 더할 나위없이 존재감이 컸다”고 말했다.

백 교수는 박근혜 정부 실패의 원인으로는 정부 초기 경제 컨트롤타워가 미약했던 점과 LTV·DTI 완화 등 부동산 경기부양책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점을 꼽았다. 부동산 경기부양에 의존하다 보니 가계부채 문제가 더 커졌다는 설명이다. 백 교수는 청와대 정책실장 시절 국토부와 건설업계의 반대에도 LTV·DTI를 유지했던 경험도 소개했다. 그는 “경기는 어차피 사이클인 만큼 구조조정의 큰 그림을 그렸어야 했는데 아쉽다”며 “‘창조경제’ 역시 필요한 화두였지만 구체화시키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가 차기 정권에 주문하는 것은 경제에 대한 비전 제시와 자신감을 불어넣는 일이다. “경제는 어차피 심리인 만큼, 지나친 불안감 해소가 가장 큰 과제”란 것이 그의 말이다. 심지어 그는 “불평등·불공정 문제가 국민통합을 저해할 정도로 심각한 이때 야권 일각에서 주장하는 ‘최저임금 인상’이나 ‘기본소득제 도입’도 전향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 기본소득제 도입에 대한 효과가 더 크다는 전제에서다. 백 교수는 “정책의 이념화·정치화는 이제 지양해야 한다”면서 “MB정부의 ‘녹색성장’ 같은 정책도 어느 정부가 들어서든 정책기조를 꾸준히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키워드

#커버스토리
이동훈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