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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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미국 디트로이트 에디슨사(社)의 회장 워커 리 시슬러 박사가 한국을 찾았다. 시슬러 박사는 2차 대전 후 유럽의 전력망 복구에 관여한 인물. 이승만 대통령과 마주 앉은 시슬러 박사는 ‘금속막대기’를 꺼내서 흔들었다. 시슬러 박사가 흔든 막대기는 ‘핵연료봉’ 모형. “이 막대기가 화차 100대분에 맞먹는 힘을 낼 수 있습니다.” 6·25전쟁 이후 전력 부족으로 고심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눈이 번쩍 뜨였다. 원자탄 두 방에 일제가 항복하는 것을 지켜본 이 대통령으로서는 새삼 원자력의 힘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시슬러 박사의 방한으로 시작한 한국 원자력의 역사는 한국원자력연구소 설립(1959), 연구용 원자로 건립(1962), 첫 번째 상업용 원자로 가동(1978),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출(2009)에 이르기까지 성공신화를 써왔다. 2차 대전 후 신생독립국 중 원자력 기술 자립은 물론 해외수출까지 달성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탈핵’ 공약과 함께 한국 원자력은 존폐 위기에 몰려 있다. 1959년 이후 축적한 모든 기술과 노하우가 사장될 위기다.

학계에서는 지난 6월 1일, 에너지 전공교수 230명이 단체로 성명을 내는 등 정부의 방침에 부글부글 끓고 있다. 하지만 정작 업계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못 낸다. 한국전력, 한국수력원자력 등 청와대와 정부 눈치를 살펴야 하는 공기업이 원전 산업을 이끌고 있어서다. 그 아래 부품 업체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를 틈 타 문재인 정부는 지난 6월 19일, 국내 1호 상업용 원전인 부산시 기장군에 있는 고리원전 1호기의 영구정지 선포식을 시작으로 ‘탈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6월 27일에는 울산시 울주군에서 건설 중인 신고리 5·6호기 건설 일시중지를 전격 결정하면서 더욱 속도를 높이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전광석화 같은 ‘탈핵’ ‘탈원전’ 일방통행에 이미 상당수 원로학자들은 ‘멘붕’ 상태다. 소장학자들이원로학자들을 대신해 간간이 목소리를 내는 중이다. 서울대 원자력공학과 출신으로 옛 과학기술부 원자력국을 거쳐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한국연구재단 원자력단장을 지낸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최근 목소리를 내는 소장학자 중 한 명이다. 지난 6월 26일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의 경희대 국제캠퍼스에서 만난 정범진 교수는 이를 “현대판 분서갱유(焚書坑儒)”라고 했다.

- 문재인 정부의 탈(脫)원전을 우려하는 까닭은. “과학기술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반도체, 자동차와 같이 국부를 창출하기 위한 기술이다. 또 하나는 국방·우주·원자력과 같이 국력을 과시하기 위한 기술이다. 후자는 설령 금전적 가치가 없더라도 일정한 기술력을 유지해야 한다. 원전은 돈 있다고 사오면 되는 게 아니다. 핵무기로 전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받기 위해 사찰을 받아야 한다. ‘IAEA(국제원자력기구)’라는 별도의 국제기구를 둘 정도로 국제정치에 민감하다.”

- 1956년 시슬러 박사의 방한을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표현했다. “시슬러 박사의 방한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원자력을 배우기 위해 273명을 유학 보냈다. 당시 1인당 GDP가 70달러일 때다. 한 명당 유학비로 6000달러 이상이 들었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생활을 오래해서 미국에만 유학생을 보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료를 찾아보니 미국과 유럽에 반반씩 보냈다. 그만큼 원자력 기술 독립에 신경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 2차 대전 후 다른 신생독립국은 어땠나. “대다수 나라에서 2차 대전 후 원자력에 관심을 표했다. 대부분 나라에 원자력연구소가 생긴 것도 그즈음이다. 필리핀은 우리보다도 더 빠르다. 북한도 1960년부터 핵 연구에 착수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다른 개도국들은 원자력연구소를 세우고 연구용 원자로를 가동하는 데 그쳤다. 상업용 원자로를 가동하고, 기술 국산화, 원자로 수출에까지 이른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지난 6월 19일 고리원전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photo 김종호 조선일보 기자
지난 6월 19일 고리원전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photo 김종호 조선일보 기자

 

- 박정희 대통령 때 ‘고리 1호기’ 가동 등 큰 진전이 있었다. “1968년 고리 1호기 건설 결정을 내린다. 마침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의 성공으로 인하여 가난한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 차관을 빌릴 여건이 조성됐다. 박정희 정부 때 1·2차 석유파동도 영향이 있었다. 1973년 1차 석유파동 때는 석유파동으로 자재값이 앙등하면서 불가피하게 공기가 지연됐다. 하지만 1978년 2차 석유파동 때는 고리 1호기가 탈석유화에 상당 부분 기여를 했다.”

- 박정희의 원자력에 대한 관심은 ‘핵무기’를 염두에 둔 것 아닌가. “19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이 있었다. 1974년 인도가 핵 개발에 성공하고, 1977년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이 ‘핵우산 철거’를 발표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박 대통령은 ‘생존수단을 강구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월성 1호기’를 핵무기 개발에 용이한 ‘중수로’로 설계한 것이 그 증거다. 하지만 박정희는 상업용 원자로 가동을 병행하면서 일석이조를 노렸다. 북한과 같이 핵무기만 개발하려면 연구용 원자로만으로도 충분했다.”

정 교수에 따르면, 1979년 박정희 사후 한국의 원자력 기술독립은 큰 변화를 맞이한다. 10·26사태 후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이 미국의 승인을 받기 위해 미사일 사거리 제한과 핵개발 포기를 약속하면서다. 이후 원자력 기술 개발은 숨어서 연구하는 시대로 전환된다. 원자력연구소는 1980년 ‘한국에너지연구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연구비는 정부 예산을 받던 것에서 한전의 용역을 수행해서 자체 조달하는 구조로 바뀐다. 한국에너지연구소는 1989년에야 이름이 환원됐지만 기형적인 연구비 조달 구조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2007년에는 이름이 ‘한국원자력연구원’으로 바뀌었다.

- 1980년대에 상황이 급변했다. “1979년 3월, 미국 스리마일섬(TMI-2) 원전사고가 터졌다. 1980년대부터 미국 원자력 업체들의 발주가 끊겼다. 당시 미국의 ‘컴버스천 엔지니어링(CE)’과 같은 회사가 한국과의 기술 협력에 적극적으로 나왔다.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기술이전을 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박사급 인재들을 미국으로 보내 기술이전을 받았다. 대개 석사급들이 가는데, 박사들이 직접 가니 기술 습득이 빨랐다.”

- 오는 203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20%까지 늘린다는데. “신재생에너지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한국에서 1㎾당 발전단가는 원전 50원, 석탄 70원, LNG 120원, 풍력 120~130원, 태양광 300~400원이다. 원자력 50원은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과 사용후핵연료 처분, 원전해체 비용을 포함한 금액이다. 원자력을 태양광으로 대체하면 단순 계산으로도 8배가 오른다. 기름값이 8배 올랐다고 쳐봐라. 아무도 안 쓸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나와 있다.”

- 다른 나라들은 사정이 어떤가. “독일은 갈탄(褐炭)이 풍부하다. 이탈리아는 수력이 좋다. 미국과 유럽은 각각 전력망이 연결돼 있다. 전력이 모자라면 서로 빌려 오면 된다. 시차를 이용해 전력을 나눠 쓸 수 있다. 한국은 전력망이 고립돼 있는 섬과 같다. 시차가 없어 부하가 한꺼번에 걸린다. 중국·일본과 전력망을 연결한다고 해도 사드(THAAD) 배치, 위안부 사태에서 보듯이 서로 빌려줄 것 같나. 에너지 안보상으로도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 원전의 안전에는 문제가 없나. “에너지원별 사망률을 보면 1조W/h를 생산할 때 석탄은 10만명이고 원자력은 90명에 불과하다. 미국만 놓고 보면 원자력 사망률은 0.1명이다. 미국 스리마일과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때도 한 명도 안 죽었다. 반면 태양광과 풍력의 사망률은 각각 440명, 150명에 달한다. 원자력은 가장 안전한 에너지원이다. 원전 사고가 터진 미국(스리마일), 러시아(체르노빌), 일본(후쿠시마) 중 원전을 포기한 나라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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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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