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1869~ 1940)가 1938년 9월 30일 런던 헤스턴 공항에서 몰려온 환영 인파 앞에서 뮌헨 평화협정문을 흔들면서 연설한 내용의 일부이다.
체임벌린 총리는 나치 독일이 체코를 침공하려 하자 아돌프 히틀러 총통과의 협상을 통해 전쟁을 막으려 했다. 체임벌린 총리는 독일 뮌헨에서 에두아르 달라디에 프랑스 총리,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총리와 함께 히틀러와 협상을 벌였다. 체임벌린 총리는 히틀러에게 체코의 다른 지역을 침공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세우면서 독일인 거주 지역인 수데텐란트를 할양하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고, 히틀러가 이에 동의했다. 이에 따라 4개국 지도자들은 뮌헨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뮌헨의 교훈
당시 체임벌린 총리는 ‘히틀러에게 체코의 영토 일부를 양보해 유럽을 전쟁의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하지만 윈스턴 처칠 의원은 “전체주의 정권에 대한 굴복과 물질 제공으로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이 새로운 국제질서냐”면서 체임벌린 총리를 비판했다. 처칠의 말대로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야심을 간파하지 못했다. 체임벌린은 히틀러가 국제사회의 여론 때문에 뮌헨 평화협정을 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체임벌린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히틀러의 ‘위장 평화’ 공세에 속았다. 실제로 히틀러는 수데텐란트를 차지한 데 이어 1939년 3월, 체코 전역까지 점령해 뮌헨 평화협정문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히틀러는 이어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게 됐다. 이로 인해 ‘적의 도발 앞에서 평화를 애걸하면 오히려 비극을 초래한다’는 ‘뮌헨의 교훈(lesson of Munich)’이라는 국제정치학 용어까지 만들어졌다.
히틀러는 나치 독일과 소련이 맺은 불가침조약까지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했다. 독일 외상 요아힘 리벤트로프와 소련 인민위원회 의장 겸 외무인민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성을 따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이라고 불린 이 조약이 1938년 8월 체결되자, 전 세계는 견원지간인 양국이 평화를 선택했다면서 환호했다. 공산주의를 증오한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의사당 방화 사건을 독일 공산당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면서 독일 공산당을 불법화하고 강제로 해산시키는 등 탄압했다. 소련은 나치 독일이 자국을 위협하는 세력이라면서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보였다. 이 조약의 주요 내용은 상호 불침략과 분쟁의 평화적 처리 등이었다. 이 조약에는 또 폴란드 서부 지역은 독일이, 발트국은 소련이 각각 차지한다는 비밀 조항들도 들어 있었다. 이후 소련은 2차 대전에서 독·소불가침 조약에 따라 나치 독일에 중립을 지켰다. 하지만 유럽 전체를 차지하려던 히틀러는 1941년 6월 소련을 공격했다. 나치 독일과의 불가침 조약만을 믿고 침공에 대비하지 못한 소련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은 4년간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2500만명이 희생되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다.
미국 최고의 전략가라는 말을 들어온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에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다. 바로 미국과 남·북베트남이 1973년 1월 체결한 파리 평화협정이다. 당시 막대한 전비(戰費)와 국내의 반전 여론 때문에 미국은 북베트남(월맹)과 평화협정을 체결해 베트남전쟁을 종결하고 싶었다. 이를 간파한 북베트남은 협상과정에서 미군 철수를 집요하게 요구했다. 남베트남(월남)은 이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미국의 협상대표였던 키신저는 미군 철수 후 북베트남이 평화협정을 파기하고 남베트남을 침공하면 미국의 해·공군력을 동원해 북베트남을 응징하고 지상군을 지원하겠다고 남베트남에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파리 평화협정은 종이쪽에 불과한 셈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