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커버스토리
[2468호] 2017.07.31

中 반체제 인사 1호, 왕단 인터뷰

왕단 컴백 민주화투쟁 2라운드 “류샤오보 죽음 재조사… 뉴욕에 동상 세우겠다”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 지난 7월 16일 미국에서 열린 류샤오보 추도식에서 추모사를 발표한 천안문 민주화 시위의 주역 왕단(王丹). 사진은 2011년 때의 모습이다. photo AFP
최근 왕단(王丹)에 관한 뉴스를 접한 것은 지난 7월 16일이었다. 류샤오보(劉曉波)가 숨진 뒤 3일 만에 치른 추도식을 통해서였다. 고인을 기리는 추모사를 왕단이 발표했다는 뉴스였다. 놀란 것은 왕단의 출현 장소였다. 뉴욕 맨해튼 차이나타운이었다. 1989년 벌어졌던 천안문사태의 주인공이었던 왕단은 대만 신추(新竹)에 있는 칭화(淸華)대학 역사학 교수가 되면서 2010년 망명지였던 미국을 떠났다. 사실 왕단이 다시 미국에 올지 모른다는 얘기는 지난해 6월에도 있었다. 대만에서의 활동을 접고 본격적인 중국 민주화운동을 위해 곧 워싱턴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보도가 흘러나왔는데 이번 미국행이 그런 결단에서 이뤄진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왕단의 감옥 친구이기도 한 류샤오보의 추도식은 왕단이 미국에 도착한 닷새 후 열렸다. 왕단은 추모사에서 ‘류샤오보 사인(死因) 조사위원회’ 설립을 공식화했다. 류샤오보의 죽음이 단순사가 아니라 공산당 독재정권이 의도적으로 저지른 범죄라는 것이 왕단의 생각이다.
   
   필자는 왕단과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시점은 2002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왕단은 노벨상 평화상 후보에 오른 첫 번째 중국인이다. 2000년대 초 류샤오보보다 앞서 매년 후보에 오르내렸다. 2002년 10월 11일,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최종 수상자로 결정했다. 수상자가 발표된 바로 그날, 필자는 당시 하버드대학에 머물던 왕단을 워싱턴으로 초대했다. 내셔널프레스센터(NPC)에서 열린 중국 문제 심포지엄의 스피커로 그를 초대했다. 필자가 운영하는 작은 싱크탱크를 통한 만남이었다. 당시 왕단이 노벨상 수상자로 발표됐더라면 심포지엄 행사장이 취재진으로 터져나갈 뻔했지만 새벽녘에 카터가 수상자로 결정되면서 혼잡은 일어나지 않았다.
   
   15년 전 기억이지만, 당시 왕단은 중국 민주주의 달성의 전제조건으로 ‘국민 계몽운동’을 강조했다.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수차례 반복했다. 당시 왕단의 모습을 통해 두 가지를 느꼈다. 투사형이 아니라 호소형 활동가라는 것이 첫 번째 인상이었다. 조용하고 따뜻했다. 강변이 아니라 설득하려는 지식인이란 느낌이 들었다. 두 번째는 근현대사 속에 나타난 한국 지식인의 부활이다. 민주주의 운동만이 아니라 무성영화 필름 속에나 남아 있는 독립운동 지사들의 모습을 왕단에게서 발견했다. 이후 왕단에 관한 소식은 7년 전 대만행이 결정될 때 마지막으로 들었다. 하버드에서의 공부를 끝내고 후학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축하할 일이었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씁쓸한 기분이 일었다.
   
   
   왕단, 다시 미국으로
   
   중국의 국부(國父)인 쑨원(孫文)의 표현이지만 ‘흩어진 모래알’은 중국인의 캐릭터 중 하나다. 협력 단결이 안 된다는 의미다. 주관적 판단이지만 현재 중국의 민주화 운동가들이 흩어진 모래알들의 대표적 사례인 것 같다. 미국에서 만난 중국 민주화 운동가를 보면 대부분 점(点)에 그친다.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이 없다. 전부 따로 놀고 운동 방향과 방식도 백인백색이다. 류샤오보와 왕단은 그같은 1인 독불장군식 민주화 운동과 다른 길을 걸었다. 바로 조직을 통한 활동이다.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공산독재를 종식시키고자 한 협력형 지식인의 대표주자들이다. 왕단의 대만행은 그같은 활동에 대한 한계에서 나온 것이라 판단됐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생활고가 왕단이 대만으로 간 결정적 계기일 듯하다. 우선 미국에서는 활동할 만한 기본적인 자금이 없었다. 민주주의 운동가를 대하는 일반 중국인의 시선은 차갑다기보다 아예 무관심에 가깝다. 아무리 이상이 강해도 돈 떨어진 민주주의 활동가의 ‘말로’는 너무도 뻔하다. 미국 망명생활은 초기에만 국무부가 지원해줄 뿐 혼자 알아서 해결해 나가야 한다. 영어도 안 되고 사회주의 질서에 젖은 중국인이 닳고 닳은 자본주의 생활에 적응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같은 배경을 이해한다면 왕단의 미국 재상륙은 중국 민주주의 운동 전체의 ‘업그레이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20세이던 1989년 베이징(北京)대 학생회장, 29세이던 1998년 미국 망명, 38세이던 2007년 하버드대 역사학 박사, 48세이던 2017년 대만대학 역사학 교수. 파란만장한 인생으로 20년 가까이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왕단은 과연 현재의 중국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1989년 6월 4일 천안문사태 이후 동지로 지낸 류샤오보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떤 계획하에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을까?
   
   왕단은 지난 7월 11일 미국 도착 이후 로스앤젤레스, 뉴욕, 워싱턴 등을 오가며 동지들을 규합하고 있다. 캐나다도 곧 방문할 예정이다. 왕단의 미국 출현 소식을 접한 순간 그와의 연락을 위해 수소문에 나섰다. 가까운 중국 반체제 인사를 통해 왕단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곧바로 인터뷰를 요청했다. 15년 전 인연과 함께 어디든지 달려가겠다고 했지만 “직접 만날 시간이 없다”며 “이메일을 통한 인터뷰를 하자”고 연락해 왔다. 왕단은 중국어로 답을 보내왔다.
   
   일단 그에게 2017년 중국 정세와 시진핑(習近平) 주석에 대한 생각부터 물어봤다.
   
   “시진핑은 모든 파워를 자신에게 집중시키려는 데 혈안이다. 그러나 경제가 추락하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파워가 있어도 해결 능력에 한계가 있다. 중국공산당 입장에서 볼 때 경제 추락은 엄청난 위협이 되고 있다. 중국의 안정은 경제적 발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소득이 급격히 추락하는 상황에서 사회적 모순도 한꺼번에 분출될 것이다.”
   
   
▲ 1989년 천안문사태 당시 시위를 이끌고 있는 왕단.

   “류샤오보는 동지이자 스승”
   
   뉴욕에서 치러진 류샤오보 추도식에는 대만계 인사 200여명이 참가했다. 중국 정부의 인터넷 차단 덕분에 보통 중국인들은 류샤오보가 누구인지조차 모른다. 왕단은 류샤오보와 아주 가까운 인물이다. 추모사를 읽은 것은 민주주의 운동가 이전에 가장 가까운 지인으로서의 예의로 비쳐진다. 류샤오보와의 인연과 그에 대한 생각을 좀 더 듣고 싶었다.
   
   “내가 류샤오보와 처음 만난 것은 1989년 천안문광장에서의 투쟁 당시다. 이후 1993년부터 1995년 사이 1주일에 한 번씩 만났다. 나에게 류샤오보는 동지 이전에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중국공산당은 고의적 의도하에 그를 살해했다. 그와 관련된 사실 여부에 관한 조사는 추후에 진행될 것이다. 류샤오보의 죽음은 중국 민주화 운동의 큰 손실이다. 그러나 단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정신적 신화로서 중국인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용기와 결의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류샤오보가 남긴 위업이다. 그의 신화는 앞으로 펼쳐질 민주화 운동을 통해 다시 한번 빛을 발할 것이다.”
   
   ‘류샤오보 사인 조사위원회’는 미국에 도착한 왕단이 중국 독재정권을 겨냥한 첫 번째 정치활동이다.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물어봤다.
   
   “류샤오보 죽음과 관련해 내 주변의 사람들과 논의 중인 것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류샤오보 동상을 세우는 일이다. 현재 뉴욕에서 적당한 장소를 물색 중이다. 둘째 미국 의원들과 함께 워싱턴의 중국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할 계획이다. 현재 몇몇 미국 의원들이 이미 적극 참가를 약속한 상태다. 셋째는 류샤오보의 부인과 관련된 항명운동이다. 국제사회에 호소하면서 그의 외국행을 추진하고 있다. 넷째 류샤오보가 추진했던 중국 민주화 촉구 선언문인 ‘08헌장’의 서명자를 늘려나가는 일이다. 원래 류샤오보를 비롯해 303명이 서명했지만, 앞으로 서명자의 수를 대폭 확대해나갈 것이다.”
   
   왕단은 중국 정부가 리스트에 올려놓은 ‘반정부 파괴분자 제1호’다.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에 비견되는 눈엣가시가 바로 왕단이다. 왕단이 운영한다는 소셜네트워킹이나 인터넷 사이트의 대부분은 중국공산당이 가공해낸 짝퉁에 불과하다. 왕단 사이트에 여성의 누드사진을 실어서 마치 왕단이 즐기는 것처럼 각색하는 식이다. 중국공산당의 위협이 어느 정도인지 물어봤다.
   
   “중국공산당으로부터의 살해 협박과 공갈은 일상적인 것이다. 주로 ‘우마오(五毛)’를 통해 나에 대한 공격과 중상 비난이 이뤄진다. 내 이메일이나 소셜네트워킹은 물론, 나에 관한 인테넷상의 모든 정보가 우마오에 의해 왜곡되고 있다.”
   
   우마오는 10만명에 달하는 중국공산당 지지 디지털 군단이다. 여론을 조장하고 반대자를 매국노로 몰아가는 식의 활동을 하고 있다. 사드 문제를 둘러싼 중국 내 반한(反韓)운동에도 우마오가 관여하고 있다. 중국만이 아니라 해외 모든 반체제 인사들은 우마오의 타깃이 된다. 10만명이 댓글을 쓰면서 왕단을 매도할 경우 정상적인 사람들의 판단력조차 흐려지기 십상이다.
   
   
▲ 2002년 10월 필자(오른쪽)가 주최한 심포지엄에 초청된 왕단.

   “비극의 출발은 중국 지식인”
   
   사실 류샤오보 죽음의 한 원인은 중국공산당만이 아니라 서방의 무책임한 대중국 불간섭주의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감옥에 갇힌 노벨상 수상자에 대해 입을 다문 것이 서방 정치지도자들이며 언론이다. 서방 국가들의 이러한 태도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물었다.
   
   “경제적 번영이 이뤄질 경우 언젠가 정치적 민주화도 달성될 것이라고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은 믿고 있다. 잘못된 생각이다. 중국은 다르다. 중국의 민주화는 서방이 하나로 똘똘 뭉쳐 대응할 때 효과를 볼 수 있다. 중국이 원하는 대로, 분열된 상태에서 각각 대응할 경우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가 없다. 인권탄압에 나선 중국 지도자의 입국을 서방 모두가 제한하는 식의 방안이 필요하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일 듯하지만 중국에서 왕단이란 이름은 역사 속의 흔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정보 통제 국가 중국에서 28년 전 벌어진 천안문사태, 즉 6·4운동을 알고 있는 중국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지만 왕단은 6·4운동이 과거가 아닌 미래라고 답한다.
   
   “가까운 장래에 엄청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때 가서 6·4운동은 중국 내 정치 변화를 선도하는 근거이자 권위로 자리 잡을 것이다. 6·4운동은 1989년 이후 지금까지, 나아가 중국이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바로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민주주의를 원치 않는 사람은 없다. 중국인도 사람이다. 따라서 중국인 역시 민주주의를 원한다. 6·4운동은 그 증거다. 만약 민주주의를 원치 않는 중국인이 있다면, 중국 내에서 민주주의 달성에 관한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에 나타난 탄식이라 볼 수 있다.”
   
   왕단은 하버드대에서 공부를 하던 2005년 10월, 중국헌정협진회(中國憲政協進會)라는 싱크탱크를 만들었다. 10여명의 반체제 인사와 함께 만든 정책개발 조직으로 왕단이 대표를 맡았다. 가슴도 중요하지만 머리도 중요하다는 판단하에서 추진한 일이었다. 지금도 비슷한 견해였다.
   
   “중국 민주주의 운동은 용기와 결의만이 아니라 구체적 정책을 만들어내는 능력도 길러내야 한다. 내가 앞으로 벌일 일은 싱크탱크를 통한 정책개발이다. 주변 사람들과 힘을 합쳐 중국 민주주의에 이바지할 정책개발에 나설 예정이다.”
   
   2017년 중국을 보면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는 나라로 비쳐진다. 대학생을 비롯한 지식인의 최고 관심이 ‘돈’에만 몰려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도 무식한 생각일까? 왕단은 민주주의에 대한 조국의 무관심을 어떻게 해석할까?
   
   “중국 지식인들의 상당수는 사회적 책임을 망각하고 자신의 생에만 매달리는 소시민적 삶에 빠져 있다. 중국이 아직 독재국가로 남아 있는 중국적 비극의 출발점이 바로 중국 지식인에 있다. 계몽운동은 중국 지식인으로서 지켜야 할 가장 큰 사회적 책임이다. 책이나 인터넷을 통한 대중교육과 학생들을 상대로 한 진실을 추구하는 연구, 나아가 중국의 미래를 밝혀줄 정책대안 같은 것들이 지식인의 사명이다.”
   
   그에게 트럼프 대통령의 대(對)중국 정책을 어떻게 보는지도 물어봤다.
   
   “트럼프는 현실정치에 주목하는 듯하다. 중국과 타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실망이다. 미국이 추구하던 이상주의에 기초한, 인권 외교가 중국에 적용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 방문 계획을 물어봤더니 “갈 계획이 없다”는 짧은 답만 돌아왔다.
   
   왕단은 2000년 9월 한국 엠네스트와 함께 서울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로부터 비자를 받지 못해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이었다. 한국 정부의 중국 콤플렉스가 주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민주주의 투사를 가진 한국이지만 당시 왕단의 한국 입국에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 왕단이 한국 민주주의 투사들의 관심사가 되는 그날은 한국이 중국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시기이기도 할 것이다. 왕단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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