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시카고대 ‘사이언스 오브 버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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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탈(脫)원전 정책’의 결정적인 이정표가 될 신고리원자력발전소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두고 중단 찬성파와 반대파의 공방 대결이 뜨겁다. 정부는 신고리원전 5·6호기의 건설 중단 여부 판단을 지난 7월 구성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이하 공론화위)’에 맡겼다. 공론화위는 8월 중으로 약 2만명의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1차 여론조사를 하고, 이 중 500명을 뽑아 ‘시민대표참여단(시민배심원단·이하 시민참여단)’을 구성할 예정이다. 500명의 시민참여단은 2차 여론조사를 거친 뒤 2박3일간의 합숙 토론을 한 후 3차 여론조사에서 공론을 도출해 10월 21일경 공론화위에 의견을 전달할 예정이다. 공론화위는 수렴된 의견을 다시 정부에 전한다. 형식은 정부가 시민들의 의견을 전달받아 원전의 건설 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모양새지만, 실질적으로는 시민참여단의 의견이 신고리 5·6호기의 운명을 결정할 확률이 높다.

공론화위를 중심으로 한 이번 정책결정에 사용되는 기법은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ing)’다. 공론조사는 과학적 표본추출에 의한 여론조사에, 참여자들의 학습과 토론을 결합한 조사 기법이다. 제임스 S. 피시킨(James S. Fishkin)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가 1991년 저서 ‘민주주의와 공론조사(Democracy and Deliberation)’를 통해 처음 소개했다.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이는 김원용 전 이화여대 교수다. 그는 직역하면 ‘숙의조사’ ‘심의조사’로 번역될 수 있는 ‘Deliberative Polling’을 ‘공론조사’라고 번역한 이유에 대해 전화통화에서 “Public Opinion을 의미하는 ‘여론’과 구분지어야 했고, ‘심의조사’ 혹은 ‘숙의조사’라고 번역하려니 숙의 과정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는 것 같아 공론조사라고 번역했다”고 말했다.

공론조사는 일반 여론조사에 숙의(deliberation)를 더한 조사 기법으로 크게 네 단계를 거친다. 첫 단계는 주제에 대한 1차 여론조사이며, 두 번째 단계는 1차 여론조사 응답자 중 성·연령·지역별로 대표성 있는 토론 참가자(시민참여단)를 선정하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시민참여단을 한자리에 모아 균형 잡힌 정보를 제공하고 전문가 강연과 상호 토론(공론화 과정)을 거치도록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심도 있는 학습과 토론을 위해 1박2일 이상의 합숙이 권장된다. 마지막 단계는 시민참여단을 대상으로 1차 여론조사와 동일한 질문으로 2차 여론조사를 실시하는 것으로, 이 2차 조사 결과는 정보 습득과 토론이라는 숙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결과다. 여기서 도출된 2차 여론조사 결과가 1차 여론조사와 비교해 어떻게 달라지는지가 공론조사의 핵심이다.

정부는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공론조사 기법을 활용하는 이유에 대해 “현 상황에서 이 조사기법이 가장 실질적인 대표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신고리 5·6호기 중단 여부를 결정한다면 찬성과 반대 어느 쪽을 택하든 극심한 반발이 예상되고, 국민투표를 실시할 경우 비전문가인 국민 모두가 원전 이슈에 매몰돼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한다. 전문가 집단을 대상으로 공청회를 열어 결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입장이 바뀔 가능성은 낮기 때문에 의견충돌만 벌어질 수 있다. 수천 명을 대상으로 하는 일반적인 정책 여론조사는 조사 대상인 국민들이 외부 세력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약점이다.

지난 8월 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더불어민주당 최인호 의원실과 사단법인 한국사회갈등해소센터가 주관한 ‘탈원전과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방향 모색’ 토론회가 열렸다. ⓒphoto 연합
지난 8월 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더불어민주당 최인호 의원실과 사단법인 한국사회갈등해소센터가 주관한 ‘탈원전과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방향 모색’ 토론회가 열렸다. ⓒphoto 연합

공론조사를 하는 이유

하지만 일각에서는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와 같은 정책 결정을 공론조사에 맡기는 방안이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사안이 이미 정치화돼 공론조사를 통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2013년 10월부터 약 1년8개월간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홍두승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난 8월 8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신고리 5·6호기 공사 중단 문제가 왜 공론화 대상인지 이해할 수 없다”며 “이렇게 정치화된 사안은 참여자들이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주간조선은 이와 관련해 지난 8월 7일과 8일 오후 공론조사를 고안한 제임스 S. 피시킨 미국 스탠퍼드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에게 현재 한국 정부가 수행하고 있는 공론조사 기법에 대한 견해를 묻는 이메일 질문지를 보냈다. 피시킨 교수는 8월 8일 두 차례에 걸쳐 기자에게 보낸 답신에서 “약 30년간 27개국에서 행한 공론조사 관련 프로젝트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왔다”며 교과서적인 공론조사 기법에 대해 설명했다. 피시킨 교수는 미국 스탠퍼드대 ‘숙의민주주의센터(CDD·Center for Deliberative Democracy)’ 센터장도 맡고 있다. 공론조사 개념과 방법론을 고안해낸 그가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공론조사와 관련해 자신의 의견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선 피시킨 교수는 “한국 내 집단에서 어떤 방식으로도 도움이나 조언 요청을 받은 적이 없다”며 “한 나라의 정부가 우리에게 어떤 조언이나 도움도 요청하려는 노력 없이 공론조사를 진행하는 것은 처음(This is the first time that a government has gone ahead without any effort to seek our advice or help)”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피시킨 교수가 가리키는 ‘우리’는 스탠퍼드대 ‘숙의민주주의센터(CDD)’를 말한다. 지난 30년간 이뤄진 정부의 공론조사 중 자신을 거치지 않은 경우는 한국이 처음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공론화위는 “현행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는 피시킨 교수의 공론조사와 이미 차이가 있다”는 입장이다. 지난 8월 10일 공개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 3차 회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회의에 참석한 공론화위의 한 위원은 “마크를 달 경우 피시킨 교수가 정해 놓은 조사방식과 절차를 따라가야 하는데, 우리의 시민참여형 조사는 이미 몇 가지 차이가 있다”며 “피시킨 교수의 공론조사 방식은 하나의 범례이고, 우리 상황에 맞춰서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크를 단다’는 것은 공론조사에 대한 피시킨 교수의 상표권(trademark)을 구입해 사용료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자문을 받는다는 뜻이다. 공론화위 스스로 현재 진행 중인 공론조사가 피시킨 교수의 교과서적인 공론조사와는 차이가 난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 7월 말 열린 공론화위 2차 회의 직전 위원들에게 공론조사 관련 강연을 한 공론조사 전문가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8월 17일 전화통화에서 “피시킨의 방법론을 따르는 게 안정적”이라며 이렇게 주장했다. “(마크를 달면) 피시킨 교수가 공론화위 주요 회의에 직접 참관하니 우리가 문제에 부딪힐 땐 직접 물어보면 된다. 사실 이전 공론화위 회의 때 발표하면서 ‘마크를 달라’고 제언했는데 여러 요소들, 예컨대 시간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공론화위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이 교수는 “이제는 우리가 공론조사 설계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설계할 때 나한테 자문을 구한다고 했는데 아직 연락은 없다”고 했다.

앞서 지난 8월 8일 공론화위는 국무조정실을 통해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를 위한 시민참여형 조사’ 용역을 최대 25억원의 입찰에 부친다고 조달청 나라장터에 공고했다. 공론화위는 8월 22일까지 희망업체 입찰 참여 신청을 받은 뒤 전문성 평가 80%와 가격 평가 20%를 토대로 낙찰업체를 선정한다. 이 계획대로라면 피시킨 교수를 ‘패싱’해 한국의 공론화위와 여론조사 업체가 공론조사 설계를 하게 된다.

피시킨 교수가 공론조사 기법을 설명하면서 중요한 요소로 꼽은 것은 세 가지다. 첫째 시민참여단이 대표성을 띠고 있나, 둘째 1차 조사와 2차 조사를 거치면서 의견이 변화하는가, 셋째 마지막 공론을 택한 명확한 이유가 있는가 등이다. 현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의 경우 아직 시민참여단을 꾸리기 위한 1차 여론조사도 행해지지 않은 만큼, 이 세 가지 문제에 대한 답은 현재로선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공론조사 권위자의 자문도 없이 일반 여론조사 업체에 공론조사 설계를 맡길 경우 제대로 된 공론조사가 이뤄질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 8월 8일 피시킨 교수가 기자에게 보내온 메일 일부분.
지난 8월 8일 피시킨 교수가 기자에게 보내온 메일 일부분.

국내 전문가도 “피시킨 따라야”

특히 국내에는 공론조사 경험도 일천하고 이렇다 할 권위자도 드물다. 공론조사의 고안자인 피시킨 교수는 1991년부터 4권의 저서를 통해 공론조사와 관련된 아이디어와 방법론을 소개하고 강화해왔다. 하지만 현재까지 피시킨 교수의 저서는 ‘민주주의와 공론조사’를 제외하면 국내에 번역된 책이 없다. 피시킨 교수는 ‘민주주의와 공론조사’ 개정판 서문에서 “이 책을 쓸 당시 공론조사는 아이디어 수준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피시킨 교수가 공론조사의 실행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책은 2009년 출판된 ‘When the people speak’이다. 하지만 이 책은 아직까지 국내 번역본이 없는 상황이다. 관련 국내 연구도 미흡한 수준이다. 국내에 공론조사와 관련한 학위 논문이 한 편도 없고, 조사연구학회와 정치학회 등 관련 주요 학회들의 학회지에 실린 연구 논문도 3편이 전부다. “공론조사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현재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는 원전 찬·반 양론에 부딪힌 정부가 임시방편으로 택한 측면이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탈원전은 기정사실화한 채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만을 공론조사에 맡기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한다. 박진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지난 8월 15일 한국일보 기고에서 “건설 중단만 의제로 삼으면 탈원전에 대한 논란이 더 커질 수 있다”며 “자칫하면 탈원전 공론화위원회를 다시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법적 근거도 부실하다. 피시킨 교수에 따르면, 그가 자문했던 몽골의 경우 개헌 관련 공론조사의 필요성과 절차를 명시한 실정법을 의회가 통과시킨 후 공론조사를 실시했다. 반면 우리는 공론조사의 절차와 형식을 규정한 법률이 없다. 법률을 발의하고 심의할 만한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현재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공론조사에 부친 법적 근거는 공론화위원회의 구성과 운영을 규정한 지난 7월 17일 총리훈령이 전부다. 행정조직 내부에서의 법적 구속력은 있지만 대외적 구속력은 없다.

공론조사를 두고 흔히 제기되는 의문점은 “고도로 전문화된 분야의 정책 결정을 일반 시민에게 맡기는 것이 적절하냐”는 지적이다. 피시킨 교수는 이에 대해 이렇게 답변했다.

“(공론조사에) 필수적인 작업이 올바르게 고안된다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해당 문제가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점을 명확히 규명한다면, 대중이 복잡하고 기술적인 문제들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사람들은 순수하게 기술적으로만 선택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상충하는 가치 중 어떤 것이 중요한지를 판별해 정책의 기본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존재다.”

피시킨 교수는 “공론조사의 고안자로서 한국 정부가 현재 변형해 수행하는 공론조사 기법을 평가해 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나는 공론조사라는 용어에 관한 상표권(trademark)을 가지고 있을 뿐 한국이 수행하는 프로젝트에 관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그 프로젝트에 대해서 판단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나는 공론조사를 수행하기 위한 노력들을 어떻게 평가할지에 관한 기준표(criteria)를 정리해 (책으로) 출판해왔고, 공론조사가 만약 적절히 설계된다면, 이 모든 표준을 충족할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싶다. 아마도 한국 정부는 스스로의 방법을 개발했을 것이고, 그 방법은 큰 성공을 거둘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한국에서 진행되는 공론조사가 적절해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노력의 질(the quality of the effort)’에 달렸다”면서 성공적인 공론조사를 위한 10가지 요건<15쪽 참조>을 제시했다.

피시킨 교수가 직접 밝힌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를 위한 10가지 요건

1 자료가 (양쪽 입장에 대해) 균형 잡혀 있으면서도 일반 시민들이 충분히 접근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가?(Are the briefing materials balanced and accessible to ordinary citizens?)

2 숙의 이전과 이후 사용될 질문지에 있는 질문들이 알맞게 구성되어 있는가?(Are the questions in the questionnaire to be asked before and after properly constructed?)

3 (시민참여단을 쪼갠)소집단 희의의 사회자들이 그들 자신의 입장을 암시하거나 정보를 제공하려 나서지 않으면서 (쌍방간에)대등한 토론을 진행하도록 훈련되었는가?(Are the moderators of the small group sessions trained to facilitate an equal discussion with no hint of their own positions and no effort to offer information?)

4 소집단의 질문에 답할 전문가 패널들이 사안에 대한 옹호 측과 비판 측으로 공평하게 배분돼 있는가?(Are the expert panels who respond to questions from the small groups balanced with advocates for and against?)

5 (조사 대상)표본이 성향이나 인구통계적으로 대표성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여줄 수 있도록 자료가 수집되었는가?(Is data collected to show whether or not the sample is representative in attitudes and demographics?)

6 (시민참여단이)회의에 참여하고 필요한 여행에 나설 수 있도록 보조해주는 적절한 인센티브(보수)가 제공되는가?(Are appropriate incentives offered to subsidize participation and travel?)

7 참가자들이 관점을 바꿀 경우 왜 바꾸었는지를 설명하는 적절한 선택지 답안들이 설문에 제공되는가?(Are there appropriate explanatory variables in the questionnaire to provide an explanation for why people change their views if they do?)

8 소집단의 토의 내용은 평가를 위해 충분할 만큼 뛰어난 품질로 녹화되고 기록되는가?(Are the small group discussions taped and transcribed to provide qualitative data for evaluation?)

9 소집단은 임의로 구성되는가?(Are the small groups randomly assigned?)

10 공론조사 사업이 균형된 자료를 제공하며 사전 결론이 없이, 대표성과 숙의성이라는 두 가지 기준을 충족시킬 만큼 신뢰할 만한가?(Will the project be credible for satisfying two criteria: is it representative and is it deliberative--with balanced materials and no pre-determined conclu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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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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