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커버스토리
[2472호] 2017.08.28

대만의 미군은 어떻게 철수했나

中 핵·ICBM무장에 美 굴복?

▲ 1960년 6월 대만을 방문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장제스 총통과 함께 타이베이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대만 수도 타이베이(臺北) 중산(中山)구의 타이베이시립미술관은 1983년 개관한 대만 최초의 현대미술관이다. 그런데 1979년까지만 해도 타이베이시립미술관과 중산미술공원 일대는 주(駐)대만 미군사령부(USTDC)가 주둔하고 있었다. 해군 중장이 지휘하는 미군사령부를 중심으로 극장, 식당, 대형마트 규모의 PX를 비롯해 거대한 군사기지를 형성했다. 타이베이시립미술관 북쪽의 양명산(陽明山) 일대로는 미군 장교들과 군속(軍屬)들이 쓰는 미군 주택들이 있었고, 미군들을 청취 대상으로 하는 미군방송국(AFNT)도 있었다. 마치 주한 미군사령부가 주둔하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의 용산 미군기지와 같았다.
   
   1979년까지 주대만 미국대사관이 있었던 타이베이 신이루(信義路)의 ‘미국재대(在臺)협회’ 역시 과거 미 군사고문단(MAAG)이 주둔하던 곳이다. 이곳에는 미국대사관을 비롯해 미 중앙정보국(CIA) 대만지부도 적을 두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대만 최고 명문 대만대 관리학원(경영대학원) 자리도 과거 ‘타이베이 에어 스테이션(air station)’이라는 이름으로 미 공군 감청부대와 ‘327항공사’가 주둔했다.
   
   타이베이 외곽인 신베이와 타오위안을 비롯해 타이중, 타이난에도 각각 미 공군 소속 전투기가 수시로 이착륙하는 미 공군기지들이 있었다. 대만 최대 항구도시인 가오슝(高雄)에는 미 7함대의 분대가 주둔했다. 대만 육군사령부가 있는 타오위안의 룽탄(龍潭)기지에는 주대만 미육군(USAFT)도 함께 머물렀다. 하지만 1979년 미군이 전면 철수한 이래 지금 대만에서 미군의 흔적조차 찾기가 쉽지 않다.
   
   미국 조야(朝野)에서 주한미군 철수론이 공공연히 거론되면서 주대만미군 철수가 반면교사(反面敎師) 대상으로 떠올랐다.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는 지난 8월 16일, 워싱턴에서 발행되는 잡지 ‘더 아메리칸 프로스펙트’와 인터뷰에서 “중국이 북한 핵(核)을 동결시키는 대가로 주한미군을 철수하는 외교적 거래도 고려해야 한다”며 주한미군 철수를 처음으로 언급했다. 이 발언이 있은 지 이틀 만인 8월 18일, 스티브 배넌은 백악관 수석전략가 직위에서 전격 경질됐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브레인’이라고 불렸던 스티브 배넌의 입에서 나온 ‘주한미군 철수’는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공공연히 흘러나오는 주한미군 철수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도 최근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에게 “중국의 우려를 덜기 위해 한반도에서 대부분의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하는 것 등이 포함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헨리 키신저는 1972년 중국과 ‘상하이 코뮈니케’를 발표하면서 대만주둔 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처음으로 명문화한 장본인이다. 그 이듬해에는 ‘파리평화협정’(1973)을 체결하면서 베트남주둔 미군을 철수시켰다. 키신저는 ‘파리평화협정’ 덕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베트남은 ‘평화협정’을 체결한 지 정확히 3년 후인 1976년 적화(赤化)됐다.
   
   미국 신구(新舊) 전략가들의 입에서 주한미군 철수가 공공연히 흘러나오는 마당에 국내 일부 좌파시민단체들은 이를 부채질하고 있다. 지난 8월 21일, 한·미 연합군사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훈련이 시작된 날, 주한 미국대사관 앞 서울 광화문광장에서는 ‘한·미 전쟁연습 중단촉구 100인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날 기자회견을 이끈 ‘민중총궐기투쟁본부’와 ‘전쟁반대평화실현국민행동’은 “1992년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하고 북·미 간 고위급 대화를 시작했던 역사적 전례도 있다”며 “한반도에 전쟁위기를 불러올 한·미 연합 을지프리덤가디언 전쟁연습을 즉각 중단하라”고 주장했다.
   
   이날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는 ‘참여연대’ ‘시민평화포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등이, 청와대 앞 분수대광장에서는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평통사)’ 등 13개 시민단체가 집회를 열었다. 한·미 연합훈련 참관을 위해 해리 해리스 미 태평양사령관(해군 대장), 존 하이튼 미 전략사령관(공군 대장), 새뮤얼 그리브스 미 미사일방어국장(공군 중장) 등 미군 수뇌부가 일제히 방한한 와중에 벌어진 ‘적전분열(敵前分裂)’ 양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9년 대만에서의 미군 철수는 미군이 얼마나 쉽게 발을 뺄 수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주는 사례다. 미군이 대만에 주둔하게 된 것은 1950년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발발하면서다. 당초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극동방위선인 ‘애치슨라인’에서 제외했던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중공군 주력 부대를 중국 대륙 남쪽에 묶어둘 계산으로 미 7함대의 대만 방어를 선언한다. 이를 계기로 1951년 대만과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의 전 단계로 미 군사고문단을 대만에 파견하기에 이른다.
   
   6·25전쟁 발발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장제스(蔣介石) 대만 총통은 1954년 미국 워싱턴에서 정식으로 ‘중·미(中美) 공동방어조약’이란 군사동맹을 체결한다. 대만과 미국의 공동방어조약 체결 직전 중국 측이 저장성 타이저우 앞바다의 일강산도(一江山島)와 대진도(大陳島)를 무력점령하며 ‘1차 대만해협 위기’를 조장한 것이 오히려 조약체결의 추진력이 됐다. 1953년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대만 역시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장제스 총통의 아들인 장징궈(蔣經國) 전 총통의 평전에 따르면, 장제스는 ‘중·미 공동방어조약’을 “흑암(黑暗) 중에 비친 한 줄기 서광(曙光)”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이듬해인 1955년부터 발효된 ‘중·미 공동방어조약’에 따라 미군 병력은 중국에 맞서 대만섬을 방어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대만으로 속속 진주했다. 1951년 미 군사고문단 116명에 불과했던 미군 병력은 한때 5000명, 군속들까지 포함하면 1만명에 달했다. 육군 위주의 주한미군과 달리 주로 해·공군 위주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규모다. 타이베이를 비롯해 대만 전역에는 미군기지가 개설됐고, 대만섬은 미국의 거대한 ‘불침(不沈) 항공모함’처럼 변모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미군을 붙들기 위해 대만주둔 미군에 부여한 외교관에 준하는 ‘면책특권’으로 인해 반미시위를 촉발한 사건도 있었다. 1957년 ‘류즈란(劉自然) 사건’이 대표적이다. 1957년 타이베이 양명산의 미군 주택 앞에서 대만인 류즈란을 총으로 살해한 미군 상사가 ‘면책특권’으로 방면된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타이베이 미국대사관 앞에서는 대규모 반미시위가 벌어졌다. 계엄령에도 불구하고 대사관을 포위한 뒤 성조기를 불태우고 대사관 차량을 방화하는 등 격렬한 시위 끝에 3명이 사망했고 111명이 무더기로 체포됐다. 당시 격렬한 시위 배후에 장제스 총통의 아들인 장징궈가 실질적으로 지휘한 ‘중국청년구국단’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장제스 총통은 미군들을 대만에 붙잡아두기 위해 아들을 한직으로 좌천시키는 읍참마속을 단행했다.
   
   장제스가 미군을 주저앉힌 덕분에 대만은 1958년 중공군의 금문도(金門島) 포격으로 시작된 ‘제2차 대만해협 위기’ 때 중국의 압도적 무력 앞에서 섬을 지켜낼 수 있었다. 대만에 주둔 중인 미 7함대가 대만 본섬에서 금문도로 이어지는 보급선을 확보했다. 하늘에서는 미 공군이 수적으로 열세였던 대만 공군의 F-86 세이버 전투기를 ‘사이드와인더’ 미사일이란 신무기로 무장해주었기에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 대만 타이베이의 옛 주대만 미군사령부(USTDC) 입구.

   베트남전 때는 미군 특수
   
   대만은 베트남전쟁 때는 미군으로 인한 전쟁 특수(特需)도 톡톡히 누렸다. 1964년 통킹만사건으로 베트남전에 개입한 미군이 베트남과 가까운 대만을 주요 휴가지로 정하면서다. 대만 동부 화롄(花蓮)이나 최남단 컨딩(墾丁) 등 풍광 좋은 관광지에는 미군 전용 휴양소가 개설됐다. 베트남전 발발 초기 2만여명에 달했던 미군 휴가장병들은 1971년 최대 21만명에 달할 정도로 호황을 이뤘다. 당시 대만에서 미군 장병들이 뿌리고 간 돈만 약 5280만달러에 달했다.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이 개발한 타이베이의 베이터우(北投) 온천이 미군 휴양지로 각광받은 것도 이때다.
   
   하지만 미군들이 흥청망청 뿌려대는 달러에 취해 있을 때 대만은 호되게 뒤통수를 맞았다. 1971년 10월 25일, 유엔 총회가 ‘2758호 결의안’을 채택하면서다. “중화인민공화국(중공) 정부 대표가 국제연합에서 중국을 대표하여 안보리 상임이사국임을 승인한다”는 내용이었다. “국제연합에서 합법적인 중국의 대표는 오직 중화인민공화국(중공) 정부 대표로, 국제연합 및 관련 조직을 불법적으로 점거하고 있는 장제스 대표를 추방하기로 결정한다”는 대만으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결의안이었다.
   
   결의안이 채택되면서 2차 대전 승전국의 일원으로서 유엔 창설멤버였던 대만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는 하루아침에 중화인민공화국(중국)으로 넘어갔다. 비록 미국과 일본은 반대표를 던졌으나 찬성 76표, 반대 35표, 기권 17표로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시 유엔 총회에 참석한 중국 대표단이었던 차오관화(喬冠華) 단장과 황화(黃華) 부단장은 뉴욕의 유엔 총회에서 박장대소했다.
   
   유엔 결의안 2758호 채택을 전후로 미국 역시 대만 몰래 중국에 접근하면서 배신을 준비했다. 1971년 7월 헨리 키신저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비밀 방중(訪中)이 신호탄이었다. 키신저의 회고록 ‘중국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협상파트너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줄기차게 주대만미군 철수와 중·미 공동방어조약 철회를 회담 전제조건으로 요구했다. 결국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전격 방중과 함께 발표한 ‘상하이 코뮈니케’에서 대만 주둔 미군시설과 무장역량의 단계적 철수를 명문화하면서 주대만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기정사실화했다. 이를 시작으로 점차 규모를 줄여가던 주대만미군은 1979년 미·중 수교와 함께 미국과 대만이 최종적으로 단교하면서 주대만 미군사령부를 완전 철수하기에 이른다. 1972년 ‘상하이 코뮈니케’ 체결부터 불과 7년 만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난 셈이다.
   
   이 지점에서 주목할 게 있다. 주대만미군이 대만에서 철수하는 시점이 중국의 핵과 대륙간탄도탄미사일(ICBM) 기술 확보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중국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 것은 1964년, 이어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한 것은 1967년이다. 중국이 첫 번째 대륙간탄도미사일인 ‘동풍(東風)-5’의 첫 번째 시험발사에 성공한 것은 1971년이고, 실사거리 실험에 성공한 것은 1980년이다. 1984년 베이징 천안문광장에서 국경절 35주년 열병식을 거행한 덩샤오핑(鄧小平)은 이를 최초 공개했다. 당시 9070㎞ 비행에 성공한 이 미사일은 현재 최대 사거리가 최대 1만5000㎞까지 늘어났다. 주대만미군이 중국의 핵과 미사일 위협 앞에서 돌연 철수한 일이 또다시 북한의 위협 앞에서 재현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미군이 대만을 떠난 후
   
   미국과 대만은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에 맞서 싸운 ‘혈맹(血盟)관계’였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 장제스 총통은 2차 대전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면서 일제로부터 한반도의 독립을 최초로 언급한 ‘카이로회담’(1943) 당사자이기도 했다. 1960년 6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대만을 방문했을 때, 장제스 총통은 2차 대전 당시 자신과 아이젠하워가 각각 연합군 중국전구(戰區)와 유럽전구 사령관이었던 점을 내세웠다. 타이베이 총통부 앞에는 50만 군중이 운집해 장제스와 함께 오픈카 퍼레이드를 벌이는 아이젠하워를 열렬히 환영했다.
   
   하지만 한때 ‘혈맹’이었던 미국과 대만이 체결한 ‘중·미 공동방어조약’은 1979년 단교 이듬해에 효력이 중지됐다. 지금 미국은 ‘대만관계법’ 하나만을 남겨두고 모두 떠나버린 상태다. 현재 대만은 “미국은 대만을 상대로 한 무기수출에 중국과 사전협상을 진행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대만관계법 하나에 매달려 국가의 운명을 위태롭게 지탱하고 있다. 냉엄한 국제정치 무대에서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상호방위조약’이 자국의 이익과 힘의 논리 앞에서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국과 중국은 1971년 ‘상하이 코뮈니케’에 이은 1979년 ‘미·중 수교’라는 평화협정 체결로 하루아침에 적(敵)에서 친구로 변신했다.
   
   중국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균형추 역할을 했던 미군이 대만을 떠난 결과는 참담하다. 1949년 장제스의 대만섬 패퇴 직후 “대륙 수복을 도와주겠다”며 비밀리에 군사고문단(백단)까지 대만으로 파견했던 일본은 미국이 대만과 단교할 낌새를 보이자 1972년 대만과 먼저 단교했다. 장제스 총통과 함께 ‘아시아반공(反共)연맹’ 창설을 주도했던 한국도 1992년 한·중 수교와 함께 대만과 단교했다. 현재 국제사회에서 대만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해주는 나라는 교황령 ‘바티칸’을 포함해 20개국에 불과하다. 지난 6월에는 대만의 오랜 우방이었던 파나마도 중국과 수교함과 동시에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청산했다.
   
   한번 떠난 미군이 대만으로 복귀하기도 쉽지 않다. 미 상원 군사위원회는 지난 6월 자국 군함의 대만 기항을 허용하는 ‘국방수권법 초안’을 통과시켰다. 중국은 1972년 ‘상하이 코뮈니케’에서 합의한 ‘무장역량 철수’ 원칙을 훼손한다면서 격렬히 항의했다. 지난 7월 30일에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인민해방군 건군 90주년을 맞아 중국 최대 군사훈련장인 네이멍구의 주르허(朱日和) 기지에서 군복을 입은 채 열병식을 거행하면서 훈련장에 표적으로 설치한 대만 총통부의 모형을 의도적으로 노출시켰다. 중국의 노골적 위협 앞에 대만의 운신 폭은 철저히 제한돼 있다.
   
   북한과 그 혈맹인 중국의 압도적 무력 앞에 한국은 과연 주한미군 없이 버틸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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