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사대부고 2학년생들이 1959년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 첨성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 끝이 이건희 학생이다. ⓒphoto 조태훈
서울사대부고 2학년생들이 1959년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 첨성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 끝이 이건희 학생이다. ⓒphoto 조태훈

나는 1955년 중학교에 입학해 지금은 70대 중반인 노인이다. 일제강점기 때인 1943년에 태어나 어릴 때 대한민국이 독립국가로 출범하였으나 그 역사적인 순간에 대한 기억은 없다.

초등학교 3학년이던 1950년 동족상잔의 6·25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36년이란 긴 세월 동안 군국주의 일본의 수탈적 식민지배로 인해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전근대적 농경국가가 UN군과 중공군의 치열한 전쟁터가 되었다.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밀고 당기는 과정에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된 상황에서 초등학교를 다녀야만 했다. 북한 인민군이나 중공군에 점령당하지 않았던 낙동강 이남, 즉 부산 인근의 한 줌의 땅에 살았던 나 같은 애들만이 초등학교를 중단하지 않고 다닐 수 있었다. 그나마 이 지방 애들도 학교를 군인부대에 내주고 산지사방에 흩어져 동사무소나 가건물에서 공부를 했다. 대부분의 내 또래 아이들은 피란길에 올라 목숨을 잃거나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하지 않았다면 천행(天幸)이요 축복으로 여겼던 때였다. 같은 학년에 나이가 5살이나 더 먹은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1961년 대학생이 되어서는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6·3항쟁을 주도했고 독재타파와 민주화를 견인한 주력이었다. 졸업 후에는 별 보고 출근해서 별 보고 퇴근하는 고된 직장생활을 하면서 우리나라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산업국가로 발전시키는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이제 우리 세대는 OECD 멤버국가로 최첨단 디지털 문화를 일상화된 삶의 일부분으로 향유하는 새로운 시대변화에 낙오하지 않기 위해 진땀을 흘리고 있다. 한평생에 이렇게 많은 패러다임 전환적 시대변화를 경험할 수 있었던 세대는 인류 역사상 거의 우리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공업지대로 개발되기 전의 울산 병영에서 태어난 촌놈이었으나 일찌감치 서울로 유학을 왔다. 나는 당시 특차 학교로 ‘천하 부중’이라고 명성이 높았던 서울사대부속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서울 장충동 집에서 반려견과 함께한 중학생 이건희. ⓒphoto 조선일보
서울 장충동 집에서 반려견과 함께한 중학생 이건희. ⓒphoto 조선일보

틈만 나면 일본 만화책 보던 소년

그러던 2학년 초 어느날 한 아이가 전학을 왔다.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를 다니다가 바다 건너 바로 왔다고 했다. 얼굴이 뽀얗고 유난히 눈이 크고 동그란 아이였다. 그 아이는 우리 반으로 와 바로 내 뒤에 앉았다.

그 아이는 나와 같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데, 쉬는 시간이나 틈만 나면 일본 만화책을 보는 점이 특이하였다. 삼성 이병철씨의 아들이라고 했다. 당시 우리는 삼성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모르던 시절이었다. 단지 ‘이병철’이란 이름은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로 들어본 적이 있는 정도였다. 당시 친구들 사이에서는 도시락 반찬이 좋으면 인기가 높았던 시절이었다. 도시락을 못 싸 가지고 오는 애들도 있는 시절이었다. 멸치조림, 계란말이, 소고기장조림 반찬은 귀했다. 전학 온 아이는 반찬이 좋았고, 우리와는 반찬을 매개로 쉽게 어울리게 되었다. 건희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중학교 2학년 아이들은 장난기를 주체할 수 없는 개구쟁이일 수밖에 없었다. 건희는 특히 둘이 서서 겨루다가 한 팔로 상대방 목을 졸라 누르면서 항복을 받아내는 놀이를 좋아했다. 나와는 호적수였다. 서울사대부중은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의 서울대 사범대학과 같은 울타리 안에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장충동 건희 집에 자주 놀러도 갔다. 처음 갔을 때 희한한 것을 보았다. 2층에 있는 건희 방으로 올라가기 위해 1층 복도를 지나가는데 거실 한가운데에 초록색 융단으로 윗부분 전체를 감싼 아주 큰 탁자 같은 게 놓여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도대체 저것이 무엇을 하는 책상이냐고 물었다. 아버님이 치시는 당구대라고 했다. 당구대로 무엇을 하는지는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건희 방에는 일제 장난감들이 많았다.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진기한 명품에 혼이 빠져 땅거미가 짙어져 와도 집에 갈 생각조차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럴 때면 건희는 “그거 집에 가지고 가서 놀다가 학교로 가지고 오면 된다”고 했다. 가끔 귀하디 귀한 일제 연필과 지우개를 주기도 했다.

서울사대부속고등학교 시절에는 난생처음 축음기를 듣게 해준 친구가 건희였다. 마할리아 잭슨(Mahalia Jackson)의 LP판을 틀어주면서 설명도 해줬다. 백인의 독무대였던 카네기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최초의 흑인 여가수였는데,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미국에서 노래로 차별의 벽을 뚫었을 뿐 아니라 전 세계 음악애호가들의 심금을 울려줬다고 했다. 인종, 신분, 국경을 초월하게 하는 대단한 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라고 했다.

그 당시 종로의 화신백화점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밀려드는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던 관광명소였다. 건희는 “백화점은 저래야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백화점은 단지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교류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때 벌써 우리 또래의 보통 아이들과는 다른 안목과 통찰력의 싹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건희가 일본 와세다대학으로 유학을 가면서 우리는 십수년간 연락이 두절된 채 완전히 다른 인생의 궤적을 살았다. 나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ROTC 3기로 임관되어, 1년은 최전방 백암산 포병 관측장교로, 1년은 맹호1진으로 베트남 전장에 투입되었다. 제대하자마자 유학길에 올라 10년 동안 벨기에에서 공부하였다. 나는 귀국 직후 중앙일보 이사로 있던 건희와 재회했다. 만나자마자 건희가 말했다. “니가 우리 동창 중에 제대로 공부한 박사 1호 아이가. 나 도와주지 다른 데 갈 생각 하지 말거래이.” 건희는 바로 부회장이 되었고 후계자가 되었다. 나는 귀국한 지 2주도 안 돼 삼성 비서실 팀장으로 출근하게 되었고, 7년 반을 삼성에 있었다.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누었다. 얘기는 주로 건희가 하였다. 느릿느릿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쉼 없이 얘기했다. 나는 특히 건희의 눈과 눈빛을 좋아했다. 맑고 형형한 광채를 빛내는 눈을 바라보며 잠깐잠깐 추임새만 넣어주면 거미줄이 풀려 나오듯 얘기가 술술 이어졌다.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 생활하고 귀국해 가장 힘들었던 것은 회장인 아버님 시간에 맞춰 아침 일찍 출근하는 일이었다고 했다. 체질화된 올빼미가 미칠 지경이었다고 했다.

1978년 피에르 가르뎅이 이병철 회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가운데 조태훈 실장이 통역을 하고 있다. 왼쪽 두 번째부터 가르뎅, 조태훈, 이병철, 한 사람 건너 이건희. ⓒphoto 조태훈
1978년 피에르 가르뎅이 이병철 회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가운데 조태훈 실장이 통역을 하고 있다. 왼쪽 두 번째부터 가르뎅, 조태훈, 이병철, 한 사람 건너 이건희. ⓒphoto 조태훈

“우리 민족은 전자업종이 제일 잘 맞아!”

미국 유학 중 ‘한비(韓肥·한국비료)’ 사건이 터져 빨리 귀국하라는 연락을 받아 한밤중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일본 하네다공항에 내렸는데, 트랩 아래에 미쓰이(三井)물산에서 차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고 했다. 도대체 어떻게 알고 나왔었는지 여전히 수수께끼라고 하면서 기업의 정보 수집력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했다. 경리나 판매는 가만히 놔둬도 잘 굴러가는 것이니까, 최고경영자는 법무·홍보·정보와 같은 기능에 각별한 신경을 써야 한다고 했다. 1977~1978년에 벌써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삼성전자는 콘세트 건물 3동에 불과하였다. 1위 전자업체는 선대 호암 이병철 회장의 사돈 기업인 금성사(Gold Star·LG전자 옛이름)였다. 국내시장에서 난공불락의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을 때였다.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삼성은 생산물량 100%를 수출하는 조건으로 전자업종에 틈새를 비집고 진출한 초창기였다. 그때 벌써 건희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의 민족성을 보면 뭐니 뭐니 해도 전자업종이 제일 잘 맞는 거야! 섬섬옥수의 손재주와 섬세성에 있어서 우리 국민을 따라올 나라는 없어.”

삼성전자에 올인해야 한다는 철학과 신념이 벌써 그때부터 다져지고 있었다. 비서실에 있을 때 나의 소속사를 삼성전자로 하라고 한 것도 건희였다. 비서실 팀장으로 있던 어느 날 오후 긴급 사장단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병철 회장께서 좌우에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과 이건희 부회장을 대동하고 회의를 주재하셨다. 우리 삼성이 반도체사업을 해야 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해야 하는데 천문학적인 큰돈을 투자해야 하고 리스크도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특별히 사장 여러분의 의견을 물어보기 위해 이 회의를 소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곧이어 사장을 앉은 순서대로 호명하시면서 반도체사업을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여부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밝히라고 했다. 회의 결과 3분의 2 정도의 사장들이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위험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에 잘못될 경우 삼성그룹의 존립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것이 핵심 이유였다. 삼성의 반도체사업은 대다수 사장들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하기로 결단이 내려졌다. 사활을 건 결단의 배후에는 당시 막 후계자로 결정되어 부회장직에 오른 건희의 역할이 컸다.

서울 용두동 시절의 서울사대부고 졸업앨범 속의 이건희. ⓒphoto 조태훈
서울 용두동 시절의 서울사대부고 졸업앨범 속의 이건희. ⓒphoto 조태훈

1980년대 초에 나는 제일모직 기획실장과 수출사업부장으로 1년에 6개월 이상을 해외 출장 다니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건희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프랑스권 인사가 내방할 경우 회장실 통역을 맡을 때만 잠깐씩 건희를 만났다. 1978년 디자이너 피에르 가르뎅(Pierre Cardin)이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이건희 부회장 부부가 용인자연농원(지금의 에버랜드) 한옥에서 베푼 환영만찬에 건희는 우리 부부를 함께 초청했다. 마침 디즈니랜드형 물놀이 기구들을 시운전하고 있을 때였다. 피에르 가르뎅 일행과 건희 부부, 그리고 우리 부부는 ‘후룸라이드’ 물놀이 열차를 탔다. 레일 깔린 물길에 열차를 언덕 꼭대기까지 끌어올려 물보라를 일으키며 밑으로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놀이기구를 천진난만하게 즐겼다. 내 아내는 만삭의 첫아이를 가진 배불뚝이였는데 애가 떨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만찬을 마친 후 신발을 신기 위해 한옥 복도 미닫이문을 열었다. 디딤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신발들을 보자마자 피에르 가르뎅이 신들린 사람처럼 맨발로 성큼 디딤돌 아래로 내려섰다. 곧장 코가 오뚝한 홍라희 여사의 흰 고무신을 집어 치켜들더니 이리저리 돌려 보며 “어쩌면 이렇게 예쁘냐? 꼭 베니스의 곤돌라를 닮았구나!”라고 하면서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홍 여사는 “고린내 난다”고 무안해 했고 우리 모두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 날 오후 느지막이 연락이 와서 부회장실에 올라갔다. 건희는 나를 보자마자 “내가 죽었었다”고 했다. 보슬비 내리는 일요일 아침 골프장으로 향하던 중 서초동 무지개아파트 인근 경부고속도로에서 차가 미끄러지면서 순식간에 중앙분리대를 넘어 반대편 차선으로 넘어갔다고 했다. 다행히 다른 차와 충돌하는 사고 없이 멈췄는데 순간적으로 기절을 했고 바로 순천향대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고 했다. 얼마 후 의식을 회복했는데 “15분 동안 죽었다가 깨어났다”고 했다. 외상은 전혀 없고 정신만 잃었을 뿐이었는데 그 후유증이 만만찮다고 했다. 시도 때도 없이 깜짝깜짝 놀라고, 갑자기 등에서 식은땀도 나고, 특히 밤에는 쉽게 잠이 들지 않을 때가 많다고 했다. 백약을 써도 낫지 않고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몸을 흔들어주는 운동이 특효라고 해서 승마를 시작했노라고 했다. 우리 몸에 60조개의 세포가 있다는 말을 나는 그때 처음 들었는데, 그 세포들이 몽땅 크게 놀란 것이 원인이며, 경기(驚氣)를 빼주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고라는 권유를 따르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건희에게 말 타는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한 사람은 중학교 때부터 승마를 해온 우리 동기생 친구 김일홍이었다. 삼성 승마단의 기원은 여기에 있다. 나는 한번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경험을 해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깨어날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란 지극히 상식적인 경험법칙의 희망을 굳게 믿고 있다.

언젠가 미국 뉴욕에 출장갔을 때 오래간만에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고등학교 친구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다. 누님이 암 수술을 위해 뉴욕의 전문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했다. 건희와도 친했던 친구였기에 한남동 건희 집으로 전화를 했다. 마침 그날은 장충동 본가 어머님 댁에 자러 갔다고 했다. 장충동에 전화하여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건희가 이렇게 말했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지. 내 말하고 미주본부장에게 얘기해서 니가 원하는 만큼 받아서 전해드려라.”

친구를 향한 변함없는 따뜻한 마음이 고마웠다. 그때 도와드린 친구의 누님은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살고 계신다. 건희는 다 큰 어른인 부회장이 되어서도 엄마의 품에 안기고 싶어하는 효심을 가지고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엄마를 떠나 혼자 도쿄에 있으면서 얼마나 엄마를 그리워했을까 하는 생각은 내게도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해일처럼 밀려오게 했다. 박두을( 朴杜乙) 어머님은 건희의 모든 친구들을 무한 사랑으로 보살펴주시던 후덕하고 자상한 ‘풍요의 여신(Alma Mater·Nourishing Mother)’이었다.

(좌) 서울사대부중 시절 이건희(오른쪽)가 수유리 화계사에 놀러 가서. (우) 서울사대부중 시절 급우들과 단체사진을 찍은 이건희(윗줄 왼쪽에서 두 번째).
(좌) 서울사대부중 시절 이건희(오른쪽)가 수유리 화계사에 놀러 가서. (우) 서울사대부중 시절 급우들과 단체사진을 찍은 이건희(윗줄 왼쪽에서 두 번째).

내 인연의 망에 있는 친구 건희

호암 이병철 선대 회장께서 돌아가셨을 때 중·고등학교 동기생 몇 명과 더불어 문상을 갔다. 조문을 하고 나오려는데, 건희가 ”너희들 바로 가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청했다. 건희가 별실로 와서는 “너희들을 보니 내 마음이 한결 풀린다”고 하면서 “앞으로는 자주 만나자”고 했다. 비록 현실의 벽이 우리를 갈라 놓을지라도 한결같은 우정을 간직하고 있는 건희의 속마음이 강한 진동으로 느껴져왔다. 건희는 언제나 소박하고 담백했다. 우쭐해 하거나, 뻐기거나, 잘난 체 하는 적이 없었다. 오래간만에 만나도 그냥 스스럼없이 흉금을 털어놓으며 다정다감하게 친구로 대해줬다. 둘이 있으면 금방 서로 마음의 문을 활짝 열리게 하는 마술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혹시 다음에 만날 기회가 없을지라도 내 이름 팔고 할 수 있는 일은 마음대로 하라”는 말을 해준 적도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건희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부자지 자기가 부자는 아니지 않은가’ 하는 기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목 조르기 놀이나 공부나 내가 건희에게 뒤지지도 않았다. 우선 내 자신이 건희 앞에서 아주 편안했다. ‘우리는 불알친구다’라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고, 한 번도 건희가 부럽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나도 저러면 좋겠다는 순간이 한 번 있었다. 부회장 방에서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첫아들 인호를 낳았고 산모도 순산했노라고 했다. 헤어지려고 일어서는데 잠깐만 하더니 소파 옆에 놓여 있던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수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보지도 않고 왼손으로 수표를 몇 장 집어 주면서 이걸로 아기에게 필요한 선물을 사주라고 했다. 한사코 사양했지만 찔러넣어 주었다. 사실 큰돈은 아니었지만 엄청난 마음의 가치가 담긴 출산 축하금 겸 격려금이었다. 큰 인물의 우정이 담긴 축하금의 위력은 대단한 듯하다. 그 아들 녀석이 생물 물리학 박사가 되어 순탄하게 성장을 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축하금의 복발(福發)과 운발(運發)이 아직까지도 작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때 나는 난생처음으로 사람이 태어나서 저 정도의 넉넉한 선심을 베풀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했다.

몇 년 전 햇빛이 눈부시게 빛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내가 사는 유명산 휴양림 동네 어비(魚飛)계곡의 산야를 보면서 아침을 먹고 있는데 불현듯 건희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삼성 미래전략실장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누구라고 하면서 점심 한번 얻어먹고 싶다는 말을 회장께 전해달라고 했다. 최지성 실장은 이 회장께서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시면 전해드리겠다고 했다. 건희가 쓰러졌다는 비보(悲報)를 들은 것은 바로 그 몇 주일 후였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회장 취임 30주년 기념일도 지났다.

1959년 서울사대부고 2학년 때 친구들과 소풍을 간 이건희(오른쪽). ⓒphoto 조태훈
1959년 서울사대부고 2학년 때 친구들과 소풍을 간 이건희(오른쪽). ⓒphoto 조태훈

건희는 어렸을 때부터 떡잎이 다르긴 했다. 그러나 이렇게 큰 인물이 될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일본을 앎으로써 일본을 극복하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소니(SONY), 도시바(Toshiba), 마쓰시타(Matsushita) 등 ‘경영의 신’이 세운 회사들을 뛰어넘었다. 아버지가 세운 삼성을 누나(전주제지-한솔), 큰형님(제일제당-CJ), 작은형님(제일합섬-새한미디어), 여동생(신세계·조선호텔)에게 떼어주고도 삼성을 재계 서열 1위 기업으로 키워내었다. 스티브 잡스의 애플(Apple)과 대적하면서 삼성을 세계 초일류 기업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을 최첨단 디지털 선진국가로 견인하였다.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목표를 초인적인 집념과 집중력으로 추구하면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불세출의 영웅이다. 경영의 신이란 칭호를 부여해도 부족함이 없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업가라고 할 만하다.

사람은 사람 때문에 산다. 인생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인연의 연속적인 과정이다. 씨줄과 날줄로 부단히 엮어지는 인연의 망이 어떻게 형성되느냐에 따라 우리 모두의 삶과 운명이 좌우된다. 나는 내 인연의 망에 건희를 친구로 가지는 천복과 행운을 누렸다. 나는 평생 뒤가 든든했다. 이런 친구가 있어 뿌듯했고, 행복했고, 고마웠다. 그러나 나는 지난 3년간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보름달이 휘영청 밝을 때면 더 더욱 그랬다. 보름달을 닮은 건희의 눈망울이 중첩돼 보여서다. 나는 얼른 달려가 이렇게 말하면서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많다.

“건희야, 그동안 너무 힘들게 죽을 힘을 다 써서 3년이나 숨 고르기를 하고 쉬어야 했냐? 나에게 점심 사주기 전에는 절대 갈 생각 말거래이! 고등학교 레슬링 선수였을 때의 뒷심을 발휘해서 벌떡 일어나봐라!”

나는 누가 뭐래도 건희가 번쩍 깨어나 병상을 툭툭 털고 일어나리라 믿는다. 재회의 기쁨을 위하여! 그리고 맛있는 공짜 점심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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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훈 건국대 경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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