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성북구에 사는 40대 남성 신모씨는 평소 자신의 정치성향이 보수도 진보도 아니라고 말한다. 대기업에서 20년 가까이 일한 그는 경험적으로 경제 문제는 결국 시장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는 보수성향의 교회에도 출석한다. 몇 년 전부터 동성애 이슈가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보면서 이런 이슈에 대해선 국가가 보다 적극적으로 간섭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관련된 문제를 지나치게 방임하면 언젠가는 가족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도 무너질 것이란 위기감 때문이었다. 그는 지난 대선에서 자기의 이런 관점에 그나마 가까운 후보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라고 판단했다.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전통적 개념이 무너져가고 있다. 교과서적으로 둘은 국가와 시장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이냐로 구분한다. 하지만 여기에 국가가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 어디까지 간섭할 것이냐의 문제가 더해지면 보수와 진보의 구분이 과거보다 훨씬 복잡해진다. 일직선을 그려놓고 오른쪽이면 보수, 왼쪽이면 진보로 나누는 식의 평면적 구분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얘기다.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를 비판하는 정치세력은 그가 보수도 진보도 아닌 ‘비겁한 중도’ ‘삐딱한 회색분자’라고 표현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전통적 구분 방식으로 봤을 때에만 해당하는 얘기일 수 있다. 이런 평면적 구분 방식에서 벗어나 조금 더 세밀한 기준으로 정치성향을 구분한다면 과연 우리 국민과 정치인들은 어떤 성향을 보이고 있을까.

주간조선이 창간 50주년을 맞아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시장 자유에 대해서는 국가의 간섭이 필요하지만, 개인 자유와 관련해서는 정부가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전통적 가치가 혼재된 성향을 추구하는 국민이 늘었다는 의미다.

주간조선이 여론조사 전문기관 입소스코리아와 함께 지난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전국 19세 이상 국민 12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여론조사에 따르면(95% 신뢰수준에 오차범위 ±2.8%포인트 이내) 조사 대상 중 34.6%가 자신의 정치성향에 대해 시장을 불신하면서 국가 관여를 원하며, 높은 수준의 개인 자유를 원하는 ‘진보주의’ 성향이라고 응답했다. 두 번째로 많은 비율을 차지한 것은 개인과 시장의 자유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정부가 강력한 통제를 유지하기 원하는 ‘권위주의’(25.5%)였다. 모든 방면에서 낮은 수준의 국가 관여를 원하는 ‘자유주의’는 13.2%, 시장 자유에는 찬성하지만 개인 자유에 대해서는 공동체의 규율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보수주의’는 7.2%에 불과했다. 모든 방면에서 중간적 태도를 지향하는 중도주의 성향의 응답자는 19.5%였다.

한국 사회는 진보주의와 권위주의의 대립

이 같은 결과는 영국의 블런델-고스초크 모델<상자기사 참조>에 따른 조사 결과를 분석한 것으로 10년 전 같은 모델로 한 여론조사와 비교해보면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가 2배 이상 증가하고, 진보주의와 권위주의, 보수주의 정치성향은 모두 감소했다. 특히 권위주의의 감소폭이 상대적으로 컸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조사가 기존 조사와 보이는 가장 큰 차이는 한국 사회가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아닌 진보주의(34.6%)와 권위주의(25.5%) 간 대립 양상을 보인다는 점이다.(41쪽 그래프 ‘한국인의 정치지형’ 참조> 두 정치성향 모두 경제 문제를 시장에 완전히 맡기는 것보다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다만 개인 자유에 대한 국가의 간섭 여부에 따라 진보주의(간섭 불필요)와 권위주의(간섭 필요)로 나뉜다. 개인 자유라는 변수를 제외한 채 국가와 시장의 관계만을 놓고 좌우를 나누는 전통적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 국민의 60% 이상이 좌파로 분류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미국이나 유럽과 같은 서구사회의 정치성향과는 확연히 다르다. 미국의 경우는 시장 자유에 대해서도 52%가 정부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고, 48%는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보수주의와 진보주의가 거의 비슷한 비율로 대립하고 있다. 즉 개인과 시장, 두 영역 모두에서 정부 개입을 원하거나, 아예 개입하지 말기를 원하는 ‘양자택일’의 양상을 보인다. 우리처럼 시장 개입을 원하면서 개인의 자유에도 개입해야 한다는 쪽과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쪽이 갈리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적다. 우리나라와 서구사회에서 말하는 좌파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처럼 시장 개입을 원하면서 개인의 자유에도 국가의 개입을 원하는 ‘권위주의적 진보’가 서구에는 상대적으로 적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보수” 중에서 22%는 진보적 성향

이런 조사 결과는 전통적 기준으로 보수와 진보를 구분한 여론조사를 토대로 한국 사회의 갈등을 풀고자 하면 그 해법도 전혀 엉뚱한 방향이 나올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선거에 임하는 정당이나 후보자의 전략도 실제 유권자들의 성향에 맞지 않게 만들어질 수 있다. 주간조선과 입소스는 이번 설문조사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성향을 뭐라고 생각하는지’ 주관적 이념성향도 물었다. 그 결과 자신이 진보라고 생각하는 비율은 34.7%, 중도가 40.3%, 보수가 25%로 나타났다.

같은 조사 대상에게 더욱 질문을 구체화해 정치성향을 묻고, 이를 4개 영역으로 구분하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예를 들어 자신의 정치성향이 진보라고 응답한 사람 중 개인과 시장 자유와 관련한 구체적 사안을 묻는 질문에서도 진보적 답변을 한 사람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43.4%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진보주의자보다는 권위주의(30.9%)에 가까웠고, 보수주의자도 3.8%에 달했다. 반대로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 보수라고 생각한 응답자 중 22.3%는 진보주의에 해당하는 답변을 했다. 이제는 한국 사회의 이념적 갈등의 원인을 단순히 보수와 진보로 나눠서 보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

주간조선의 조사 결과는 지지율 답보상태를 보이고 있는 보수정당들에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제1보수정당이라 할 수 있는 자유한국당의 경우 국가가 시장질서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것은 바른미래당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주간조선 조사 결과에서 국가가 시장질서에 개입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응답자가 20%를 간신히 넘는다. 보수정당이 국민 정치성향과는 동떨어진 정책지향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볼 대목이다.

반대로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전통적 개념의 진보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정의당 역시 그 확장성에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입소스 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자본주의 체제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경제에 대한 국가 관여는 당연시되었으며, 지금도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적다”고 분석했다.

다만 10년 전 같은 모델로 조사했을 때의 결과와 비교해보면 시장 자유에 대한 국가의 관여를 지지하는 진보주의와 권위주의가 소폭이나마 감소하고, 자유주의의 증가폭이 컸다는 점이 보수정당에는 희망 요소로 꼽을 수 있다. 블런델-고스초크 모델의 여론조사는 2008년 P&C정책개발원이 한 차례 실시한 바 있다.

경제 중심 이념적 토양 성숙

지난 10년은 한국 정치사의 격변기였다. 진보 정권의 실패에 따라 보수 정부가 9년간 집권했으나, 헌정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현직 대통령이 탄핵됐다. 이로 인해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됐고, 보수 정당은 다 합쳐서 30%도 되지 않는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이런 현실정치의 변화는 국민의 정치지형에도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다.

10년 전 조사 결과와 이번 주간조선의 조사 결과를 비교해보면 시장 자유를 중시하면서 개인의 자유도 원하는 자유주의의 증가가 가장 눈에 띈다. 보수 정부가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 가운데서도 시장 자유와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자유주의적 보수층이 늘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구체적 수치를 보면 진보주의의 경우 37.3%에서 34.6%로 줄었고, 권위주의는 7.7%포인트, 보수주의는 1.6%포인트 감소했다. 반면 자유주의는 5.9%에서 13.2%로 7.3%포인트 늘어났고, 중도주의는 4.6%포인트 증가했다. 즉 개인 자유에 대해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국민들이 늘어났다고 볼 수 있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전통적 개념의 보수에 가깝다고 본다면 전반적인 보수층은 늘었지만, 이것이 보수 정당 지지율에는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입소스 측은 “진보주의와 권위주의가 감소한 대신 중도주의와 자유주의가 늘었다는 것은 시장 자유에 대한 국가 관여 배제에 찬성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국민이 늘었다는 것”이라며 “경제적 태도를 중심으로 한 이념적 토양이 한층 성숙한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시장을 중시하는 발언을 잇달아 하면서 문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이라고 할 수 있는 진보세력들이 일부 시장 친화적 응답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국가와 시장의 관계에 있어서 여전히 60%가 넘는 응답자가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성향 분포를 지역별로 살펴보면 전통적 진보로 분류할 수 있는 진보주의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은 호남과 인천·경기로 모두 37.1%였다. 다음으로 높은 지역은 PK로 35.2%에 달했다. 서울은 31.3%로 TK(27.7%) 다음으로 낮았다. 이러한 지역적 분포를 보면 지난 선거에서 PK 지역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직업별 정치성향 분포에서는 자영업·주부 직군에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합친 비율이 각각 25.2%, 24.4%로 높았다. 진보주의와 권위주의를 합한 비율이 높게 나타나는 직군은 블루칼라(66.1%)와 무직(64.9%) 등 순이었다.

입소스 측은 이번 여론조사에 대해 “한국 사회의 이념적 토대는 완성태가 아니라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이라며 “보수의 진짜 가치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상황에서 가치 논쟁이 건강하게 이뤄질 때 한국 사회의 이념적 토대가 완성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블런델-고스초크 모델이란

지금까지의 정치성향 관련 여론조사는 대부분 응답자의 주관적 판단에 기초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보수, 진보, 중도 등으로 구분해서 답하는 방식이다. 혹은 가로의 일직선 위에 0을 중도로 놓고 오른쪽은 보수, 왼쪽을 진보로 구분하고, 이를 조금 더 세분화해서 보수 안에서도 1부터 5로 점수를 매겨왔다. 지금까지는 어떤 정치·사회적 사안에 대해 전향적 태도를 가지면 진보, 전통적 태도를 유지하면 보수란 식의 구분을 해왔다.

하지만 다양한 정치·경제·사회 현안이 온라인 공간을 통해 확산되면서, 현안에 대한 국민의 반응도 다양해졌다. 예를 들어 대북 문제에 대해서 보수적 답변을 했던 응답자가 대기업 지배구조 문제에 있어서는 진보적 답변을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낙태, 난민, 사형제, 성적정체성, 개인정보보호 등 최근에서 불거진 이슈들에 대해 한 개인이 때로는 보수적, 때로는 진보적 답변을 할 수 있다. 이런 다양한 반응들은 단순히 진보냐 보수냐를 묻는 평면적 질문으로는 담아낼 수 없다. 시장 자유에 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동성애나 북한 문제 등의 개념이 끼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여론조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응답자들의 보다 정확한 정치성향을 4분위로 나눈 것이 바로 블런델-고스초크 모델이다. 이 모델은 국가와 시장의 관계를 통해 전통적으로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직선을 X축으로 삼고, 개인의 자유에 대한 국가의 개입 정도를 Y축으로 삼아 총 정치지형을 다음과 같은 네 개로 구분했다. <위에 표 참조>

자유주의 : 개인의 자유와 시장의 자유 두 영역에서 모두 낮은 수준의 국가 관여를 원함.

보수주의 : 시장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에 반대하지만,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 국가의 통제가 어느 정도 필요함. 이것이 양극단으로 수렴하면 극우주의로 빠질 수 있다.

권위주의 : 개인과 시장 양쪽 모두에서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입장. 이것이 극단으로 빠지면 공산주의에 가깝게 된다. 자신이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다수가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진보주의 : 보수주의자와 반대로 시장을 불신해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보면서 개인의 자유도 매우 중시함.

이처럼 x축 안에서의 입장만 강조하던 기존 조사에 개인의 자유란 y축을 추가해 보다 구체적인 정치성향이 드러난 것이 이번 주간조선의 설문조사 결과다. 주간조선과 입소스는 주관적 정치성향을 보다 객관화시키기 위해 다양한 측면에서의 반복적 질문을 통해 응답자의 통일된 정치성향을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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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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