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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0호] 2018.10.29

잠비아로 간 신부

여의도 10배 땅에 기적의 도시 건설 중

황은순  기자 

▲ 강원도 평창 성 필립보 생태마을에서 만난 황창연 신부.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7월 중순, 아프리카 남부 잠비아의 오지 무풀리라(Mufulira)에서 가까운 숲에 드론이 떴다. 아이들이 나무와 풀을 헤치고 드론을 쫓아갔다. 발에 안 맞는 슬리퍼라도 신고 있는 아이들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부분은 맨발이었다. 아침에 집을 나서 2~3시간씩 달려온 아이들은 생전 처음 보는 드론이 마냥 신기한 모양이었다. 길도 없는 숲에서 드론 착륙 지점을 귀신처럼 찾아냈다. 드론이 다음 좌표로 이동할 때마다 아이들은 신나게 뒤쫓아가며 숲에 길을 만들었다.
   
   잠비아의 수도 루사카까지 우리나라에서 비행기로 최소 22시간, 루사카에서 다시 차를 타고 5시간. 무풀리라 근처에 있는 카사리아 숲에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숲은 3000㏊에 걸쳐 이어져 있다. 여의도 10배에 달하는 규모이다. 그 숲에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도시가 건설되고 있다. 도시의 이름은 ‘카사리아 에코시티(Kasaria Eco City)’. 이 도시 건설은 잠비아 정부나 큰 기업이 나선 것이 아니다. 한 명의 한국인에 의해 시작됐다. 천주교 수원대교구청의 황창연(53·베네딕도) 신부이다. 황 신부는 이 땅을 공짜로 얻었다. 2016년 6월이었다. 잠비아의 에드가 룽구(Edgar Lungu) 대통령은 내각의 승인을 거쳐 정확하게 3273㏊의 땅을 황 신부에게 조건 없이 무상으로 증여했다. 현재 이곳은 도시 설계를 끝내고 공사가 시작됐다. 무풀리라 숲에 등장한 드론은 땅을 측량하기 위해 한국에서 동원된 것이다.
   
   황 신부는 단지 숲을 개발해 도시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잠비아의 미래’를 건설하려고 한다. 잠비아의 인재들을 키워내고 잠비아인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 첫 번째 목표이다. 그러기 위해 초·중·고등학교부터 농업대학, 신학대학, 의과대학, 간호대학 등 교육시설이 들어선다. 병원, 성당도 짓는다. 순례자들의 쉼터가 될 수 있는 ‘피정의 집(천주교 신자들의 수련시설)’도 계획돼 있다. 주민들이 먹고살 수 있게 농지도 조성한다. 숲은 아름드리 유칼립투스 나무들이 죽죽 뻗어 있고 온갖 수종들이 자생하는 거대한 수목원이다. 엄청난 자산인 숲을 살리면서 숲과 어우러진 생태도시로 만들 생각이다.
   
   숲에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다. 30~ 40가구가 부락을 이루고 있는가 하면 2~3가구씩 흩어져 살기도 한다. 이들의 삶은 열악하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움막에서 생활한다. 생계수단은 나무를 베어 숯을 만들어서 파는 것이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없다. 가장 가까운 학교도 몇 시간씩 걸어가야 한다. 거리도 문제지만 학교에 보낼 돈도 없다. 이곳뿐만이 아니다. 전체 잠비아인들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 숲이 바뀌면 이들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황 신부의 꿈은 이 숲에 심은 희망이 아프리카 전역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잠비아 전역에서 똑똑한 아이들을 불러모아 키우면 잠비아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의 리더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황 신부는 어쩌다 잠비아에서 큰일을 벌인 것일까. 또 잠비아 정부는 뭘 믿고 황 신부에게 큰 땅을 내줬을까.
   
   
photo 어반트랜스포머

   평창 생태마을에서 잠비아 에코시티로
   
   황창연 신부는 가톨릭계의 아이돌로 통한다. BTS(방탄소년단)가 “러브 유어 셀프”로 세계를 사로잡기 훨씬 전부터 “너 자신을 먼저 사랑하라”고 강연하면서 ‘스타 신부’가 됐다. 황 신부가 떴다 하면 열 일 제쳐두고 달려오는 열성팬들이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 걸쳐 있다. 아프리카서 남미까지 매년 해외투어를 다니고 유튜브 강연 영상을 올렸다 하면 몇십만 뷰가 기본이다. 강연을 한창 다닐 때는 자동차 이동거리만 10만㎞가 넘었다. 하루에 10시간씩 차로 이동하며 스케줄을 소화했다. 일정만 보면 글로벌 한류스타가 따로 없다. 그의 팬은 천주교 신자는 물론이고 불자, 일반인 등 종교를 초월한다. 강의 주제는 행복, 소통, 화 등 다양하지만 결론은 같다. “미래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지 말아라!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놀자! 내가 행복해야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그의 강의는 유쾌하다. 5분마다 ‘빵빵’ 터진다. 배꼽 잡고 웃는 와중에 깨달음을 얻고 에너지를 얻는다. 복잡하고 꼬인 삶도 쉽고 명쾌해진다.
   
   강의 다니느라 바쁘지만 황 신부의 본업은 따로 있다. 청국장, 된장, 고추장 만들어 파는 일이다. 그의 공식 직함은 강원도 평창에 있는 ‘성 필립보 생태마을’ 대표이다. 영혼의 휴식과 환경을 생각하는 생태농원을 내걸고 2000년 문을 열었다. 생태마을은 기대 이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황 신부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피정 예약은 늘 꽉 찬다. 주변 콩 농가 돕겠다고 시작한 된장 사업은 급성장했다. 참나무 장작불로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들고, 황토방에서 발효시켜 만든 된장, 고추장은 입소문이 났다. 특히 효자 상품은 청국장 가루이다. 첫 해 500만원어치 팔린 청국장 가루가 지난해에는 30억원어치가 팔렸다. 전체 생태마을 매출의 절반을 차지한다. 2년 전부터는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고 미국에도 수출하고 있다. 첫해 콩 100가마를 수매했는데 지난해엔 2000가마(200t 분량)를 샀다. 1개 군에서 나는 양이 100t이니 2개 군에서 나는 콩을 전부 이곳에서 소비하는 셈이다.
   
   ‘카사리아 에코시티’는 이곳에서 싹이 텄다. 황 신부는 이런 생태마을을 국내외에 계속해서 만들고 싶다는 꿈을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했다. 그 꿈이 ‘잠비아의 땅’으로 돌아온 것이다.
   
   지난 10월 5일 강원도 평창 성 필립보 생태마을을 찾아 황 신부를 만났다. 생태마을 앞으로 굽이굽이 평창강이 흐르고 있었다. 입구 가까운 곳에 위치한 황토방에서 불을 때는지 연기가 피어올랐다. 건물 뒤편에 수백 개의 장독대가 늘어서 있었다. 황 신부는 올해 초 “일체의 외부 강연을 중단하겠다”는 폭탄 선언을 했다. 20년 숨차게 달려온 탓에 몸도 마음도 소진됐다.
   
   “계속 퍼내기만 했더니 바닥이 났어요. 요즘 책도 읽고 새 책도 쓰면서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황 신부의 건강은 많이 회복된 듯했다. 강연 때처럼 목소리도 힘이 있었다.
   
   “12년 전쯤 아프리카를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고통의 땅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제가 본 아프리카는 풍요로운 자연이 있는 행복의 땅이었습니다. 국제구호단체 등을 통해 굶주린 아이들만 접한 탓에 아프리카를 오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관개시설만 잘해주고 농업기술을 전수해주면 몇억 명이 굶주림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꿈을 꿨습니다. 언젠가 아프리카로 가자.”
   
   황 신부는 신학과 별도로 환경공학을 공부했다. 10년 넘게 환경부 대기오염 강사로 활동하고 있고 새만금 반대, 대만핵 반대 등 환경운동에도 앞장섰다.
   
   “한때 투사였습니다. 10여년 투쟁만 외치다 보니 내 안에 평화가 없었습니다. 자연을 살리려다 내 영혼이 파괴되겠다 싶었지요. 막고 반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살리는 것도 중요하다. 나는 살리는 일을 하자 생각했어요.”
   
   
▲ 잠비아 3273㏊ 땅에 들어설 ‘카사리아 에코시티’ 첫 마을 ‘축복길’ 조감도. photo 어반트랜스포머

   100억의 선물
   
   황 신부가 생태마을을 시작한 이유였다. 생태마을은 결국 잠비아로 이어졌다. 황 신부가 전해준 이야기는 한 편의 소설이었다. 씨줄 날줄로 엮어진 운명들이 마치 계획된 것처럼 황 신부에게 닿아 기적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생태마을 운영에 자신감이 붙은 2012년 프란치스코 전교봉사수녀회 소속의 수녀 16명이 생태마을을 찾았다. 그중 얼굴이 햇빛에 그을려 유난히 새카만 수녀가 눈에 띄었다. 얼굴이 그을린 이유를 물으니 아프리카에서 농장을 운영한다고 했다. 김무열(임마누엘라) 수녀였다. 프란치스코 전교봉사수녀회는 1996년부터 잠비아에서 의료·교육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김무열 수녀도 17년째 잠비아에서 일을 하다 병 치료차 귀국한 참이었다.
   
   “아픈 와중에도 수녀님이 잠비아 걱정만 하는 거예요. 학교 기숙사를 빨리 지어야 한다면서. 여학생들이 자꾸 임신을 하는데, 집이 멀어 친척집에 얹혀살다 성폭행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마침 통장에 책 인세로 들어온 돈 2000만원을 드렸죠.”
   
   그리고 이듬해인 2013년, 의료봉사단을 꾸려 처음 잠비아를 찾았다. 잠비아에 다녀온 후 강연 때마다 잠비아 이야기를 했다. ‘울창한 숲에 물도 많고 토지도 비옥해 옥수수를 심으면 쑥쑥 자란다. 조금만 도와주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다’면서 농업대학을 세우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2015년 어느 날, 80대 김모씨가 황 신부를 찾아왔다. “잠비아에 농업대학을 세우는 데 썼으면 좋겠다”면서 100억원을 내놓는 것이 아닌가. 김씨의 기부에 얽힌 사연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 ‘카사리아 에코시티’의 첫 마을에 들어설 수녀원 공사가 한창이다.

   김씨는 자산가였지만 평생 남을 위해 돈을 써본 적은 없었다. 황 신부를 찾아오기 1년여 전쯤, 김씨는 4명의 강도에게 납치를 당했다. 주차를 하는 순간 강도들이 달려들어 김씨를 차 트렁크에 가두고, 김씨 카드를 뺏었다. 강도들은 이틀 동안 은행을 돌며 돈을 빼고 다녔다. 강도들은 납치 사건이 뉴스에 나오나 싶어 라디오를 틀었다. 그런데 김씨 차가 오래된 탓에 라디오가 고장이었다. 유일하게 되는 것은 CD 플레이어였고, 황 신부의 강연 CD인 ‘화가 나십니까’가 꽂혀 있었다. 황 신부의 팬이었던 김씨는 늘 황 신부의 CD를 듣고 다녔다. CD에서 흘러나오는 강연 내용이 재미있었던지 강도들은 CD를 계속 들으며 돌아다녔다. 강도들끼리 “죽이자” “죽이지 말자” 한동안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결국 김씨를 풀어주면서 한 명이 이렇게 말하더란다. “CD를 듣다 보니 어릴 적 할머니 손잡고 성당에 다니던 생각이 나서 죽일 마음이 없어졌다. 신고만 하지 마라.”
   
   집에 돌아온 김씨는 무서워서 1년 동안 집 밖 출입을 못 했다. 김씨의 남편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당신은 그 신부 덕분에 살았어!” 서울의 한 성당에서 황 신부의 강연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김씨가 힘든 걸음을 했다. 그날따라 황 신부가 잠비아 이야기를 많이 했던 모양이다. 강의를 들으면서 김씨는 황 신부의 뜻에 돈을 보태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막연한 꿈이었는데 김씨가 돈을 턱 내놓으니 갑자기 숙제가 생긴 겁니다. 학교를 어디에 세울지 직접 보셔야 한다면서 80대 노인을 모시고 26시간 걸려 잠비아 무풀리라로 날아갔습니다.”
   
   
▲ 2016년 에드가 룽구 잠비아 대통령을 만난 황창연 신부. 이때 잠비아 대통령으로부터 3000㏊ 땅 약속을 받았다.

   3000㏊의 기적
   
   무풀리라는 전교봉사수녀회의 활동거점 중 한 곳이다. 황 신부는 김씨와 함께 무풀리라 시장을 만나 “농업대학을 세울 땅을 달라”고 말했다.
   
   “시장이 얼마나 필요하느냐 묻기에 대뜸 ‘3000㏊’를 달라고 했어요. 사실 얼마나 큰 땅인지 저도 감이 없었어요. 시장이 깜짝 놀라더니 안 된다고 해요. 무풀리라시가 겨우 1000㏊라면서. 그 정도 땅이면 대통령을 만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 후 6개월, 황 신부는 인맥을 동원해 잠비아의 에드가 룽구 대통령과 약속을 잡아놓고 다시 잠비아를 찾았다. 대통령을 만난 황 신부는 자신의 계획을 전하고 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룽구 대통령은 한국 수녀들이 그동안 잠비아를 위해 헌신해온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잠비아의 주 수입원인 구리광산을 장악한 중국 자본에 대한 반중 감정도 한몫했다. 덕분에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았다. 룽구 대통령은 “각료들의 승인도 받아야 하고 행정절차를 밟아야 하니 최소 2년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황 신부는 대통령을 만나고 바로 다음 일정 때문에 잠비아를 떠났다.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암스테르담 공항에 도착해 보니 잠비아에서 보낸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국토부 장관에게 당장 3000㏊를 책임지고 만들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졌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대통령을 만나고 40일 만에 측량까지 끝낸 땅의 지적도가 한국에 도착했다. 무풀리라와 잠비아 제2의 도시 은돌라(Ndola), 키트웨(Kitwe) 사이에 있는 긴 삼각형 모양의 땅이었다. 잠비아 산림청이 조성한 숲으로 주변에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강이 2개나 흐르고 있다. 땅의 소유권은 잠비아 프란치스코 전교봉사수녀회 명의로 했다.
   
   황 신부가 계획하는 ‘카사리아 에코시티’는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이는 도시 개발이 아니다. 단계적으로 하나씩 진행된다. 1단계로 첫 번째 마을 조성에 나선다. 종교시설과 학교가 중심인 첫 마을은 도시의 거점 역할을 할 것이다. 2단계는 기술대학, 의료시설 등이 들어설 두 번째 마을 조성이다. 3단계는 추가 마을 조성과 농지 조성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현재 1단계로 첫 마을 개발이 시작됐다. 삼각형의 꼭짓점 부분이다. 전체 땅의 10분의 1 규모로 여의도 면적만 하다. 이곳에 들어갈 것은 삶에 최소한으로 필요한 교육, 종교, 집, 농장 등이다. 현재 수녀원, 신학교가 지어지고 있다. 농업대학은 내년 착공 예정이다. 잠비아인을 위한 공공주택과 종돈장도 계획돼 있다. 종교를 초월해 누구나 와서 쉴 수 있고 머무르면서 봉사할 수 있는 피정의 집은 내년 착공한다.
   
   황 신부가 공을 들이는 곳 중 하나는 ‘축복길’이다. 마을 한가운데를 관통해 1.5㎞ 길이로 죽 뻗어나갈 것이다. 길 양쪽으로는 잠비아에서 자라는 모든 나무들을 심을 계획이다. 길을 중심으로 공원, 운동장, 문화시설, 상업시설 등이 자리를 잡게 된다. 마을의 척추에 해당한다. 수십㎞ 이어지는 지평선 너머 붉은 노을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이다.
   
   황 신부는 “매년 전 세계에서 수만 명이 찾는 프랑스의 테제 공동체나 영국의 핀드혼 공동체를 모델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황 신부의 계획대로 전 세계 사람들이 몰려든다면, 그 수익금이 다음 단계 개발의 시드머니가 될 것이다. 사람을 키우고 수익구조를 만들어 다음 단계 개발로 이어지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 공사현장에 아침부터 몇 시간씩 걸어서 아이들이 몰려든다.

   기적을 만드는 사람들
   
   황 신부는 “1단계는 2020년, 3단계는 2035년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서 70살까지 건강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황 신부 혼자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를 돕는 정예부대가 있다. 도시 설계를 맡은 ‘어반트랜스포머’ 팀이 그중 하나다. 도시건축 스타트업인 ‘어반트랜스포머’는 한강 노들섬의 위탁운영을 맡고 있기도 하다. 어반트랜스포머 대표인 김정빈 교수(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와 황 신부의 인연이 잠비아로 이어졌다.
   
   3~4년 전 김 교수는 진행하던 일이 문제가 생기면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잠들기 전 황 신부의 강연 CD를 듣는 것이 유일한 위로였다. 황 신부를 만나면 큰 힘이 될 것 같았다. 신부인 친척의 도움으로 황 신부를 만났다. 황 신부는 김 교수의 고민에 대해서는 “걱정도 말라”고 하더니 느닷없이 잠비아에 봉사를 가자고 했다. 잠비아에 간 김 교수에게 황 신부는 끝도 보이지 않는 숲을 보여주더니 “우리 땅이다. 설계를 해달라”고 말했다.
   
   어반트랜스포머 팀은 지난해 잠비아를 다녀와 단계별 도시 설계안을 만들었다. 올해도 잠비아로 날아가 설계에 따라 측량을 하고 터 닦기를 위한 준비를 했다. 현지에 알아보니 측량 기구라고는 2m 줄자가 전부라고 했다. 연구 끝에 생각해낸 것이 드론이었다. 워낙 넓고 숲이 우거져 있다 보니 위치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GPS 좌표를 입력한 드론을 띄워 목표 지점에 말뚝을 박아 위치를 잡았다. 그 과정에서 현지 아이들이 큰 도움이 됐다. 김 교수의 말이다.
   
   “말도 안 통하는데 아이들은 우리가 하려는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어요. 드론을 띄우고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는데 아이들이 달려가면서 길을 잡아주고 돌아올 때도 길잡이 역할을 해줬습니다.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드론이 있었어도 소용이 없었을 겁니다. 아이들이 오후가 됐는데도 집에 안 가고 앉아 있는 거예요. 왜 그런가 봤더니 맨발로 숲을 뛰어다니느라 발이 다 까져 있었어요. 작년에 그 아이들에게 제 이름을 말해줬는데 올해 갔더니 제 이름을 기억하는 겁니다. 저는 누군지도 모르겠던데. 그 아이들을 보면서 이 프로젝트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 의료봉사팀이 진료하는 무풀리라 진료소 앞에 새벽부터 환자들이 줄을 선다.

   황 신부와 의료봉사팀은 매년 7월 꼬박꼬박 잠비아를 찾는다. 2013년 첫 방문 이후 올해로 6년째다. 그곳의 아이들은 매년 7월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한다. 봉사팀이 오는 7월이 그들에겐 축제와 같다. 어반트랜스포머 이소애씨도 3년째 잠비아를 다녀왔다. 매번 아이들과 작별 인사도 못 나누고 돌아올 때 항상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와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질 때 하루 종일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들이 생각나요. 우리가 당연히 누리고 있는 것들이 그곳 아이들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들의 맨발이 마음이 아파 한 번은 신발을 잔뜩 준비해 가지고 갔다. 그런데 신발 쟁탈전이 벌어지면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물건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들이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죠. 카사리아 에코시티 설계에 그런 생각을 녹였습니다.” 김 교수의 말이다.
   
   잠비아 현장에서 고군분투 중인 사람들도 있다. 오태호 본부장과 류재열 소장이다. 전역한 해군대령인 오 본부장은 ‘오 대령’으로 통한다. 현역 시절 해병대에 강연 온 황 신부의 팬이 돼 충성을 맹세했다. 전역한 후 잠비아로 날아가 현장을 맡고 있다. 류 소장은 건설사에서 현장감독으로 40년 동안 잔뼈가 굵었다. 오 대령과 막역한 친구 사이다. 친구 때문에 팔자에 없던 잠비아로 날아가 말도 안 통하는 잠비아 인부들과 씨름하고 있다. 현장의 잠비아인들 하루 일당은 3달러. 잠비아에서 한 달 100달러면 온 가족이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돈이다. 올 7월부터 오 대령과 류 소장이 합류하면서 현장일은 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
   
   이들 외에도 황 신부를 도우려는 사람들이 많다. 서울대 농대 한 교수는 농업대학을 세우면 교수진을 책임지기로 했다. 미국 동포들은 ‘잠봉(잠비아 봉사)아메리카’를 만들어 후원회비를 모으고 있다. 평화방송에 나가 “잠비아 간호대학 공사비 3억원이 부족하다. 1000만원씩 30명이 도와주면 된다”고 말했더니 지금까지 140명이 돈을 보내줬다. 황 신부를 응원하는 한국의 후원부대 ‘되살림’ 회원들도 있다.
   
   ‘카사리아 에코시티’라는 큰 그림에 희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장 상황은 상상 이상으로 열악하다. 모든 사회 시스템이 느리다. 잠비아인들 관리도 쉽지 않다. 막대한 개발 비용은 가장 큰 고민거리다. 최악의 경우 일부만 개발하고 중단될 수도 있다. 앞으로 필요한 인력도 많다. 토목, 설비, 전기, 목공부터 전기, 상하수도 기술자도 있어야 하고 컴퓨터, 미술, 음악 등 교사도 필요하다. ‘농업대학’에서 출발한 그의 시작은 작았으나 일이 너무 커졌다.
   
   
▲ ‘카사리아 에코시티’의 설계를 맡은 ‘어반트랜스포머’ 팀. 김정빈 교수(왼쪽 세 번째)와 전수빈, 이소애, 김은택씨(왼쪽부터). 김 교수가 뒤편에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은 개미산이다. 수백 년, 수천 년에 걸쳐 개미들이 건축해놓은 개미산들이 곳곳에 있다. 개미들의 침이 섞여 개미산의 흙은 돌처럼 단단하다. 에코시티의 벽돌을 만드는 데 이 ‘개미산’의 흙을 이용한다. photo 어반트랜스포머

   삶 껴안기, 죽음 껴안기
   
   황 신부의 계획에 우려의 시선도 있다. ‘왜 잠비아에 돈을 쏟아부어야 하느냐’며 못마땅해하는 사람도 있다. 유명세 뒤에는 시기 세력이 있게 마련이다. 황 신부가 올해 초 외부활동을 중단한 배경에는 사실 건강보다 마음이 더 지친 탓도 있다. 황 신부는 앞으로 외부 강의 대신 유튜브 강의에 집중할 생각이다. 내년부터는 잠비아에 있는 시간을 점점 더 늘릴 계획이다.
   
   “생태마을은 이제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갈 겁니다. 내가 더 필요한 곳으로 가야죠. 요르단강을 건너갔다 오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황 신부는 2011년 위암 3기였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병원에 가서 수술하고 위암을 극복했다. 그가 말한 ‘요르단강’은 그 일을 말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일어난 충북 제천 목욕탕 화재 사건도 죽음을 가까이 느꼈던 사건이다. 황 신부는 평생 병을 안고 살았다. 중학생 때 원인을 알 수 없이 아파 학교를 그만두고 한동안 방황했다. 독한 양주 마시고 담배 피우며 부모 속을 썩였다. 수십년 지나 최근에야 알았지만 ‘자가면역질환’이었다. 몸이 아파 생긴 습관이 매일 목욕탕에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이다. 평창읍 목욕탕이 쉬는 목요일은 제천까지 간다. 매주 목요일 오후 3~4시는 화재가 났던 제천 목욕탕 열탕에 앉아 있는 시간이다. 마침 그날 부산에서 강의가 있었다. 힘들게 강의를 다녀왔는데 목욕탕 화재 소식이 들려왔다.
   
   “삶과 죽음이 순간입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우리가 붙잡고 있는 인기, 명예, 돈, 이런 것들이 얼마나 허무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죽음 껴안기’라는 책을 쓰고 있어요. 요즘 쉬는 시간이 많아 벌써 절반 가까이 써놓았습니다.”
   
   그의 책 중에 가장 최근 나온 책이 ‘삶 껴안기’였다. 황 신부는 삶도 죽음도 껴안으면 욕심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 다 비운 자리에 황 신부는 아프리카의 꿈을 심고 있다. 카사리아 에코시티가 자리를 잘 잡아 나미비아, 앙골라 등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에도 제2, 제3의 에코시티가 나오는 것이 마지막 바람이라면서 황 신부가 말했다.
   
   “제가 잘나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큰 그림에 내가 얼떨결에 앞에 서서 가는 것뿐입니다.”
   

   잠비아로 간 수녀들
   한국서 30년 봉사 하이디 수녀 잠비아를 일으키다
   
▲ ‘카사리아 에코시티’ 기공식에 참석한 하이디 브라우크만 수녀와 황창연 신부.

   1966년, 22살의 독일인 수녀가 김포공항에 내렸다. 아프리카 선교를 원했지만 파견이 결정된 곳은 낯선 나라 한국이었다. 한국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급하게 찾아본 백과사전 내용이 전부였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은 비참했다. 청계천변 빈민촌에서 야학교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눈 돌리는 곳마다 굶주리고 집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한국인들도 돌아보지 않는 곳에서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하며 한국의 발전을 지켜봤다. 나환자와 결핵환자들을 돌보다 결핵에 걸리기도 했다. 아픈 사람들을 보다 못해 의대에 진학했다. 1975년 가톨릭의대를 졸업해 의사가 됐다. 하이디 브라우크만(Heide G. Brauckmann·75), 한국 이름은 백혜득이다.
   
   그가 한국인을 위해 한 일은 셀 수 없이 많다. 한국결핵협회 복십자 대상(1991년), 호암 사회봉사상(2000년), 우봉봉사상(2006년) 등이 그의 행적을 설명해준다. 그는 자신을 진짜 필요로 하는 곳을 돕기 위해 소속된 수도회를 나왔다. 소속된 채로는 병원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1983년 프란치스코 전교봉사수녀회를 창립해 병원에도 올 수 없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봉사를 했다.
   
   현재 하이디 수녀는 아프리카 잠비아에 있다. 50여년 전 한국을 찾았을 때의 젊은 수녀는 백발이 됐다. 한국에 주었던 사랑을 지금 잠비아에 쏟아붓고 있다. 하이디 수녀와 전교봉사수녀회는 1996년부터 잠비아에서 굶주리고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있다. 잠비아의 땅 3000㏊에 건설되고 있는 ‘카사리아 에코시티’의 기적은 사실 하이디 수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잠비아 땀부에 있는 하이디 수녀와 이메일 인터뷰를 했다.
   
   잠비아와의 인연은 1994년 한 통의 편지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잠비아의 한 주교님이 잠비아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선교사들을 찾다 우리 수녀회의 소문을 듣고 연락을 해온 겁니다. 당시 우리 수녀회가 출범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깜짝 놀랐죠.”
   
   하이디 수녀는 편지를 받고 바로 잠비아를 찾았다. “슬럼가는 처참했습니다. 당시 온 나라에 에이즈가 확산돼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어요. 구리광산이 나라의 유일한 소득이었는데 국제 구리 값이 폭락하면서 광산은 황폐해졌고 아이들은 영양실조가 심각했어요. 빨리 와서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바로 결심했죠.”
   
   1996년 2월, 하이디 수녀는 잠비아로 갔다. 한국 수녀 5명이 그와 함께했다. 의사소통을 위해 영어를 익히고 준비하는 데 1년이 걸렸다. 수녀들은 각각 영양사, 재봉사, 교사, 간호사 역할을 담당할 이들이었다. 무풀리라에 자리를 잡고 진료소를 열었다. 재봉·농업·요리 교실도 운영했다. 한국에서처럼 하이디 수녀가 그동안 이곳에서 한 일은 엄청나다. 은돌라, 땀부 등 활동지역도 넓혔다. 병원을 짓고 간호학교, 수녀원을 만들어 간호사, 수녀들을 키우고 있다. 고아원, 유치원, 초등학교, 노인시설, 농업훈련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하이디 수녀는 한국, 독일, 이탈리아 등 세계 곳곳을 다니며 후원금 마련하느라 발이 닳았다.
   
   “잠비아의 상황은 여전히 안 좋습니다. 구리광산과 외채에 너무 의존하다 보니 국제 구리 가격에 온 나라가 휘둘리고 그나마 광산도 외국인들이 소유해 잠비아에 돌아오는 것도 없습니다.” 잠비아 걱정이 큰 하이디 수녀는 희망을 ‘카사리아 에코시티’에 걸고 있다. 잠비아 정부로부터 3000㏊의 땅을 받기까지 하이디 수녀가 중간 역할을 했다.
   
   “잠비아의 미래는 농업과 자급자족에 달려 있습니다. 카사리아를 시작으로 잠비아 전역에 생태도시가 이어지길 바랍니다.” 하이디 수녀의 답 메일은 여기서 끝났다.
   
   ‘카사리아 에코시티’를 설계한 김정빈 교수는 2016년 처음 잠비아에 갔을 때 땀부에 있는 하이디 수녀를 찾았다고 한다. 땀부는 오지 중 오지로 무풀리라에서 20여시간 달려간 끝에 만날 수 있었다. 도로 사정이 워낙 안 좋아 서울~부산 거리인데도 몇 배가 더 걸렸다. 그때까지 김 교수는 잠비아 일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왜 한국에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 잠비아를 도와야 하느냐”는 김 교수의 질문에 하이디 수녀가 딱 한마디로 대답을 하더란다.
   
   “내가 처음 한국에 갔을 때 한국도 이랬답니다.”
   


   잠비아 의료봉사팀 김선영 ‘김선영치과’ 원장
   “봉사하러 갔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았다”
   
▲ 2013년 잠비아에 첫 의료봉사를 간 홍은영·김선영·이광연씨(왼쪽부터).

   황창연 신부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아마 잠비아를 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경기도 평택에 있는 ‘김선영치과’의 김선영 원장은 병원 때문에 제대로 된 여행 한 번 가본 적이 없었다. 1주일 넘게 병원 문을 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13년, 오랜 인연인 황 신부가 아프리카 잠비아로 의료봉사를 가자고 했다. 치과의사가 꼭 필요하다고 했다.
   
   김 원장과 홍은영 인천 갈산우리치과 원장, 그리고 호주에서 치과를 하고 있는 이광연씨까지 겨우 3명이 꾸려졌다. 병원 간호사들까지 데리고 프란치스코 전교봉사수녀회 수녀들이 활동하고 있는 잠비아 무풀리라로 갔다. 생전 치과라고는 가본 적도 없고, 충치 때문에 치통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새벽부터 트럭 타고 꼬박 하루를 달려온 사람도 있었다.
   
   “선진국은 치주질환이 많지만 후진국은 충치 환자들이 많아요. 거친 음식을 먹다 보니 턱뼈도 단단하고 뿌리도 깊어서 충치를 빼기가 만만치 않아요. 처음엔 치과용 의자도 없어서 침대 등받이를 세워놓고 침대에 기어올라가다시피 해서 이를 뽑았어요.”
   
   김 원장의 설명이다. 김 원장이 본 환자는 하루에 70~80명. 무엇보다 큰일은 에이즈 환자들을 분리 치료하는 것이다. 수녀들이 관리하고 있는 환자 리스트를 참고하고 현장에서 혈액검사 등 기본검사를 해서 가려낸다. 치료를 받으러 온 환자들 중 에이즈 환자 비율은 20% 정도. 감염 위험은 없느냐 물으니 “걸을 수 있을 정도의 상태면 감염 위험도 적다”고 말했다.
   
   올해로 6년째, 3명으로 시작해 치과·안과 의사 12명으로 늘었다. ‘카사리아 에코시티’의 기적 뒤에는 이들의 봉사가 있었다. 매년 7월, 모두 병원 문 닫고 경비도 각자 내서 봉사를 떠난다. 회비를 내서 그동안 의료장비도 차근차근 갖춰놓았다. 김 원장을 비롯해 의료봉사팀은 이제 7월을 기준으로 1년이 돌아간다. 그만큼 잠비아는 그들의 삶에서 중요한 곳이 됐다. 설레면서 잠비아 갈 날을 기다리고, 다녀오면 행복하다. 고생을 사서 하며 이들을 달려가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 어르신이 아주 낡긴 했지만 양복을 입고 왔어요. 영국 식민지 문화가 남아 있어서 관공서를 갈 때는 갖춰 입는 거죠. 신발을 벗고 침대에 누웠는데 양말 바닥이 보였어요. 양말이 다 뜯어져 발바닥이 훤히 드러나는데 흙이 잔뜩 묻어 있는 겁니다. 수녀님께 물었어요. 왜 신발을 신고 왔는데 흙투성이냐고. 알고 보니 신발은 정말 특별한 때만 신는 거라 고이 손에 들고 왔다 병원에 들어올 때에야 신었던 거죠.”
   
   그들이 의료진에 대해 표하는 최대한의 존중과 감사의 마음이었다. 김 원장의 마음에 사진처럼 남아 있는 장면이다. 발치밖에 해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그 말을 들은 수녀가 이런 말을 했다. “아픈 이 하나 때문에 고통받는 이곳 사람들에겐 마취하고 이 빼주는 것만 해도 큰일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김 원장은 깨달았다. 그동안 감사를 잃어버리고 살았다는 것을.
   
   “한국에서는 돈을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다 보니 환자도 의사도 너무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거죠. 비로소 내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구나.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그들을 보면서 모든 것을 돈으로 판단했던 것에 대한 반성이 들었습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의료봉사팀에 뜻을 보태는 사람은 점점 늘고 있다. 요즘엔 자녀를 데리고 오는 의사들도 있다. 줄 서서 번호표 받고 하루 종일 기다려도 불평 한마디 안 하는 사람들에게 올해는 아이들이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나눠줬다. 이들은 또 내년 7월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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