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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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현장에 있어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할 만한 내용이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신약과 의료기술에 적응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소아심장 전문의로 아시아·태평양 소아심장학회 회장까지 지냈던 박인숙 자유한국당 의원(서울 송파구 갑)에게 요즘의 신약과 신기술은 낯설기까지 하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고가의 신약에 대한 환자들의 접근성이 높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지난 9월에도 박인숙 의원은 ‘선등재 후평가 제도’라는 정부와 환자 사이 절충안을 가지고 국회에서 토론회를 벌이기도 했다.

지난 10월 3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박인숙 의원을 만났다. 시간이 갈수록 관심이 높아지는 면역항암제의 접근성 강화 방안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다. 면역항암제는 최근 들어 암환자에게 마지막 보루처럼 여겨지는 신약이다. 반응률이 암 종류에 따라, 환자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일단 효과를 보인 환자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생존 기간을 늘리고 사망률을 낮춘다. 기존 항암제 치료에도 효과가 없던 암환자라면 누구나 투약을 원할 만한 획기적 신약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용 허가가 빨리 나지 않는다는 점, 허가가 난다고 해도 보험에 등재되기까지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다.

박인숙 의원에게 이 일은 낯설지 않다. 인터뷰에 응하면서는 “면역항암제는 워낙 최신 항암 치료 분야라 공부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사실 박 의원은 국회 입성 전부터 환자들이 신약 때문에 고통받는 것을 목격해왔다. 그는 질병관리본부 희귀난치성질환센터 초대 센터장을 지냈다.

“환자들에게서 부탁을 참 많이 받습니다. ‘나에게는 이 약밖에 방법이 없는데 약이 너무 비싸서 사용할 수가 없다’ ‘약이 급여에 등재되기까지 1년, 2년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전에 써야 한다’…. 정말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건강보험 재정은 정해져 있고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제도 안에서 어떻게 해서든 급여를 확대하고 보장성을 넓히려 노력해왔던 것이 사실이에요. 그러나 환자와 의료 현장의 기대 수준은 그걸 훨씬 앞서 나갑니다.”

그래서 박 의원은 국회에 들어오자마자 1호 법안으로 희귀난치성질환관리법을 발의했고 2015년 12월부터 희귀질환관리법 제정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여전히 고가의 신약으로 인한 ‘메디컬푸어’는 문제가 된다. 한국암치료보장성확대협력단의 조사에 따르면 암환자를 힘들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 경제적 어려움이다.

“우리는 지금 세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빠른 변화 속도, 건강보험 재정건전성, 그리고 환자에 대한 보장성 강화.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기존의 제도로는 불가능합니다. 보완적인 제도가 필요한데 제가 제시하는 것은 ‘선등재 후평가’ 제도입니다.”

지금 한국의 의약품 등재 제도는 선별 등재 시스템이다. 식품의약처에서 허가받은 의약품에 대해 제약사가 보험급여 신청을 하면 경제성 평가 등 비용효과성 심사를 거쳐 선별해 급여하는 제도다. 이 제도는 공적인 건강보험 단일 시스템에서 유용하게 재정을 관리해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의약품 개발 속도가 빨라지고 개발과 사용이 실시간으로 이뤄지면서 이렇게 ‘느린’ 제도는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래서 박인숙 의원이 제안하는 것이 먼저 신약이 허가를 받으면 우선 보험급여로 ‘등재’한 이후 비용효과성을 심사하고 약가를 협상하는 경제성 ‘평가’는 나중에 하는 선등재 후평가 제도다. 평가를 받기 전까지는 환자의 약가 부담을 건강보험이 임시로 부담하고 만약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면 제약사로부터 다시 환급받는 구조다.

“선등재 후평가 제도에서 약값을 정하는 것은 미국, 영국, 스위스 같은 몇몇 선진국의 약가입니다. 일단 약을 사용하는 게 우선이잖아요. 필요한 환자가 약값 때문에 사용하지 못하거나 경제적으로 고통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임시 약값을 결정하고, 나중에 제약사로부터 환급을 받게 하는 겁니다. 학계에서 이 제도가 건강보험 재정에 미칠 영향을 조사해보니 최대 89억원이라는 수치가 나왔는데 이건 매우 적은 액수입니다.”

선등재 후평가 제도가 건강보험의 재정건전성과 함께 환자들의 신약접근성을 확대시킬 수 있는 제도라는 게 박인숙 의원의 설명이다.

의료·바이오 강국이 되는 길

면역항암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신약 등재를 가로막는 경직된 건강보험 체제에 대해 얘기할 수밖에 없고, 건강보험 체제를 이야기하다 보면 보장성 강화라는 명목하에 놓치는 수많은 사회문제를 언급하게 된다. 의료계에서는 문재인 정부 들어 이른바 ‘문재인케어’로 실시된 보장성 강화 혜택, 그러니까 향후 5년간 미용·성형 분야를 제외하고 모든 의학적 비급여를 급여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책이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의료·사회적 문제를 야기한다고 지적한다. 박인숙 의원 역시 같은 의견이다.

“무엇을 먼저 보장해주고 누구를 먼저 신경 써줘야 할 것인가에 대한 신중한 고려 없이 일단 급여화하는 것, 그것도 보기 좋은 항목부터 급여화하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진짜로 의학적으로 심각한, 재정적으로도 위기에 처해 있는 중증질환 환자들의 급여 문제를 고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덜어줘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건강보험의 보장성 문제는 하루이틀에 뚝딱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확대한 보장성을 다시 줄이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신중하게 설계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재정건전성 유지만을 고려하면 신약의 보험 등재 기간은 좀처럼 짧아지기 어려울 것이다. 당장 글로벌 제약사가 실시간으로 쏟아내고 있는 신약이 활용되기조차 어려운 환경에서 신약 개발이나 첨단 의료기술의 발전은 요원한 일이다.

“환자들은 신약에 대한 충분한 의학적 지도를 받고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게 더 많은 환자를 거쳐 표준치료제로 확정된 신약은 또 다른 신약 개발의 원동력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본적인 과정조차도 제대로 밟고 있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이오 강국은 그저 말뿐인 표어가 될 수 있습니다.”

박 의원에 따르면 고가의 신약에 지금보다 더 쉽게 접근하게 하는 일은 환자에 대한 복지를 확대하는 일일 뿐 아니라 의료·바이오 산업을 진흥하는 일이기도 하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들, 치료가 절실한 환자들의 목소리를 늘상 들으며 어떻게든 돕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그 방향이 의료·바이오 ‘산업’과 배치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환자의 치료비용을 ‘비용’으로만 생각하고 산업적 투자, 인적 자원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보수적인 시스템이 문제이지요.”

박인숙 의원의 사무실 책장에는 두꺼운 서류철이 빼곡하게 잘 정리돼 꽂혀 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를 책장에서 즉시 꺼내와 펴들고 설명을 이어나가곤 했다.

“힘이 없는 환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계속해서 쓴소리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요. 하지만 제가 국회에 들어온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더 많은 국민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데 있기 때문에 괜히 쓴소리한다고 눈총을 받더라도 굴하지 않고 계속 앞장설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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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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