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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5호] 2018.12.03

뒤에서만 떠드는 비겁한 지식인들에게

조정육  미술평론가 

오랜만에 학계 사람들을 만났다. 다섯 명 모두 대학에서 교수를 하거나 연구소에 근무하는 사람들이었다. 반주를 곁들인 저녁식사를 하면서 서로의 근황에 대한 안부가 오고 간 뒤 얘기는 자연스럽게 사회 이슈로 넘어갔다. 그때부터 식사자리는 정부를 규탄하는 성토대회장으로 돌변했다. 모두들 투사라도 된 듯한 목소리로 현 정부 정책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부동산 문제부터 남북한 정책까지, 최저임금 문제부터 예멘 난민 문제까지 주제는 다양했고 분석은 예리했다.
   
   한번 달아오른 열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지금 상황은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더 심각한데 정부가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내가 뽑은 대통령이 이럴 줄 몰랐다” “어떻게 노무현 정부 때 실패했던 정책을 똑같이 되풀이하느냐” “상위 1%의 부자를 잡기 위해 나머지 99%의 국민을 볼모로 잡고 있다” 등의 격앙된 목소리가 식사시간 내내 이어졌다. 하나의 이슈가 거론될 때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우리가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 같은 지식인들이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란 결론에 도달했고 내일이라도 당장 행동에 옮기자는 얘기까지 나왔다. 시국선언이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다음 날이었다. 아침이 되자마자 나는 어제 가장 목소리를 높였던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잘 들어갔느냐는 인사와 함께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까를 물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말이 그렇다’는 얘기지 우리가 당장 무엇을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는 대답이었다. 시국선언은 못 하더라도 글이라도 써서 정부가 국민들의 뜻을 알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더니 더 참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글을 써 봤자 받아줄 매체도 없고, 정부가 귀를 닫고 있는데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했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전화를 걸어봤지만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해서 학교 재단이나 연구소 소장 눈 밖에 나면 좋을 게 없다는 뜻이었다. 누군가는 ‘찍히면’ 학술연구재단의 지원금을 받을 수 없다고 했고, 누군가는 외부 용역이 끊길 것을 걱정했다. 그들 모두 전날 밤의 얘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결국 그날의 비분강개함은 허약한 지식인들이 사회에 대한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데 그쳤고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날의 모임이 계기가 되어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식인의 정의, 지식인의 역할, 지식인의 책무 등등 지식인에 대한 논쟁은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 그만큼 한 사회를 지탱하는 데 지식인의 존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그런 논쟁을 정리하기보다는 역사 속에서 서로 다르게 살아간 세 사람의 예를 통해 지식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채용신, ‘황현상(像)’, 비단에 색, 95×66㎝, 구례 매천사

   나라가 망하자 자결한 황현(黃玹)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하나 나라가 오백 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나는 위로 황천에서 받은 올바른 마음씨를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던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려 한다.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
   
   이 유서(遺書)는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이 1910년 경술국치에 맞서 자결로 생을 마감하기 전에 남긴 글이다. 그는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지는 않았다. 과거제도의 부패상을 목격하고 출세를 포기한 후 고향인 전남 구례로 낙향하여 제자들을 길렀다.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가 없다’는 얘기는 그가 나라의 녹봉을 받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 그가 망국의 날을 맞아 한·일 강제병합 체결 16일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선비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평생 읽던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선비 된 자의 의무를 그런 식으로 실천했다. 그는 자결하기에 앞서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겼는데 그중 세 번째 시에는 나라 잃은 지식인의 고뇌가 절절하게 담겨 있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1848 ~1941)이 그린 ‘황현상(黃玹像)’에는 우국지사의 꼿꼿함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조선시대 마지막 초상화가인 채용신은 인물을 잘 그려 고종의 어진(御眞)을 비롯해 ‘최익현상(崔益鉉像)’ ‘전우상(田愚像)’ ‘운낭자상(雲娘子像)’ 등 수많은 초상화를 남겼다. ‘황현상’은 채용신이 전신(傳神)의 천재라는 명성에 걸맞게 얼굴의 피부결을 극세필로 그린 육리문(肉理文)이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다. 터럭 하나까지도 틀리게 않게 그리는 핍진(逼眞)함이 탁월한 수작이다. 초상화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대변한다. 40대 이후의 얼굴에 대해서는 본인 스스로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도 그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황현상’과 마주하는 순간 그의 강렬한 눈빛을 받아내기가 힘들 만큼 움찔하게 되는 것은, 입을 꼭 다문 채 말 없는 말로 우리에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가’라고.
   
   절명시는 대체로 암울한 시대에 쓰였다. 성삼문(成三問·1418~1456)과 이개(李塏·1417~1456)도 세조의 단종 폐위에 항거해 절명시를 썼고, 개혁을 추구하다 38세에 사약을 받은 조광조(趙光祖·1482~1519)도 절명시를 남겼다. 이들이 모두 왕의 뜻에 반해 의로움을 실천하다 강제로 죽임을 당해야 했다면 황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이 차이점이라 하겠다. 항거의 형태가 꼭 자결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황현이 무장투쟁을 할 수 있는 무인(武人)이 아니라 평범한 지식인이자 선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절명이야말로 최고의 결단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나라의 녹을 먹고서도 모자라 자진해서 나라를 팔아먹겠다고 설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던 시대였다.
   
   지금은 황현의 시대처럼 나라를 잃은 식민지 상태가 아니다. 그때만큼 절박한 상황은 아니라 해도 여전히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예를 들면 제주도에 입국한 예멘 난민 문제가 불거졌을 때, 지식인들은 난민 수용을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서로 피켓 들고 시위하는 모습을 방관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그 사건을 계기로 해서 난민 연구자들은 역사적으로 난민이 발생한 원인과 세계의 난민 현황을 다룬 글을 정리해서 발표해야 하고, 다른 나라의 난민 대체 사례 등을 첨가하여 우리는 어떤 식으로 난민대책을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어야 한다.
   
   연구자들과 지식인들이 나 몰라라 하고 입을 닫으니 황색언론과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사람들은 판단능력이 흐려져 포퓰리즘에 휩쓸리게 된다. 지식인들이 여전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을 하기 위해서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다. 스티브 풀러는 ‘지식인: 현대사회에서 지식인으로 살아남기’에서 “무슨 생각이든, 어떤 매체를 통해서든 기꺼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려고 노력하라”고 조언한다. 꼭 유명한 매체가 아니라도, 또한 정부에서 귀를 닫고 있어 말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다는 회의가 들어도 지식인은 자신의 소신을 발표할 의무가 있다. 이것이 우리 시대에 지식인이 목숨을 바쳐야 할 시대적 소명의식이고 의무감이다. 황현이 쓴 유서와 절명시도 유명한 매체가 아니었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는가.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단순히 술자리의 안주로 젓가락질만 하다 끝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공(功)을 이루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
   
▲ 김홍도, ‘동강조어’ 고사인물도 8폭, 종이에 연한 색, 111.9×52.6㎝, 간송미술관
엄광(嚴光·기원전 37년~서기 41년)은 후한(後漢) 때의 인물이다. 그는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기원전 6년~서기 57년)와 동문수학한 친구였는데 유수가 황제로 즉위하자 이름을 바꾸고 은거(隱居)해버렸다. 광무제가 엄광을 찾아내어 조정으로 불렀으나 오지 않다가 삼고초려 끝에 겨우 나왔다. 광무제는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나 회포를 나누다 함께 잠을 자게 되었는데 잠결에 엄광이 광무제의 배에 다리를 올려놓고 잤다. 다음 날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객성이 어좌(御座)를 범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광무제가 웃으면서 “짐이 엄광과 더불어 잤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였다. 광무제는 엄광이 조정에 머물러 벼슬하기를 권했으나, 엄광은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부춘산(富春山)으로 들어가 농사짓고 낚시질하며 숨어 살았다. 사람들은 엄광이 낚시질한 곳을 ‘엄릉여울(嚴陵瀨)’이라고 불렀다. ‘후한서(後漢書)’ 권83 ‘일민열전(逸民列傳) 엄광조’에 나오는 내용이다.
   
   후대의 시인과 화가들은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의연하게 살다간 엄광의 삶을 ‘동강수조(桐江垂釣)’ ‘동강조어(桐江釣魚)’ ‘엄릉거조(嚴陵去釣)’ 등의 제목으로 작품화했다. 작품 제목에 ‘동강(桐江)’이 들어간 이유는, 엄광이 낚시질하던 엄릉여울이 절강성 동려현(桐廬縣)에 있었기 때문이다. 후한의 황보밀(皇甫謐·215~282), 남송(南宋)의 대복고(戴復古·1167~?) 등을 비롯한 여러 시인들이 엄광을 찬탄하는 시를 남겼다. 조선의 김홍도(金弘道·1745~1806)는 엄광이 낚시하는 장면을 소재로 ‘동강조어(東江釣魚)’라는 그림을 그렸다. ‘동강(桐江)’을 동음(同音)인 ‘동강(東江)’으로 표기한 것이 흥미롭다. ‘동강조어’는 그림 중간을 가위질하여 둘로 나눠도 될 만큼 화면의 중심에 넓은 공간을 배치했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보다는 감춰지기를 원했던 엄광의 심정을 대변하고자 했을까.
   
   엄광처럼 은거하는 사람을 ‘은자(隱者)’라고 한다. 은자는 ‘은사(隱士)’ 또는 ‘유인(幽人)’ ‘일민(逸民)’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이름을 감추고 숨어 사는 사람을 뜻한다. 이들은 죄를 지었거나 능력이 없어서 숨어 사는 것이 아니라 어지러운 속세(塵世)를 피하기 위해 깊숙한 곳으로 숨는다. 은자는 흔히 옛 그림에서 어부(漁夫)나 초부(樵夫) 등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물고기와 낚싯대를 든 어부와 허리춤에 도끼를 찬 나무꾼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그린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가 바로 은자들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어부와 초부는 생계를 위해 물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은자가 어부와 초부라는 신분으로 위장한 ‘가어옹(假漁翁)’이고 ‘가초옹(假樵翁)’이다. 무술영화에서 무공이 뛰어난 고단자들이 거지 행색을 하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콘셉트이다.
   
   어부라고 해서 물론 전부 은자는 아니다. 어부 중에는 강태공(姜太公)도 있다.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을 알아봐줄 귀인을 기다리며 위수(渭水)에서 낚시질하다 나이 70에 문왕(文王)을 도와 주(周)나라를 세우는 ‘브레인’ 역할을 했다. 같은 그림이라도 함부로 예단하지 말고 맥락을 잘 살펴봐야 한다. 엄광과 강태공 모두 어부는 어부로되 그들이 지향하는 세계는 정반대였다. 강태공이 현세적이었다면 엄광은 도가적(道家的)이었다. 노자(老子)가 “공(功)을 이루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라고 얘기했듯 도가는 은자의 삶을 지향한다. 고시(古詩)에 ‘맑은 물에 귀 씻어 인간사 아니 듣고, 푸른 소나무 벗 삼고 사슴과 한 무리’라고 한 것처럼 은자의 최상의 즐거움은 유유자적함이다. 유유자적함은 티끌 세상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청복(淸福)인 까닭에 속세를 등져도 일말의 미련도 갖지 않는다. 은자가 강호자연에서 사는 모습은 ‘뻐꾸기 은사’와는 전혀 다르다.
   
   뻐꾸기 은사는 강호에 숨어 산다면서 말로만 은둔할 뿐 속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이비’를 지칭한다. 그들의 목적은 은둔이 아니라 숨어 사는 고고한 선비라는 ‘청명(淸名)’을 얻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대로 소문이 잘 나지 않자 스스로 소문을 내게 된다. 이것은 꼬마들이 술래잡기를 할 때 술래가 숨은 아이를 오랫동안 찾지 못하면 숨은 아이가 ‘뻐꾹’ 소리를 낸 것을 비유한 말이다. 즉 내가 지금 여기 숨어 있으니 술래는 빨리 내가 숨어 있는 곳으로 오라는 소리다. 그와 같이 뻐꾸기 은사는 말로는 은둔한다고 하면서 행여 세상이 자신을 몰라줄까봐 안달이 난 모습이 마치 스스로 ‘뻐꾹’ 하고 외치는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허명(虛名)에 집착한 자들을 질타한 신랄한 풍자다.
   
   엄광과 같은 ‘강호은둔학파’에 속한 사람 중 가장 큰 형님뻘에 속한 사람으로 허유(許由)와 소부(巢父)를 들 수 있다.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요(堯) 임금 시절의 얘기다. 허유는 요(堯) 임금이 천하를 자신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자 기산(箕山)에 숨어버렸다. 다시 요 임금이 구주(九州)라도 맡아달라고 하자 이번에는 영수(潁水)에 가서 더러워진 귀를 씻었다. 마침 소부가 송아지에게 물을 먹이려 영수에 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귀를 씻는 이유를 물었다. 허유의 사연을 들은 소부는 갑자기 송아지를 이끌고 강물을 거슬러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왜 그러느냐고 묻는 허유에게 소부가 한마디 했다. “그대가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내 어찌 송아지에게 먹일 수 있겠소.” 은자입네 하면서 소문을 퍼트린 허유의 속마음을 그대로 꿰뚫어본 말이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강호 은둔자의 절대고수라고 할 수 있다.
   
   엄광이 물러나겠다고 하니 억지로 붙잡지 않고 보내준 광무제도 대단한 사람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광무제 같은 사람도 찾기 힘들다. 허명에 사로잡혀 뻐꾸기 소리를 내는 가짜 은자들도 문제지만, 누군가 이름이 조금 알려졌다 하면 공부를 할 수 있게 가만 내버려두지를 않는 사회 분위기도 문제다. 공부할 사람은 공부할 수 있게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 ‘나도 이렇게 유명한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깍두기로 끼워넣으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은자를 은자로 살아가게 놓아두어야 광무제가 될 수 있다. 지식인이 글을 쓰고 강의하는 것은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지 유명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학교수는 수업시간 외에는 판판이 놀아도 되는 ‘놀고 먹는’ 직업이 아니다. 놀고 먹는 직업으로 대학교수를 하는 사람은 이미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다. 유명인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모임에 안 나온다고 비난하는 대신 논문과 책이 안 나올 때 욕을 해야 한다. 그래야 학자나 교수들이 직무유기하는 대신 자신이 하는 일에 책임감을 느낀다.
   
   은자는 출사(出仕)하지 않고 강호에 틀어박혀 몸을 맑게 한다. 시쳇말로 더러운 물에 발을 담그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은자와 뜻을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은자의 대척점에 공자(孔子·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가 있다. 기원전 491년이었다.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섭(葉) 지역을 지나 채(蔡)나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공자가 고국인 노(魯)나라를 떠나 주유열국(周遊列國)을 시작한 지 6년째 되는 해였다. 황하(黃河)를 건널 수 있는 나루터를 찾다 밭을 갈고 있는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을 만났다. 공자는 제자 자로(子路)를 시켜 그들에게 나루터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보게 하였다. 그러자 장저와 걸익은 자로에게 나루터를 알려주는 대신 엉뚱한 말을 했다. “도도한 흙탕물이 바로 천하의 형국인데, 누구와 더불어 개혁할 수 있겠는가. 그대도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지 말고, 세상을 피한 선비를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렇게 말하고는 나루터를 알려주지는 않고 계속해서 밭을 갈았다.
   
   이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자로문진(子路問津)’이다. ‘자로문진’은 ‘자로가 나루터를 묻다’란 뜻으로 조선 후기에 활동한 평양 출신 화가 김진여(金振汝)가 그린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1700)에 들어 있다. ‘공자성적도’는 공자의 생애를 여러 장의 그림으로 그린 화전(畵傳)으로 중국·한국·일본에서 지속적으로 그려졌다. ‘자로문진’은 ‘논어(論語)’ 미자(微子) 편에 나오는 내용인데 ‘공자성적도’의 한 장면으로 그려진 것은 물론 독립적인 주제로 그려질 만큼 인기 있는 소재였다.
   
   
   도가 없으니까 은둔할 수 없다는 공자
   
   표면적으로 보면 지나가던 사람이 나루터를 묻는 그림이지만 깊이 들어가보면 그 의미가 사뭇 깊다. 장저와 걸익으로 대표되는 도가(道家)와, 공자와 제자들로 상징되는 유가(儒家)가 맞부딪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장저와 걸익은 은자다. 그들은 ‘도도한 흙탕물이 천하의 형국’이라서 그런 세상을 피해 이름을 숨기며 농사를 짓고 살았다. 농부는 어부와 초부에 이어 세 번째 유형의 은자다. 여기서 ‘사람을 피한 선비’는 공자를, ‘세상을 피한 선비’는 걸익 자신을 지칭한다. 그들의 눈에 공자는 벼슬하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가 나루터를 가르쳐주지 않은 것은 ‘난세에 은거하지 않고 도를 행하겠다고 천하를 주유하는 공자’가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논어’와 ‘사기세가(史記世家)’를 보면 장저와 걸익뿐 아니라 여러 명의 은자들이 공자를 비난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공자는 무엇 때문에 유랑생활을 계속했을까. 나루터를 가르쳐주는 대신 동문서답을 한 은자에게 공자가 한숨 쉬며 대답한 말에 그 해답이 들어 있다. “새나 짐승과 더불어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사람 무리와 어울리지 않으면, 누구와 어울리랴. 세상에 도가 서 있다면, 내가 굳이 바꾸려 하겠는가.” 아무리 세상이 혼탁해도 결코 세상을 피해 몸을 숨기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주희(朱熹·1130~1200)는 ‘논어집주(論語集注)’에서 ‘천하가 이미 태평성세라면 굳이 개혁할 필요도 없는데, 천하에 도가 없기 때문에 도로써 개혁하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호(程顥·1032~1085)는 ‘성인은 감히 천하를 망각하는 마음을 지닐 수 없는지라, 그 말씀이 이와 같다’고 했고, 장재(張載·1020~1077)는 ‘성인은 어질어 천하를 무도하다고 단정하고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즉 은자는 천하에 도가 없으니까 은둔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공자는 도가 없으므로 은둔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공자는 제자 자공(子貢)이 “아름다운 옥이 있다면, 궤에 넣어 보관해두시겠습니까? 좋은 상인을 찾아 파시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좋은 상인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공자는 천하에 도모하지 못할 시절이란 없다고 생각했다. 공자는 벼슬하기를 바라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임관(任官)에 의한 부귀는 공자의 목적이 아니었다. 공자의 목적은 오직 ‘제인(濟人)’, 난세에 태어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벼슬을 해도 되면 하고, 도에 의거하지 않을 경우에는 즉시 그만두었다. 55세에 길을 나선 공자는 도를 행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주유열국을 계속했고, 14년 후 68세가 되어서야 노나라에 귀국했다. 공자의 뒤를 이은 맹자(孟子·기원전 372년경~기원전 289년경)도 ‘현실정치에 참여해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듯 유가(儒家)들은 모두 출사(出仕)에 적극적이었다.
   
   누구는 은자로 살아 존경을 받았고 누군가는 은자로 살아 손가락질을 받았다. 유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은자냐 유가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인으로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 김진여, ‘자로문진’ 공자성적도, 1700년, 비단에 색, 32×57㎝, 전주박물관

   지식인은 비판정신과 책임감을 지닌 자
   
   몇 해 전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란 책이 출판되었다. 뒤이어 종편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 방송되었다. ‘지대넓얕’과 ‘알쓸신잡’ 모두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지대넓얕’의 서론에 보면 ‘교양과 인문학으로서의 넓고 얕은 지식이 우리를 심오한 어른들의 대화 놀이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고 되어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교양과 인문학에 대해 목말라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문제는 우리 시대의 지식인들조차 교양과 인문학 차원의 지식 수준에 멈추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나가고 미래를 준비해야 할 지식인들이 자신의 전문지식을 사회에 환원시키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도 모자랄 판에 ‘지대넓얕’을 아는 것에 만족한다는 사실은 매우 슬픈 현실이다. 노암 촘스키는 ‘지식인의 책무’에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적합한 대중에게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진실을 찾아내 알리는 것이 지식인에게 주어진 도덕적 과제’라고 정의하면서 대중에게 진실을 알리는 이유는 교화의 목적도 있지만 ‘인간적 의미를 갖는 행동을 촉구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지식인이 ‘전문지식을 보유하고 담론에 참여하며 담론을 형성하고 주도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준비하고 숙성시켜야 하겠는가.
   
   상황이 이러할진대 ‘지대넓얕’을 비싼 가격에 팔아보겠다고 선거 때마다 선거운동 캠프로 달려가 줄을 서는 지식인들이 수백 명씩 되는 상황은 더더욱 슬픈 현실이다. 자신의 학문세계가 얄팍하니 행여 정치판이라도 기웃거려 ‘아웃사이더’의 열등감을 만회해보겠다는 심산이 아닐까. 예전에 어느 모임에서 내가 허유와 소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어떤 교수가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소부가 송아지를 끌고 가버린 이유가 혹시, 요 임금이 자기는 ‘콜’하지 않고 허유만 캐스팅하려고 하니까 부아가 치밀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지식인들은 이제 더 이상 ‘지대넓얕’으로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행위를 그만두어야 한다. 그 대신 부당한 현실에 침묵하는 대신 자신의 전문지식을 살려 비판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여림심연(如臨深淵)’하며 ‘여리박빙(如履薄氷)’해야 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나오는 말인데 ‘심연에 임하여 살얼음을 밟는 것처럼 전전긍긍하라’는 뜻이다. 남들보다 조금 더 안다고 해서, 가방끈이 조금 더 길다고 해서 우쭐대거나 거드름 피우는 대신 자신의 이론이 맞는지, 오류는 없는지, 끊임없이 묻고 검증하고 확인해야 한다. 그것이 지식인의 본분이고 지식인이 있어야 할 환지본처(還至本處)다.
   
   세계 역사를 살펴볼 때 히틀러나 스탈린을 비롯한 모든 독재자들 곁에는 그들의 이론을 뒷받침해준 어용지식인들이 있었다. 지식인이 환지본처를 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결과다. 물론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지식인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술자리에서만 목소리를 높이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유행가 가사의 주인공처럼 사는 ‘뻐꾸기 지식인’ 대신 세상의 고통과 슬픔을 자신의 삶으로 녹여내기 위해 실천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그나마 우리 사회가 삐꺼덕거리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고 할 수 있다.
   
   나 또한 지식인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느냐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조선 중기의 문신 간이(簡易) 최립(崔岦·1539~1612)은 ‘김수재가 화답한 시에 회답하다(回金秀才和章)’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다 함께 목욕하며 발가벗었다 욕을 하고/ 바보에게 꿈 이야기 해준 것도 진실로 믿는 세상/ 작은 재주에 천착하며 자랑하지 않으면/ 필시 조장하는 송나라 사람들뿐인데/ 나 역시 잘하는 게 무엇이 있으리요/ 단지 그들과 같은 것이 부끄러울 뿐이로세’.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나부터 반성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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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건의 글이 있습니다.
  박성철  ( 2018-12-07 )    수정   삭제
지금 유약하고 권력에 약한 지식인들이 많은데, 얼마 전 김정민국제전략연구소 소장인 김정민 박사의 유튜브를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을 주간조선에서 인터뷰를 하던가 그 사람의 활동에 대해 기사를 쓰면 그런 지식인들에게 자극이 될 것 같습니다.
  equus826  ( 2018-12-07 )    수정   삭제
나는 지식인의 범주에 들지는 않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부끄럽습니다. 나라꼴이 요모양인데 호의 호식하고있는것같고... 나라밖에 사고있으니 국외자야! 라는 자기 위로에 갇혀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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