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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0호] 2019.01.07

김우중과 함께한 25년의 추억

빗속에 뛰어나간 그의 손엔 햄버거 5개가…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 하노이 ‘문화대학’ 내에 설치된 ‘글로벌청년사업가 양성사업(GYBM)’ 6기생들이 2016년 9월 GYBM 설립자인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가운데)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photo GYBM
황혼이 시작됐는데도 눈을 뜨지 않는다. 별 하나 찾기 어려운 칠흑 같은 밤이 됐는데도 날개를 접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지혜의 여신 아테네(로마명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언제쯤 깨어날까? 혼돈에 빠진 한국이란 나라를 지켜줄 부엉이의 혜안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투병 소식을 접했을 때 가슴에 밀려든 회한(悔恨)이다.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며 한국인의 기상을 뜨겁게 달궜던 20세기의 거인. 그가 병원을 오가며 침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하면 된다’는 정신을 세계무대로 끌고 갔던 샐러리맨의 우상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시대와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영웅이 출현한다고 들었다. 왜 한국은 정반대일까. 왜 절실히 필요할수록 하나둘 사라지는 것일까.
   
   “또 보자고. 건강하고!”
   
   2017년 말 김 회장으로부터 들은 마지막 인사다. 함께 저녁식사를 나눈 뒤 숙소로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공교롭게도 장소는 베트남 하노이 대우호텔 입구였다. 1996년 문을 연 베트남 내 초특급시설이 대우호텔이다. 외국인이 머물 만한 제대로 된 숙박시설 하나 없던 하노이에 등장한 최초의 최첨단 호텔이다. 개장 당시 베트남 정부요인들이 대거 참여해 축하메시지를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외환위기 이후 부침을 겪다가 최근 홍콩자본으로 넘어간 상태다. 베트남의 미래 하나를 믿고 투자한 호텔이지만, 이름만 대우일 뿐 한국과 무관한 장소로 변했다. 1999년 대우그룹이 해체되기 직전에 세워진 ‘어제의 흔적’을 배경으로 한 80대 노인과의 재회 약속은 아득하게 사라져갔다.
   
   필자는 4년 전부터 김우중 회장이 일궈온 베트남 하노이의 글로벌청년사업가양성사업(Global Young Business Manager·GYBM)과 연을 맺어왔다. 김 회장의 부탁으로 매년 들러 한국 청년들에게 필자의 경험담과 세계관을 전하고 있다. 권력이나 재력과 무관하지만,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체득한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청년들과 나누고 있다. 하노이 GYBM은 2012년 첫 졸업생을 배출한 이래 매년 100명 가까운 한국 졸업생들이 베트남 등 동남아 현지 기업에 가서 일하고 있다. GYBM은 김우중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베트남·미얀마·인도네시아는 김 회장이 생각하는 제2의 중국이다. 한국과 함께 번영의 길로 나갈 수 있는 나라들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 하노이 문화대학에서 GYBM 과정 학생들에게 강연 중인 김우중 전 회장. photo GYBM

   김 회장과 하노이에서 몇 차례 만나 대화를 나눈 결과 GYBM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청년들이 현지 언어와 문화를 습득한 후 이를 현장에서 풀어내며 기상을 마음껏 펼쳐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오래전 김우중과 대우를 통해 알게 됐지만 한국인의 캐릭터와 관련된 필자의 확신이 하나 있다. 한국 청년이 밖으로 나갈 경우 적어도 70%는 ‘반드시’ 성공한다는 사실이다.
   
   청년에게 한반도는 너무도 좁다. 컴퓨터 앞에 앉아 편 가르고 뭔가를 무너뜨리고 부수는 데 정신을 쓰기보다 세계를 상대로 ‘세우는 일’에 몰두할 경우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GYBM은 그 같은 한국인의 가능성을 증명해 보이는 현장이다. 김 회장은 가능하면 GYBM 청년들 곁에 있고 싶어했다. 틈만 나면 베트남에 들러 청년들과 갖는 시간을 중시 여겼다. 김 회장 자신의 경험에 기초한 강의도 주기적으로 했다. 필자가 청년들에게 강의를 할 때면 일부러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개인적 판단이지만, 김 회장 인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시간이었을 듯하다. 어린아이와 같은 표정이라고나 할까. 하노이에서 만난 김 회장의 얼굴과 눈빛은 밝고 맑았다.
   
   
   운명적 만남
   
   세월이 흐를수록 확신하게 되지만, 특정인과의 ‘운명적 만남’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모두에게서 찾을 수 있는, 인생 대전환기 때 반드시 나타나는 ‘공통 현상’이기도 하다. 상대는 그냥 스쳐지나갈지 모르지만 한 사람의 인생 전체에 남을 언행이나 교훈을 특정인과의 만남에서 얻을 수 있다. 눈과 머리로 대하는 책 100권보다 오감, 나아가 육감까지 동원하는 직접 대면 1분이 더 중요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김 회장은 필자의 인생 방향을 바꾼 ‘큰 바위 얼굴’이다. 김 회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93년 말이다. 당시 필자는 서울방송(SBS) 보도국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사회생활 5년째로 접어들면서 뭔가 삶의 대전환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밖에 나가 견문을 넓히고 싶었다. 이런저런 노력 끝에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15기생 입숙(入塾)이 허락됐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가 닥쳤다. 병환 중인 부모를 책임져야 했다. 가난하다고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일본에 가기 전 돈이 필요했다. 대우그룹에 편지를 넣었다. 한국인 최초의 마쓰시타정경숙 숙생이 되려는 출사표와 함께 정경숙에서 공부가 끝나면 김 회장과 대우에 공헌하고 싶다는 개인적 결의도 전했다. 당시 김 회장이 내세운 ‘세계경영’은 필자가 대우에 미래를 건 가장 큰 이유였다.
   
   당시 세계경영은 김 회장의 생각과 비전을 하나로 압축한 말이었다. 20세기 말 대우그룹의 이념이자 모토이기도 했다. ‘글로벌’이란 말은 21세기의 상식이다. 과장하자면 동네 개도 알고 있는 ‘꼰대스러운’ 개념이다. 26년 전인 1993년은 달랐다. 우선 세계라는 개념 자체가 불투명했다. 국제화·세계화라는 말이 혼용되던 시대이기도 했다. 20세기 이전 한국에는 자체 제작된 것은커녕 수입된 세계지도조차 구경하기 어려웠다. 조선시대 그림을 보면 항해 중인 배는 물론 아예 바다에 관한 그림 자체가 귀하다. 바다, 외국은 한반도와 무관한 별천지 세계에 불과했다. 세계경영을 앞세운 김 회장의 혜안은 그 같은 어두운 배경하에서 탄생한 신개념이었다. 기존의 한국인의 의식, 세계관, 역사관을 통째로 뒤엎는, 도전 그 자체였다. 필자의 가슴에 와닿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친 끝에 대우로부터 전화가 왔다. 1993년 겨울, 김 회장과의 직접 만남이 주선됐다. 1분도 안 되는 짧은 면접이었지만, 필자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전부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인생의 대전환을 모색하는 젊은이에 대한 격려’가 지원 이유였다. 필자 개인에 대한 투자가 아니라 변화를 바라는 한국 청년에 대한 격려로서의 지원이었다. 대우에 공헌해야 한다든가, 김우중에게 뭔가를 제공해야 한다는 식의 조건부가 아니었다. 마쓰시타정경숙은 당시 5년 과정이었는데 그 5년 동안 ‘무조건 지원’을 약속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 대우는 필자와 같은 후원자들을 곳곳에 두고 있었다. 한국인 최초의 컴퓨터 해커, 노동현장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운동권 학생들이 김 회장의 개인적 지원을 통해 대우에서 일하고 있었다.
   
   
   폴란드에서 김우중 찾기
   
   ‘세계의 변화와 인류의 미래’는 필자가 가진 마쓰시타정경숙에서의 중심 테마였다. 연구비와 함께 5년간 전 세계 현장을 돌아다녔다. 필자가 내세우는 최대의 자랑거리지만, 125개국을 돌며 인류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살펴봤다. 현지 상황에 대한 리포트는 마쓰시타정경숙에 제출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였다. 우연이자 필연이겠지만 필자가 세계를 돌며 쓴 리포트 중에는 김 회장의 세계경영 이념으로 연결될 수 있는 소재와 주제들이 많았다. 메콩강 개발, 재일동포 손정의와의 협력 필요성, 중국 화교(華橋)와 인도 인교(印橋)네트워크의 활성화…. 이런 주제를 담은 리포트를 작성해 김 회장에게 직접 보냈다. 더불어 지구 곳곳을 헤매는 동안 ‘우연히’ 김 회장을 만나기도 했다. 1995년 폴란드도 그 같은 나라 중 하나다.
   
   당시 폴란드의 대통령은 그단스크의 영웅으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레흐 바웬사였다. 민주화 이후 폴란드의 변화와 함께 바웬사의 동료였던 노동조합 간부들을 만나러 바르샤바에 들렀다. 폴란드 곳곳을 돌아다니던 중 김 회장이 바르샤바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필자의 짐작이지만 1990년대 김 회장의 머리는 세계지도로 뒤엉켜 있었을 듯하다. 직접 ‘발품’을 파는 그룹 회장으로서 세계 곳곳의 현장에 가서 직접 비즈니스를 벌였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의 대우 비서실을 통해 확인했지만 김 회장의 소재지 자체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비서 한 명과 함께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김 회장에 대한 소재파악 업무가 비서실의 주된 일 중 하나였다고 한다. 혼자서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비즈니스가 이뤄지고 있는지 측근들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회장 전용 제트기나 여객기 퍼스트클래스 좌석과는 무관한 샐러리맨 출신 딸깍발이의 비즈니스 여행이었다.
   
   자동차는 1990년대 초 김 회장이 폴란드와 유럽 전체 시장을 겨냥한 미래산업이었다. 민영화를 서두르던 폴란드 정부와의 협의 끝에 엄청난 부지를 제공받고 자동차공장 건설에 바로 들어갔다. 1995년 여름, 바르샤바에 있던 김 회장과의 아침식사 약속에 맞춰 호텔로 찾아갔다. 자리에 앉아 인사를 했지만 곧바로 긴 침묵이 이어졌다. 때마침 외국 신문에 크게 난 폴란드 경제 관련 기사 때문이었다. 식사시간이었지만 4~5개의 영자신문 기사만이 김 회장 관심사의 전부였다. 필자에게 눈 한 번 주지 않은 채 기사를 전부 훑었다. 주변의 대우 직원들에게 궁금한 부분을 일일이 재확인하면서 30분 이상 정독했다. 신문을 다 읽은 뒤 필자와 눈이 마주치자 겨우 한마디를 들을 수 있었다. “잘하고 있지? 세상을 열심히 관찰하고 나라에 도움이 될 일을 하시게!” 김 회장의 말은 거기서 끝났다. 한마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곧바로 일어나 어디론가로 향했다.
   
   바르샤바에서 김 회장과 다시 만난 것은 같은 날 오후였다. 현지 직원들과 함께 대우 자동차공장 시찰에 나설 때 동행했다. 김 회장과 필자를 포함해 전부 다섯 명이 자동차를 타고 현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앞자리에 탄 김 회장이 가던 도중 갑자기 차를 세웠다. 햄버거 가게를 가리키며 “새로 들어선 듯하다”고 말했다. 차에서 내려 곧장 뛰어갔다. 비가 온 뒤라 햄버거 가게로 향하는 땅은 진흙탕에 가까웠다. 숨찬 모습으로 돌아온 김 회장의 손에는 햄버거 다섯 개가 들려 있었다. 구두는 물론 바지 전체가 흙탕물 범벅이었다. 햄버거 맛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러나 자동차 안에서 햄버거를 함께 나눠 먹었을 때의 ‘감동’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김 회장이 준 것은 햄버거가 아니라 한국인의 정(情)이었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을 오간 1분의 만남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 필자가 김 회장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96년 가을이었다. 서울에 들른 김에 인사를 드리러 서울역 앞 대우그룹에 갔다. 밤 10시에 오라는 희한한 전갈을 받은 뒤였다. 현재의 서울 스퀘어빌딩은 당시 대우그룹 전체를 총괄하는 본사였다. 이곳 꼭대기 25층이 김 회장의 방이었다. 김 회장에게 올릴 세계 정세에 관한 리포트와 함께 밤 10시 직전 찾아갔다. 필자 혼자만의 약속이 아니었다. 대우 계열사 사장과 중역들이 회장실 앞에 늘어선 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서울에 온 김 회장의 결재를 받기 위해 한꺼번에 임원들이 몰려든 것이다. 오후 7시부터 계속된 결재 행렬은 이후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 필자가 김 회장에게 인사를 하러 들어간 시각은 새벽 1시20분쯤이었다.
   
   “중국에 갔으면 중국의 좋은 점을 보고 배워야지, 왜 시간 낭비를 하면서 쓸데없는 일에 매달리는가?” 당시 김 회장은 만나자마자 차가운 질책을 했다. 당황스러웠다. 마쓰시타정경숙의 총책임자인 오카다(岡田) 숙두(塾頭)가 한국에 들러 인사차 김 회장과 만났을 때 필자의 중국 행적을 보고한 듯했다. 당시 베이징대학 교정에 내걸렸던 천안문사태 관련 대자보 사진을 찍다가 현지 공안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질책과 함께 긴 침묵이 흘렀다. 곧이어 결재를 기다리던 다른 중역이 회장실로 들어왔다.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데 김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배우고, 항상 건강에 주의하고.” 1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천국과 지옥을 오간 기분이었다. 그후 대우는 외환위기의 파고 속에 산산조각이 났다. 김 회장은 온갖 파렴치범의 혐의를 뒤집어쓴 채 TV에 등장했다.
   
   병상의 김 회장을 생각하면 필자의 멘토 격인 크레타섬 출신의 그리스정교 신부의 말이 떠오른다. 음악, 미술은 물론 신학, 역사, 자연, 인문과학에도 조예가 깊은 신부님이다. 대화 중 실례를 무릅쓰고 왜 그리스가 유럽의 낙오자로 전락했는지 물어봤다. “그리스는 그리스 안에서는 안 보인다. 그리스 밖, 특히 선진국에 가면 그리스를 더더욱 잘 볼 수 있다. 2500년 전 그리스인이 남긴 철학, 과학, 신학을 보라. 현재 그리스 안에는 앙상한 뼈만 남아 있고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이 최대 수혜자가 된 상태다. 그리스는 우물과 같은 존재다. 주변의 메마른 목을 채워가는 과정에서 척박하고 살벌한 흔적만 남게 됐다. 나눠주고 알려주고 빼앗기는 것이 그리스의 운명이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언젠가 지구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를 나라가 그리스다. 그러나 기원전 그리스가 남긴 찬란한 역사는 지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인류와 함께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인류가 혼돈에 빠질수록 그리스 문명 문화의 빛이 되살아날 것이다.”
   
   “아테네의 부엉이는 어두운 밤일수록 더더욱 진가를 발휘한다”는 신부님의 말을 침묵에 빠져들고 있는 김 회장에게도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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