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님께서 직업혁명가로 평생을 국권 회복을 위하여 공을 세웠다면 그 속에는 시어머님 몫도 있다고 생각한다.” (일송 김동삼의 며느리 이해동이 쓴 ‘만주생활 77년’의 한 대목)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고등계 형사라면 읽어야 할 지침서가 있었다. ‘고등경찰요사’라는 이름의 책에는 일본 경찰들이 탄압했던 독립운동의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중 한 구절이 눈에 띈다.

“안동의 양반 고 이중업의 처는 대정 8년(1919년) 소요 당시 수비대에 끌려가 취조받은 결과 실명했고 이후 11년 동안 고생한 끝에 소화 4년(1929년) 2월에 사망….”

김락(金洛)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에 대한 기록이다. 1863년생인 그가 환갑을 앞둔 시점에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강윤정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을 따라 김락의 생애를 되짚어보았다.

김락은 경북 안동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이라고 불리는 의성김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내앞마을은 마을 안에서만 20명, 마을 출신까지 합하면 33명의 독립유공자를 낳은 곳으로 그 중심에는 백하 김대락이 있다. 김대락에게는 김효락, 김소락, 김정락 3명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이들의 자식, 그러니까 조카들은 모두 빠짐없이 함께 만주로 떠났다. 이들 4형제 가족 중에 건국훈장을 받은 유공자만 해도 5명에 달한다.

김대락에게는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나이 순서대로 김우락, 김순락, 김락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 남자 형제들에게만 붙이기 쉬운 돌림자 ‘락(洛)’을 여자 형제도 함께 썼다는 점이 이채롭다.

안동 유림에서 주된 역할을 하던 의성김씨 문중은 혼인을 통해 다른 문중과의 교류를 이어나갔다. 딸은 단지 ‘출가외인(出嫁外人)’이 아니었다. 의성김씨 문중과 다른 문중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 이 점은 내앞마을의 독립운동에서 특히 잘 드러나는데 김대락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결속력 있게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가 얽혀 있는 하나의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김락은 독립운동을 하던 친정을 떠나 역시 독립운동하는 가문의 자손과 결혼했다. 그의 남편 이중업은 퇴계 이황을 낳은 진성이씨 하계파 문중의 일원이었다.

이중업의 아버지 향산 이만도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죄인을 자청하며 단식으로 목숨을 끊은 독립운동가였다. 남편 이중업은 외국에 한국의 독립의지를 알리는 일에 앞장서 활동했다. 아들 이동흠과 이종흠 역시 평생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사위 김용환은 의성김씨 학봉종가의 종손으로 주변에서 파락호라 손가락질 받아가면서 군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들 모두가 사후에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어떻게 보면 김락에게 독립운동은 평생의 숙원이자 굴레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두 눈을 실명할 정도로 모진 고문을 받을 이유는 따로 있어 보인다. 여러 경로로 비춰볼 때 김락은 자신이 거주하던 안동 예안면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김락의 남편 이중업은 독립운동가의 서명을 받으러 다니느라 실종 상태였기 때문에 이중업의 행방을 묻고자 고문이 이뤄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고문의 강도가 무척 세다. 게다가 그가 체포된 것은 마침 예안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때와 맞물린다. 아마도 김락은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김락의 친정과 시댁에 모두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이 있으니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해내려오기로 김락의 두 눈이 실명된 것은 고문 도중에 달군 인두로 두 눈을 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문 끝에 풀려나기는 했지만 김락의 여생은 여전히 가시밭길이었다. 남편 이중업이 독립청원운동을 준비하다 병사하고 차남 이종흠이 옥고를 치렀다. 누구보다 혹독한 삶을 살았지만 김락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남아 있는 사진도 없어 그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렵다.

김락의 큰언니 김우락은 먼 곳에서 눈에 띄지 않게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면 김우락의 독립운동은 명확히 독립운동이라 하기 어렵다. 여동생 김락처럼 앞에 나서 활동하지 않았고 경찰의 기록에 남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윤정 학예연구부장은 김우락과 같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역할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보훈처에서 확인할 수 있는 독립유공자 김락의 정보에는 등록된 사진조차 없다.
보훈처에서 확인할 수 있는 독립유공자 김락의 정보에는 등록된 사진조차 없다.

후방기지에는 여성이 있었다

김우락은 석주 이상룡의 부인이다. 독립운동 전반의 핵심 인물인 이상룡의 부인으로서 김우락의 삶이 평탄했을 리가 없다. 김우락의 아들 이준형은 만주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자결했다. 손자 이병화는 만주에서 무장투쟁에 힘썼다. 독립운동가의 여동생이자 부인, 어머니이자 할머니로서 김우락의 삶은 어떠했을까.

손자며느리 허은은 1995년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라는 회고록을 펴냈다. 회고록에서 허은은 서간도에서의 삶을 되짚었다.

“군정서 회의로 항상 손님은 많았는데, 땟거리는 부족했다.… 삼시 세끼 준비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시집온 다음 해에 한번은 감기가 들었으나 누워서 쉴 수가 없었다.… 서로군정서에서는 의복도 모두 단체로 만들어서 군정서 조직원들에게 배급해주었다.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중국식 검정 두루마기를 만들어 입도록 했다. 이 두루마기 한 벌을 받으면 다 해지도록 입곤 했다. 나도 그 옷을 숱하게 만들었다. 김동삼·김형식 어른들께 손수 옷을 지어 드렸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감개가 헤아릴 길 없다.”

남성 독립운동가들이 밖으로 나가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후방기지 역할을 한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잊기 쉬운 일이지만 독립운동은 수십 년에 걸쳐 지속된 것이다. 몇 번의 의거활동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난 일이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돼야 했다. 자금도 필요했고 자잘한 일을 도맡아하는 사람도 필요했다. 그 모든 역할을 여성들이 해냈다.

“총칼을 들고 독립운동 현장에 나선 남성들의 뒤에서 농사를 짓고 자금을 마련하는 일은 여성들의 몫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세금이 지나치게 많다’며 불평하는 여성들이 많다는 기록도 있다. 독립운동 시기 여성들이 단지 남성의 뒤에서 기다리고만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들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강윤정 학예연구부장은 김우락이 쓴 가사 ‘간운사’에는 독립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아쉬움도 보인다는 점을 짚었다. ‘이 몸이 남자라면 세계 각국 두루 놀아/ 천하 사업 다할 것을 무용(無用)한 여자라 애달프다’라고 읊은 대목에서는 독립운동에 대한 책임감이 엿보인다. 군자금을 마련하고 연락책이 되기를 자원한 남성 독립운동가처럼 김우락 역시 의복을 만들고 회합 장소를 제공하는 지원자로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김우락·김락 자매의 가계도가 달리 보인다. 기존의 시각으로 보면 김우락과 김락은 결혼 후 남편과 아들, 일가친척이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한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들이 독립운동에 주체적인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또 실제로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점을 놓고 다시 해석해보자. 그들 주변의 남성 독립운동가는 그들 덕분에 결합하여 독립운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김우락과 같이 잊힌, 혹은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 작업은 계속 진행 중이다. 김우락은 올해 내로 서훈 받을 예정이다.

내앞마을 출신으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은 김동삼의 며느리이자 만주에서 77년을 살다 겨우 귀국했던 며느리 이해동이 자신의 시어머니 박순부를 두고 한 이야기가 떠오르는 시점이다. 시아버지 김동삼이 직업 독립운동가였다면 시어머니 박순부는 그를 지원한 또 다른 독립운동가였다. 박순부는 남편 김동삼이 체포돼 감옥에 갇혔을 때 자의(自意)로 면회를 가지 않았다. 그의 독립운동 의지에 방해가 될 것 같다는 이유였다. 마냥 남편을 기다리며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의지로,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했던 게 바로 숨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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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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