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이상의 장기여행은 꼼꼼한 계획과 남다른 각오가 필요하다. ⓒphoto 셔터스톡
한 달 이상의 장기여행은 꼼꼼한 계획과 남다른 각오가 필요하다. ⓒphoto 셔터스톡

“40대까지 30억원을 모을 거다. 이후 반려자나 반려견과 함께 평생 해외를 떠돌며 여행만 할 계획이다.”

최근 만난 20대 청년이 필자에게 밝힌 장래의 꿈이다. 함께 있던 10여명의 남녀 젊은이 대부분 비슷한 말을 했다. 퇴직 시기와 목표 금액만 다를 뿐, 80% 이상이 ‘여행=인생의 목적’이라고 했다. 2019년 한국의 확실한 대세는 해외여행인 것 같다. 부모님께 효도하기, 어학 공부, 원화강세, 미세먼지에서 탈출 등 나라 밖으로 나가려는 이유도 많아 보인다.

지난해 해외여행을 떠난 한국인은 2870만명. 대략 한국인 5명 중 3명꼴이다. 2017년에 비해 8.3%가 증가했다. 이 숫자는 앞으로 한층 더 늘어날 것이다. ‘해외여행=외화낭비’로 보는 부정적 시각도 있지만, 긍정적인 부분이 더 많다. 명품 브랜드 구입을 위해 비행기를 타는 금수저들의 일탈을 논외로 할 경우, 해외여행은 한층 더 권장해야 한다. 행복은 인생의 의미이자 목적 중 하나다. 밖에 나가 배우고 비교하는 과정에서 행복지수도 한층 올라간다. 밖에 나가 많이 보고, 듣고, 느끼고, 먹는 것이 글로벌시대 행복의 제1조건이다.

해외여행객이 증가하면서 여행의 목적, 여행지, 스타일도 변화하고 있다. 한 달 이상 장기 체류는 최근 한국인들이 추구하는 해외여행 스타일 중 하나다. 눈요기 관광에서 벗어나 해외에 오래 머물며 머리와 가슴을 채우는 체험 위주 여행이다. 사진 찍기와 먹기로 바쁜 단기여행과 달리 한 달 이상의 장기여행은 꼼꼼한 계획과 남다른 각오가 필요하다. 처음 갔을 때는 흥분하겠지만, 에펠탑 인증 셀카도 한두 번이다. 세계적 대도시라 해도 대략 1주일 열심히 돌아다니면 무덤덤한 일상으로 변해간다. 한 달 이상 장기여행일 경우 첫 주의 흥분을 이어갈 나머지 3주 동안의 구체적이고도 특별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시험으로 치자면 주관식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격이다.

필자는 여행전문가가 아니다. 여행을 삶의 일부, 아니 대부분이라 믿고 실천하는 사람일 뿐이다. 사실 여행전문가라는 말 자체가 우습다. 여행은 인간의 본능에 기초한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본능을 전문으로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필자의 최대의 자랑거리지만 인생의 절반 정도를 여행으로 이어가고 있다. 30대 초반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125개국을 돌아다녔다. 대충 보면서 돌아다니는 ‘양(量)의 여행’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샅샅이 파헤치는 ‘질(質)의 여행’을 추구해왔다. 최근 10년간은 매년 6개월 이상 여행에 투자하고 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즉 ‘지금 당장을 즐겨라’라고 했던가. 필자 개인의 셈법이지만 유전자와 체력에 비춰 보면 앞으로 건강하게 살 날은 5000일 정도다. 짧은 인생이기에 더더욱 많이 보고 듣고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루하루 인생의 달력이 뜯겨나가는 상황에서 여행이야말로 인생의 목적이자 의미라고 믿고 있다.

일본식 한자로 ‘유의(流儀·류기라고 읽는다)’라는 말이 있다. 한국어로는 ‘유파(流派)’ 정도로 번역될 듯하지만 집단을 뜻하는 파(派)만이 아니라 개개인 차원에도 적용될 수 있는 예법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특히 ‘기(技)나 예(藝)의 영역에 관한 이해방식’이란 의미로도 통한다. 본능, 호불호 같은 감정적·주관적 요소가 아니라 교양이나 학습, 체험에 바탕한 나름의 스타일을 구축한다는 의미다. 단기여행의 대부분은 주마간산식 일정과 인증도장 찍기에 집중된다. 하지만 장기여행은 나만의 여행 유의, 스타일이 필요하다. 물론 세상 모든 것에 불변의 스타일은 없지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내린 결론이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장기여행 즐기기’는 크게 4가지로 압축된다. 필자 나름의 노하우에 바탕한 것들이다.

한 우물을 파라

첫째는 ‘한 우물을 파라’는 것이다. 정신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그냥 한군데 꾹 눌러앉아야 한다. 한 달 이상 한 도시에 머물면서 구체적으로 도시를 체험해야 뭔가가 남는다. 파리·로마에서 1주일, 리옹·보르도·피렌체·밀라노에서 3일 같은 여정이 아니라 파리나 로마에서 한 달 내내 체류하는 식이다. 낯선 도시에서 한 달씩 머물면서 뭘 할까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의외로 할 것이 많다. 예컨대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매일 출근해 마음에 드는 화가의 작품을 보고 또 보면 된다. 도대체 이 작품이 누가 어떤 시대적 배경에서 그린 건지, 공부도 하고 감상기를 적으면 하루가 후딱 간다.

한 도시에 오래 머물면 현지인들과 자연스럽게 접촉하면서 뭔가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현지 사정과 문화에도 통달하게 된다. 그 나라의 정치 상황은 물론 주차위반 벌금액수, 이민자 현황, 각종 공연 일정, 축구경기 일정까지 꿰게 된다. 점차 현지인화되면서 비로소 체류하는 도시에 소속감이 생긴다. 그 도시에서 제2의 인생이 펼쳐지는 마법을 경험하게 된다. 급기야 낯선 도시에서 뇌에 새로운 회로(回路)가 만들어지는 걸 느낀다. 50평생, 60평생토록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관과 관점이 생긴다. 나를 규정해오던 한국적 가치와 문화에 대한 상대적 비교도 가능해진다. 백미는 내 인생에 불쑥 뛰어드는 낯선 도시의 친구들이다. 필자의 경우 소셜미디어상의 친구들 중 10명 정도는 낯선 도시에서 서로 마음을 트고 사귄 현지 친구들이다. 필자가 자랑스럽게 내놓는 ‘글로벌 자산’이기도 하다. 물론 단 한 번의 장기여행으로 낯선 도시에서 제2의 인생 무대가 열리지는 않는다. 해를 바꿔가며 최소한 3번 이상 방문해 1년 정도의 시간이 녹아들어야 낯선 도시가 비로소 내 것이 된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여행객. ⓒphoto 뉴시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여행객. ⓒphoto 뉴시스

배움은 예의이다

어떻게 현지인과 마음 터놓고 친구가 될 수 있느냐고 궁금해할 것 같다. 자주 가는 카페나 술집에서 만난 사람과의 대화는 기본이다. 필자의 경우 체육관이나 레스토랑, 교회 등이 주된 ‘현지화’ 장소다. 낯선 도시에서 한 달짜리 체육관 회원이 돼 함께 운동을 하다가 현지인들만 아는 선술집에도 가고, 80대 노모의 생일파티에도 가봤다. 이때 현지인의 일상을 고려해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해진 시간에 체육관에 가고, 정해진 시간에 단골로 삼은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는 식이다. 언어가 문제라 하겠지만 고맙게도 글로벌 시대 영어는 만국공통어다. 영어에 자신이 없다고들 하지만 궁하면 통하기 마련이다. 물론 체류하는 나라의 언어에 특별히 관심을 가질 경우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언어를 익히는 데 노력을 기울이면 그 언어가 내가 머무는 도시 속으로 더 깊이 안내해준다. 작은 노하우지만 기억에 남을 만한 선물은 장기여행에 앞서 반드시 챙길 준비물이다. 장차 친구가 될 현지인을 위한 작은 정성이다.

둘째, 당연한 얘기지만 배우고 익히는 자세도 중요하다. 여행을 삶과 생활의 일부로 삼는 사람들에게 배움은 기본적인 예의다. 육신과 정신을 함께 성숙시키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해야만 한다. 공부 대상은 사실 세상만사다. 거창한 주제가 아니라도 된다. 현지의 요리방법이나 와인 마시는 법도 좋은 공부 대상이 될 수 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기, 매일 일기 쓰기, 거리의 홈리스에게 1유로를 던져주는 마음가짐도 타성에 젖어 있던 생활습관과 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호기심으로 세상사를 공부하려는 사람에게는 좋은 출발점이다.

장기여행에 앞서 현지 사정이나 역사, 문화에 대한 공부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여행의 맛은 가기 전의 알찬 계획에 달려 있다. 치밀하게 준비할수록 현지의 1시간, 하루를 알차게 보낼 수 있다. 배운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느끼게 된다. 사실 현지에서는 이미 공부한 것을 확인하는 수준에 그치게 된다. 해외여행 중인 한국인을 보면 들고 다니는 책이 거의 비슷하다. 그러면 전부 똑같은 곳에 가서, 비슷한 체험만 할 뿐이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나만의 경험을 위해서는 더 깊은 사전 공부가 필요하다. 피상적인 여행 책자가 아니라 외국 신문·잡지에 실린 여행기 읽기에 도전해보는 것도 공부의 깊이를 더하는 좋은 방법이다. 영어 실력이 달리면 인터넷 구글 번역기라도 열심히 돌려보면서 색다른 정보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한국인으로 북적이는 레스토랑보다 현지인만 다니는 숨겨진 곳에서의 식사가 한층 더 기억에 남는다. 결국 크게 보면 공부를 통한 내면 수양이 장기여행의 목적일 듯하다. 환경 변화와 자극을 통해 성숙된 인간으로 나아가기 위한 공부다.

‘저녁이 있는 삶’이 화두가 된 한국이지만 해외에 오래 머물 경우 ‘새벽이 있는 삶’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것도 필자의 견해다. 꼰대 스타일일지 모르겠지만 자아를 발견하는 최적의 시간은 저녁이 아닌 새벽이다. 외국에 오래 머물 경우 취하고 즐기는 저녁보다, 배우고 익히며 반성하는 새벽 시간이 한층 더 중요해진다. 이 시간에 내가 하루 동안 익히고 배울 특별한 테마를 집중적으로 찾을 수 있다. 현지의 식물, 향수, 교회 모자이크, 원두커피 모두 공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자신이 익힌 내용을 인터넷에 올려 공유하는 것도 공부에 속한다. 필자의 경우 올해 공부 테마는 두 가지다. 이미 훑은 80여개 고대 그리스 도시(Polis) 속 피난처인 아크로폴리스 등정과, 16~17세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남긴 성화(聖畫) 속 예수 변천사에 관심을 쏟고 있다. 답도 없고, 결론도 없는 사안들이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테마들이다.

고독을 친구하라

세 번째는 고독이다. 단절된 고립(Isolation)이나 사람을 그리워하는 외로움(Loneliness)이 아니라 창조적 고독(Solitude) 속에서의 여행이다. 혼자 나아가라는 말이다. 몸과 마음이 통하는 부부나 연인 간 여행은 예외겠지만, 가능하면 혼자서 느끼고 배우는 여행이 중요하다. 동행객이 많아질수록 본능·주의력·호기심의 강도도 약해진다. 많이 몰려다닐 경우 물건을 잃어버릴 가능성도 높아진다. 주의력을 높이고 주변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도 단신여행을 권한다.

한 도시에서 나만의 색깔과 취향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커피나 와인 같은 것이 좋다. 한 도시의 독특한 커피와 와인에 빠지면 다시 찾고 싶은 확실한 이유가 된다. 한 도시를 떠올리면 그 도시에서 반드시 사야 할 나만의 취향 목록이 함께 떠오른다. 그곳에서 구입한 내 취향을 친구들에게 나눠주는 것도 즐거움이다. 음식 만들기도 마찬가지다. 단골 레스토랑 식사도 몇 번 하면 질린다. 장기 체류할 때는 호텔이 아니라 민박 스타일의 숙소를 잡아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어야 몸과 마음이 살찐다. 필자의 경우 부엌칼, 프라이팬, 간장 등은 기본 소지품이다. 음식은 현지인과 교류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란 점에서도 중요하다.

아날로그로 돌아가라

마지막으로 장기 해외여행에 나서면서 이참에 디지털 중독에서 벗어나 아날로그 여행을 해보자는 각오를 다져보자. 쉽게 말해 모바일 기기가 없는, 아예 없애지는 못한다면 가능한 멀리하는 여행이다. 해외여행에 나선 한국인들을 보면 모바일 기기를 달고 다닌다.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도 한국의 지인들과 문자를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다. 소셜미디어로 연결된 모바일 기기는 해외여행의 신선한 자극을 감소시키는 최대의 적이다. 해외여행을 가서도 모바일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너무 비참하다. 길을 잃어버릴까 구글맵을 사용하는 사람도 많지만, 걸어가다 틀리면 되돌아가는 아날로그식 길 찾기도 나쁘진 않다. 방향과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감의 안테나가 120% 발동하기 때문이다. 을지로 좁은 골목길보다 10배, 100배 더 헤매는 곳이 베니스의 미로다. 헤매다가 다시 똑같은 장소로 돌아오는 것은 보통이다. 그렇지만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걷는 것이 좋다. 여행 중에서나 가능한 ‘일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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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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