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전경.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전경.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의 오래된 번화가 상가 건물이 비어가고 있다는 얘기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2000년대 들어 서울의 중심상권으로 떠오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일대도 마찬가지다. 가로수길은 서울 지하철 3호선 신사역 8번 출구에서 200여m 지나 시작돼 현대고등학교 맞은편까지 이어지는 700여m의 4차선 도로 양쪽 지역을 가리켜 부르는 말이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유명 연예인들까지 몰려드는 고급스럽고 세련된 번화가였지만 지금은 다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도는 곳이다.

여전히 가로수길에는 글로벌 IT 기업 애플의 애플스토어나 삼성물산의 패션 브랜드인 에잇세컨즈, 세계적인 의류 브랜드 타미힐피거나 망고 같은 브랜드 매장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더 눈에 띄는 것은 텅 비어 있는 1층 상가들이다.

가로수길 초입부터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 1·2층 상가에도 비어 있는 공간이 보인다. 조금 더 걸어가면 아예 통째로 비어 주인을 기다리는 건물이 두 곳이나 나온다. 곳곳에 ‘임대문의’ 현수막을 내걸고 비어 있는 1층 상가 중에는 아예 ‘무권리’를 조건으로 내건 곳도 있다. 권리금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로수길 인근에서 30년 동안 영업해왔다는 한 공인중개사에 따르면 통째로 빈 건물은 벌써 1년 넘게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골목 하나만 들어가도 임대료가 반값인데 웬만한 자영업자들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죠. 대신 가게들이 골목으로 뻗어나가는 모양새입니다.”

가로수길 이면도로를 두고 ‘세로수길’이라고 부른다. 그보다 더 안쪽의 골목은 ‘나로수길’이다. 가로수길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이런 골목 곳곳에 자영업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서울 이화여대 앞 골목 ‘파파노다이닝’과 황병률 대표.
서울 이화여대 앞 골목 ‘파파노다이닝’과 황병률 대표.

젠트리피케이션이 아니라 구조변화다

지금까지는 이런 현상을 두고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고 불렀다. 지역 상권이 활성화돼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면서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가로수길뿐 아니라 전통적인 서울 번화가들은 모두 문제가 된다. 서울 종로, 신촌부터 심지어 강남역까지 1층 상가가 비어 있는 곳을 보며 ‘가파른 임대료 상승’에 대한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는 경제불황으로 설명한다. 경기가 침체되면서 소비심리가 줄었고 그에 따라 번화가 1층 상가들이 공실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목 좋은 자리에 있던 대기업 매장들은 매출 효율성을 이유로 자리를 떠났고, 규모를 키워 손님을 끌어모으던 자영업자들은 수지타산을 맞추지 못해 가게를 비웠다는 얘기다.

그러나 비어가는 1층 상가를 보면서 새롭게 짚어낼 것은 벌써 수년째 반복되고 있는 임대인과 임차인의 갈등, 장기화된 경제불황만이 아니다. 번화가가 사라지는 이유에는 다른 결정적인 요인이 있다. 번화가가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소비패턴의 변화, 창업방식의 변화 같은 구조적인 변화다. 1층 상가가 텅 비어가는 것은 부정적이거나 채워넣어야 하는 일이 아니다.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신호다.

서울 망원동의 샌드위치 전문점 ‘미아논나’.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망원동의 샌드위치 전문점 ‘미아논나’.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강남역 11번 출구의 몰락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약속 장소를 정할 때에는 주로 번화가의 랜드마크가 기준이 됐다. ‘강남역 11번 출구’ ‘종각타워’ 같은 곳에서 모였다가 약속 장소로 함께 이동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거의 모든 인구가 스마트폰을 쓰는 상황에서 손안에 있는 지도는 갈 길을 쉽게 안내해준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곧바로 만날 수 있다.

중심상권은 의미를 점점 잃어간다. 한때는 상가 위치를 정할 때 대중교통 거점과 얼마나 가까운지, 유동인구가 얼마나 많은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유동인구는 목적지를 정해놓고 지나가는 허수(虛數)의 사람들일 뿐 자영업자의 매출로 이어지지 않는다.

어떤 자영업자들은 일찌감치 변화를 감지했다. 그들은 번화가에서 창업하기를 꺼려했다. 2015년 지금은 ‘이화52번가’라고 불리는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앞 좁은 골목길에서 뜬금 없이 일식집 문을 연 황병률씨도 마찬가지다. 황씨의 가게 이름은 아버지의 주방이라는 뜻인 ‘파파노다이닝’이다.

“원래는 경기도 고양시에서 돈가스 전문점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딸이 이화여대에 합격하면서부터 가까이 있고 싶어 부근으로 가게를 옮기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황씨가 찾아낸 자리는 홍대입구역, 신촌역에 밀려 유동인구가 확 줄어든 이화여대 앞길 중에서도 유독 구석진 곳이었다. 당시만 해도 52번가 골목에는 옷가게 몇 곳만 영업 중이었다.

“이 골목에서는 처음으로 음식점을 연 거예요. 주변에서는 말렸죠.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고 그나마 있는 가게들도 개점휴업 중인 곳에 왜 들어가냐고요. 그런데 저는 대로변보다 골목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파파노다이닝이 추구하는 분위기에는 오히려 북적거리는 중심상권이 어울리지 않았다. 황씨는 비록 전통적인 상가 선택 방식, 즉 유동인구와 위치를 중시하는 것에는 어긋날지 몰라도 맛만 있다면 소비자가 어디든 찾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앞으로는 어디에 위치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운영하느냐가 중요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는 황씨의 생각은 옳았다. 식사 때가 되면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 중에는 멀리서 파파노다이닝 음식만을 먹으러 일부러 찾아온 사람들도 많다.

‘찾아가는 고객’이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건 소셜미디어 같은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하고 일상화되면서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 흔히 ‘망리단길’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번화가 인근에서 샌드위치 전문점 ‘미아논나’를 연 이새롬씨는 처음부터 “한적한 곳이 좋아서” 골목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이씨의 가게는 망리단길과도 떨어져 있다. 간판도 없이 주택가 한복판에 덩그러니 문을 열었기 때문에 처음 가는 손님들은 번번이 가게를 찾아 헤매곤 한다.

“제가 가게 문을 열던 2016년에는 ‘망리단길’이 막 활성화되던 시점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은 번잡하다고 생각했어요. 주변에서는 만류했지만 일부러 가게 하나 없는 주택가 골목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씨에게는 한 가지 믿는 바가 있었다. 가게를 내기 전에 이새롬씨는 인스타그램에서 샌드위치 전문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책도 출간했다. 이씨는 “제 샌드위치를 맛보고 싶어하는 손님들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이씨의 미아논나는 아는 사람은 아는 ‘명소’가 됐다. 해외에서도 일부러 찾아온다고 한다. 망리단길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아논나 샌드위치를 먹기 위해서 망원동을 찾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서울 서대문구 지하철 2호선 이대역 앞 대로변의 공실 건물.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서대문구 지하철 2호선 이대역 앞 대로변의 공실 건물.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골목에서 이뤄지는 가치소비

파파노다이닝과 미아논나는 이제 소비자들이 어떻게 소비를 결정하는지 알려주는 좋은 사례다. 온라인 쇼핑이 오프라인 쇼핑을 대체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2017년 온라인 쇼핑몰 판매액은 61조원을 넘어 전년도에 비해 13% 넘게 증가했다. 반면 백화점과 대형마트는 30조원이 못 되는 판매액을 기록했다. 심지어 우유 하나를 사더라도 스마트폰을 몇 번 클릭해 주문하는 상황에서 오프라인의 소비는 일정한 목적성을 가지고 이뤄진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 원장의 설명이다.

“소비패턴의 변화로 중심상권이 몰락하고 있다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이 아닙니다. 젊은층이 중시하는 키워드를 떠올려봅시다. 가성비, 체험, 다양성 같은 키워드는 어디나 비슷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 이른바 중심 상권에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요즘 소비자들은 목적을 가지고 매장을 방문한다. 그렇지 않으면 온라인으로 해결할 수 있는데 굳이 오프라인까지 진출할 필요가 없다. 그저 교통이 편리하기 때문에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즐길거리, 볼거리가 있어야 방문한다. 그저 교통이 편리하기 때문에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 방문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찾아간다.

돌아다니며 살 물건을 찾는 것이라면 대형 쇼핑몰을 방문하면 된다. 대형 쇼핑몰은 예전에 지하철역 앞을 서성거리던 사람들을 실내 공간으로 끌어들였다. 예전의 종로거리보다 더 편하게, 소비자들은 먹을거리도 살거리도 한 장소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 소비자들이 굳이 종로를 찾지 않을 것임은 쉽게 알 수 있다.

대신 골목이 소비자들에게 가치를 전달한다. 서울 종로구 익선동은 오래된 한옥이 가져다주는 정취로 소비자들에게 ‘잊어버린 것’을 떠올리게 한다.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에 젖고 싶은 소비자들이 익선동을 찾는다. 또는 한적함을 전달해주기도 한다. 망원동의 샌드위치 전문점 미아논나처럼 주택가 한가운데 뜬금없이 존재하는 ‘셰프의 작은 집’은 안락함과 안정을 제공해준다. 소비자들은 맛과 분위기를 찾아 스마트폰의 지도 앱을 켜고 골목골목 매장을 찾아나선다.

기업들도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명품거리로 유명한 서울 강남구 청담동 일대에서 명품 브랜드 매장이 철수하면서 대형 쇼핑몰에 입점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아웃도어 브랜드 ‘블랙야크’는 지난 1월 강남구 압구정동 인근 골목에 플래그십스토어 ‘나우하우스’를 개장했다. 브랜드의 이미지에 맞는 복합체험공간처럼 꾸민 플래그십스토어는 보통 중심상권에 자리 잡는다. 브랜드를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우하우스는 골목에 자리 잡았다.

“단순히 더 많은 사람에게 브랜드를 알린다기보다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를 제대로 전달하자는 의미에서 복합문화공간을 열었습니다. 그러니 대로변보다는 골목길이 나우하우스에 더 잘 맞겠지요. 요즘 소비자들이 추구하는 ‘가치소비’를 구현하고 싶었습니다.”

블랙야크 관계자의 설명대로 골목은 가치를 전달한다. 소비자들은 소비의 목적을 가지고 일상처럼 지나가는 대로변이 아니라 골목을 찾는다. 만약 어느 골목이 기존의 대로변처럼 번화가가 되어버린다면 그보다 더 깊은 골목으로 소비자들은 찾아갈 것이다. 서울 용산구 경리단길이 지고 남산 아래 후암동과 소월길이 뜨는 것이 한 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중심상권의 ‘몰락’은 단순히 젠트리피케이션 때문도 아니고 경제불황 때문도 아니다.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기존의 번화가를 하나씩 짚어가며 공실이 늘어난다는 우려를 반복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다만 “‘골목상권’이라는 말 역시 인위적으로 조성된 번화가”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골목상권’에 먼저 입주한 상인들은 인위적인 ‘골목살리기’ 정책이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파파노다이닝의 황병률씨는 4년 넘게 골목의 터줏대감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그간 ‘청년 창업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골목을 찾았던 청년들은 거의 골목을 떠났다.

인위적으로 조성된 골목상권은 필연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굳이 인위적으로 골목상권을 만들어내지 않더라도 지금의 소비패턴 변화라면 자영업자들이 골목으로 진출하는 것은 더 잦고 자연스럽게 일어날 일처럼 보인다.

서울 강남구 가로수길의 공실 건물.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강남구 가로수길의 공실 건물.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기술이 소비자와 자영업자를 연결하다

자영업자들이 골목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은 ‘기술’에 있다. 예를 들어 ‘배달의민족’이나 ‘요기요’ 같은 배달앱은 골목을 안정시키는 요인 중 하나다. ‘배달의민족’ 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 관계자는 “골목에 숨겨진 맛집을 찾아내는 것은 배달앱으로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소비자들에게는 골목 맛집은 신선한 경험을 선사하는 곳입니다. 골목 맛집은 신선한 경험을 하고 싶은 소비자를 기다리고 있지만 늘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배달앱이 자영업자와 소비자의 연결고리가 되어주면서 살아난 골목 맛집이 많습니다. 실제로 자영업자 무료 교육 프로그램인 배민아카데미에 참석한 자영업자 중에는 배달앱 사용 후에 매출이 수배, 수십 배 늘어났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무리 소비자의 소비패턴이 변화한다 하더라도 소비자가 골목을 찾아가지 못하면 의미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소비자가 쉽게 찾아올 수 있도록 접근성을 키우는 보조 기술이 많다.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는 아주 먼 곳의 소비자까지 끌어들인다. 배달앱은 가깝지만 발견하기 힘든 자영업자를 소비자와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마켓컬리’ ‘헬로네이처’ 같은 온라인 신선식품 유통업체 역시 시공간을 뛰어넘어 소비자와 자영업자를 연결시켜준다.

자영업자의 입장에서는 굳이 대로변, 중심상권을 고집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매출을 늘릴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셈이다. 오히려 골목에 자리 잡은 이들에게 중심상권으로 옮길 의향을 물어본다면 거절하는 경우가 더 많다. 서울 마포구에 있는 한 유명 브런치집도 마찬가지다. 중심상권에서 벗어나 유동인구가 적은 거리에 자리 잡은 이 음식점은 전국 각지는 물론 일본과 미국, 프랑스 같은 외국에서 찾아오는 손님들로 붐빈다. 프랜차이즈 사업이나 확장 이전에 대한 권유를 수없이 받지만 그때마다 거절한다는 것이 음식점 대표의 이야기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손님들에게 최상의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서 시작한 가게입니다. 제 깜냥을 알고 있는 만큼 그 이상의 무리한 확장은 하지 않으려고 해요.”

‘미아논나’의 이새롬 대표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조용한 나만의 공간, 손님들과 살갑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원했기 때문에 장사가 잘된다고 이전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골목은 자영업자와 소비자의 가치를 대변하는 상징 같은 공간이다.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만의 것’을 소중하게 여기며 성공보다 행복감을 더 중시하는 세대에게 골목은 중심상권보다 더 매력적인 곳이다. 고종완 원장은 “앞으로는 중심상권은 흩어지고 골목골목에서 소비가 일어나는 일이 더욱 잦아질 것”이라며 “골목 혹은 대형 쇼핑몰로 소비패턴이 양극화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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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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