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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버스토리] 김일성 소련 ‘붉은군대’ 이력서 단독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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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치
[2551호] 201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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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김일성 소련 ‘붉은군대’ 이력서 단독입수

중국공산당 입당 보증인 ‘이청산’은 누구…

29세 김일성의 ‘붉은군대’ 이력서
16개항 경력 관련 질문에 답변
북한 김일성 주석이 만주에서 소련으로 월경한 직후인 1941년 1월 소련 공산당의 심사를 받는 과정에서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력서를 주간조선이 단독 입수했다. 권력을 잡은 후인 1990년대 발표된 김일성 회고록(‘세기와 더불어’)은 있지만 빨치산 활동기에 작성된 김일성의 이력서가 공개된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다. 김일성은 이 이력서가 작성된 지 약 1년6개월 후인 1942년 7월 소련 ‘붉은군대’에 입대한 뒤 대위로 전시(戰時) 특별 임관됐다.
   
   B4용지 1.5장 분량인 이 문건의 내용은 김일성의 경력 사항에 대한 질문과 답으로 구성돼 있다. 질문은 소련 공산당 간부가, 답은 김일성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질문은 중국어 간체자, 답은 한문 번체자로 표기돼 있다. 이 문건은 러시아 사회정치사 국가문서보관소(Russian State Archive of Socio-Political History)에 ‘절대비밀’(우리식으로 2급 비밀에 해당·1급은 ‘극비’)로 분류·보관돼 있다가 지난해 말 러시아인 김일성 연구자의 기밀해제 요청이 러시아 정부에 받아들여지면서 공개됐다.
   
   문서보관소에 ‘진지첸(김일성의 중국식 발음을 러시아어로 바꾼 뒤 한글로 표현한 것)의 개인 기록철’이라는 러시아어 제목으로 보관돼 있던 이 문건을 찾아낸 이는 러시아인 학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31). ‘소련 붉은군대와 북한 인민군의 연관성’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중국역사학과장인 아버지 콘스탄틴 째르치즈스키(54)와 함께 러시아 정부에 이 문건의 기밀해제를 요청했고, 러시아 사회정치사 국가문서보관소로부터 이 문건의 열람과 복사를 승인받았다. 그는 최근 주간조선에 러시아 사회정치사 국가 문서보관소의 직인이 찍힌 이 문서 사본과 원본 촬영 자료 등을 건넸다.
   
   이 문건을 검토한 국내 김일성 연구자들은 “김일성이 남긴 중국어, 한자 문건이 많지 않아 필적 대조가 쉽지 않지만 문답 형식과 내용으로 봐서 김일성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며 “날조, 과장된 북한의 기록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김일성 일대기 연구에 귀중한 1차 자료”라고 말했다.
   
   째르치즈스키씨가 제보한 문건에는 김일성의 이력서 외에 이 이력서를 바탕으로 소련 공산당 간부들이 김일성을 심사한 결과를 담은 문건도 포함돼 있다.
   
   한자로 ‘영도(領導) 인원(人員)의 이력표’, 러시아어로 ‘진 에르첸’(‘영도 인원’은 간부를 뜻함, 진 에르첸은 진지첸을 잘못 쓴 것)이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 문건은 1번부터 16번까지의 문답으로 구성돼 있는데 질문은 푸른색 펜으로, 답은 연필로 보이는 필기구로 작성돼 있다. 작성 일자는 러시아어로 ‘1941년 1월’이라고 표기돼 있다. 이때 김일성의 나이는 29세였다.
   
   

   조사표(한국어 번역)
   영도 인원의 이력표 진(김) 에르첸
   

   1 성명 김일성
   
   2 탄생지 조선 평양
   
   3 민족 고려
   
   4 교육 수준: 어디, 언제 교육을 받았나 중국 동북 지린성(吉林省) 지린시 유웬(毓文)중학교 퇴학
   
   5 가족이 하는 일, 현재 어디 있나? 없음
   
   6 1925~1927년 대혁명 때 어디서 일하고 있었나? (조직과 인명을 자세히 쓰세요) 없음
   
   7 언제 어디 어느 군대에 복무했나? 사령관은 누구였나? 빨치산 부대에 입대하기 전 1932년 봄에 중국공산당 동만주 특별위원회 동찰롱(童長榮)의 지시에 따라 구국군(왕덕림 王德林)에 입대하였고 선전가로 일하였다.
   
   8 언제 어디 어느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나? 어느 조직에 입당했나? 보증인은 누구인가? 1931년 펑톈성 안투(安圖) 중국공산당 조직에 입당하였다. 당 사업을 하러 파견을 신청하였고, 중국공산당 동만주 안투 조직에 가입하였다. 보증인은 이청산(李靑山)이다.
   
   9 당신은 일본, 만주국 또는 국민당 당국으로부터 체포나 탄압을 받았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자유를 다시 얻었나? 1929년에 국민당으로부터 지린시에서 체포당하였다. 지린에 5개월 동안 수감되었는데 증거가 없고 보증인들이 있어 석방되었다.
   
   10 당신을 당 사업과 빨치산 활동을 할 목적으로 만주로 파견한 자는 누구인가? 언제 파견했나? 연합군에서 얼마 정도 시간을 보냈나? 당신의 업무는 무엇이었나? 1932년에 중국 공산당 동만주 특별위원회는 나를 빨치산 부대에 파견하였다. 현재까지 나는 왕칭(汪清) 항일 빨치산 대대의 정치위원에 이어 제3연대의 참모장, 정치위원 제6사 사장, 제1연합군 제2방면군을 지휘했다.
   
   11 당신은 실수, 동요를 한 적이 있는가? 당으로부터 징벌을 받았는가? 누구로부터 언제 왜 받았는가? 없음
   
   12 당신은 다른 정당의 당원 또는 어느 종파의 일원이 아니었는가? 없음
   
   13 누가 그리고 언제 당신을 당 사업을 위하여 선택하였나? 군대 내 당 사업을 했다. 제1연합군 정치위원은 내가 당 위원회에 참가하고 당 사업을 할 것이라고 결정했다.
   
   14 당신이 하고 있는 당 사업은 현재에 어떻게 평가하나?
   
   15 이미 결혼했으면 배우자에 대한 정보를 쓰라. 부인은 조선 사람이다. 빨치산 부대에서 재봉사로 일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당원이다.
   
   16 상기에 필요한 질문 추가하라.
   
   코간 동지의 말씀에 따르면, 본 조사표는 1941년 1월에 작성되었습니다.
   

   민족은 ‘고려’, 부인은 ‘빨치산 부대 재봉사’
   
   문건에 기재된 1번부터 5번까지의 문답은 기본적인 인적사항이다. ‘성명/ 김일성(金日成), 탄생지/ 조선 평양, 민족/ 고려(高麗), 학력/ 중국 동북 지린성 지린시 유웬(毓文)중학교 퇴학, 가족/ 없다’ 등으로 적혀 있다. 인적사항의 일종인 배우자 관련 질문은 15번에 나오는데 김일성은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 ‘부인은 조선 사람이고, 빨치산 부대에 재봉사로 일하고 있으며, 중국공산당 당원’이라고 기재했다. 여기서 ‘부인’은 김일성의 첫 번째 부인인 김정숙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문건을 검토한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는 “당시 빨치산 부대에서 바느질을 하고 밥을 하던 인물 정도로 보는 것이 맞다”고 했다.
   
   이 문건의 내용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김일성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할 때 ‘보증인’이라고 밝힌 이청산(李靑山)이라는 인물의 존재다.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고, 어느 조직에 입당했으며, 보증인이 누군지’를 묻는 8번 항목에서 김일성은 ‘1931년 펑톈성 안투(安圖) 중국공산당 조직에 입당했고, 당 사업을 하러 파견을 신청했으며, 중국공산당 동만주 안투 조직에 가입했고, 보증인은 이청산이다’라고 답했다. 김일성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할 때 보증을 선 사람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알려진 적이 없다. 북한은 초대 주석의 무결성을 입증하기 위해 김일성이 누군가에게 추천받았다거나 상위에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숨겨왔다. 김일성은 중국공산당 입당 후 조선노동당을 만들었기 때문에 문건대로라면 이청산이라는 인물이 김일성을 공산당에 최초로 가입시킨 인물이 된다. 이에 대해 한국현대사 연구자인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전 서울대 교수)은 “이 자료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북한의 공식 전기에 언급되지 않은 중공당 가입과 소련 측 검토를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성이 ‘1929년 중국 지린시에서 국민당군에 체포돼 5개월간 감금당했다가 풀려났다’는 것도 이 문건을 통해 새롭게 확인된 사실이다. 김일성이 1929년 무렵 수감됐었다는 사실은 그간 알려져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누구에 의해 체포돼 얼마나 수감됐었는지가 불분명했다. 김일성 공식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그가 1929년, 1930년 5월, 1931년 봄 등 수차례 체포됐었다고 밝혀왔다.
   
   김일성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서 빨치산 활동을 했는지도 이 문건에서 새롭게 드러난다. ‘당 사업과 빨치산 활동 목적으로 만주로 (당신을) 파견한 자가 누군지’를 묻는 10번 항목에서 김일성은 ‘1932년 중국공산당 동만주 특별위원회가 나를 빨치산 부대에 파견했고, 왕칭(汪淸) 항일 빨치산 대대의 정치위원에 이어 제3연대 참모장, 제6사 사장, 제2방면군에서 지휘를 맡았다’고 답한다.
   
   특히 김일성이 왕칭 항일 빨치산 대대에 파견되기 전에 ‘왕덕림(王德林) 부대 밑에서 일했다’고 스스로 밝힌 것도 주목된다. 7번 항목에서 김일성은 ‘빨치산 부대에 입대하기 전인 1932년 봄 중국공산당 동만주 특별위원회 당조직의 지시에 따라 왕덕림의 구국군에 입대했고 선전가로 일했다’고 밝힌다. 이 문건 발굴자인 째르치즈스키씨는 “구국군은 당시에 중국공산당이 아니라 국민당과 더 가까웠다. 그래서 김일성은 이 사실을 숨기고 싶어했고 자신이 구국군에서 활동했었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북한은 이 시기 김일성이 조선인 부대를 이끌며 독립적으로 항일투쟁을 했다고 선전해왔는데 이 조선인 부대가 왕덕림 부대 휘하에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만주에서 활동한 중국인 군 간부’ 정도로 알려진 왕덕림은 1938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 김일성(왼쪽 두 번째)이 허가이와 함께 소련 측 안드레이 로마넨코, 테렌티 스티코프와 의논하는 모습.

   보천보전투 경력은 언급 없어
   
   북한이 선전해온 1937년 보천보전투 경력이 이 이력서에는 언급돼 있지 않다는 점도 흥미롭다. 북한은 보천보전투를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의 대표 사례로 홍보해왔는데 김일성은 이 문건 어디에서도 빨치산 활동과 관련된 주요 경력을 묻는 질문에 보천보전투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신주백 한림대 연구교수는 “왕칭 대대 6사 사장으로 있었던 김일성과 보천보전투를 지휘한 김일성은 같은 인물로 보인다”고 했다.
   
   이 이력서의 답 부분을 김일성이 직접 작성했는지에 대해 이 문건을 검토한 국내 김일성 연구자들 대부분은 “자필일 가능성이 높다”고 답했다. 김일성 연구 권위자인 기광서 조선대 교수는 “정확한 필적은 필적 감정가가 대조해 봐야겠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김일성 주석 본인의 자필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도 “첫눈에 김일성의 필체로 보인다”며 “오른쪽으로 눕혀쓰는 특유의 필체가 젊었을 때도 그대로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고 말했다.
   
   소련공산당 간부들이 이 이력서를 검토한 후 작성한 의견서도 눈길을 끈다. 러시아어로 작성된 이 의견서는 B4용지 1장 정도 분량으로, 작성 일자는 1941년 3월 14일로 기재돼 있다. 문건에는 빌코프, 쥬진, 플르셰브스키, 코간이라는 4명의 분석가 서명이 있다. 이들은 ‘참고서’라는 제목의 의견서 말미에 ‘결론: 1. 진지첸을 만주 빨치산 부대에 정치 일꾼으로 남도록 한다. 2. 1929년 진지첸의 체포 관련 사유를 알아봐야 한다. 무슨 까닭으로 체포되었는지, 누구의 요구 혹은 누구의 보증으로 석방되었는지 (알아봐야 한다)’라고 적었다.
   
   이 문건을 발굴한 째르치즈스키씨는 이들 4명 모두가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국제공산당 서기장의 직속 소련 간부들”이라고 주장했다. 디미트로프 서기장은 사회주의 불가리아의 초대 지도자를 지낸, 당시 국제공산당 서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물이다. 반면 기광서 조선대 교수는 “이 문건에 디미트로프 서기장이 관여했다는 근거는 미약해 보인다”고 말했다.
   
   
▲ 러시아 사회정치사 국가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조사표’의 원본을 촬영한 것. photo 콘스탄틴 째르치즈스키

   소련 간부들 “체포 사유 알아봐야”
   
   이 문건의 성격에 대해서도 째르치즈스키씨는 “1941년 김일성이 국제공산당(코민테른)에 들어올 때 검증을 받았음을 의미하는 자료”라고 주장한 반면 기광서 교수는 “국제공산당은 입당에 있어 증명서를 발급한다든지 특별한 절차를 요하는 기구가 아니기 때문에 자국 영토에 들어온 김일성이 어떤 인물인지를 소련 공산당이 검토하는 과정에서 작성한 문건 정도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에 발굴된 김일성 이력서의 가치에 대해 전문가들은 “김일성 연구의 논란을 바로잡을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만주 독립운동사 연구의 권위자인 신주백 한림대 연구교수는 “공산당 간부의 검토에 거짓 내용을 적었다가 적발될 경우 엄청난 곤경에 처하기 때문에 이 문건에 기술된 김일성 본인의 이력은 사실이라고 봐야 한다”며 “대단한 가치가 있는 자료”라고 말했다. 기광서 조선대 교수도 “전반적으로 김일성과 관련해 알려진 사실과 크게 배치되거나 기존 연구를 뒤엎을 정도의 사실이 담겨 있지는 않다”면서도 “그간 학설이 분분했던 점들에 관해 논란을 정리할 수 있다는 면에서 의미를 갖는 자료”라고 말했다.
   
   그간 국내외 김일성 연구자들은 이른바 ‘가짜 김일성’ 논쟁을 벌여왔다. 2000년 작고한 이명영 성균관대 교수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투쟁 경력은 허구이며, 김일성과 항일 빨치산 운동을 한 김일성은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해왔다. 이에 따르면 만주의 전설적인 무장투사였던 김일성은 1937년 이미 전사했고, 이후 김일선(金一善)이라는 항일 무장대원도 따로 존재했는데, 북한이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 경력을 포장하기 위해 이들의 경력을 모두 김일성 1인에게 몰아넣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 이력서의 내용대로라면 김일성이 1930년대 중국공산당의 지휘를 받으며 빨치산 활동을 벌인 것은 사실로 보인다. ‘김일성 신화의 진실’ 저자인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는 “문건에 기술한 김일성의 활동 경력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3명의 김일성이 존재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 ‘조사표’를 바탕으로 소련 공산당 간부들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참고서’ 원본.

   참고서 (한국어 번역)
   
   진지첸, 조선인, 조선 출신, 헤이조(平壤)시, 중학교 퇴학, 지린시 중국 중학교에서 공부했음. 그의 아내가 조선인인데 빨치산 부대 재봉사로 일하고 있다.
   
   1941년에 작성한 이력서에 따라 1929년에 진지첸은 중국 당국으로부터 체포당하였고, 5개월 동안 수감돼 여러 사람의 요구 및 보증에 따라 석방되었다.
   
   펑톈성 안투(安圖)군에서 리칭상(李青山)의 추천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리칭상은 우리에게 모르는 사람이다.)
   
   1932년 봄 이전에 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만주에 잘 알려져 있고 현재 사망한 왕덕림(王德林) 장군의 영도 밑에 있었던 구국군(救國軍) 부대에 입대하였고 거기에서 선전가로 일하였다.
   
   1932년 동만주 특별 당위원회가 만주의 중국 빨치산 부대에 보냈다. 이때부터 제2군 왕칭(汪清) 빨치산 부대 정치위원, 제3연대의 참모장 및 정치위원, 다음에 제1통합만주항일군 제2방면군 지휘의 임무를 맡았다.
   
   진지첸이 자신의 이력서에 쓴 바와 같이 그는 아무 정치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고, 당적 징벌도 받지 않았다.
   
   
   결론:
   
   1. 진지첸을 만주 빨치산 부대에 정치 일꾼으로 남도록 한다.
   
   2. 1929년 진지첸의 체포 관련 사유를 알아봐야 함. 무슨 까닭으로 체포되었는지, 누구의 요구 혹은 누구의 보증으로 석방되었는지 (알아봐야 한다).
   

(서명) / 빌코프 /
   (서명) / 쥬진 /
   (서명) / 플르셰브스키 /
   (서명) / 코간 /
   1941년 3월 14일


   2개의 복사본은 인쇄됨.
   

   

   ‘김일성 이력서’ 발굴 학자가 재구성한 김일성 약력
   
photo 한국학중앙연구원

   1912년 4월 식민지 조선 평양 출생(본명 김성주)
   1919년경 중국 지린성에 이민
   1927년경 유웬중학교 입학
   1929년 5월 조선공산청년회 사건으로 체포, 5개월 동안 수감
   1931년 중국공산당 입당
   1932년 중국국민구국군 입대
   1932년 동북항일연합군 입대. 직위는 왕칭 항일 빨치산 대대 정치위원.
   이후 제3연대 참모장, 정치위원, 제6사 사장.
   1937년 6월 보천보 습격 지휘(제6사 사장 때로 추정)
   1940년 12월~1941년 1월 소련으로 탈출
   1942년 7월 소련 ‘노동자-농민의 붉은군대’에 입대. 계급은 육군 대위.
   직위는 극동전선 제88독립보병여단 제1독립대대 대대장
   1945년 9월 예멜리얀 푸가쵸프호를 타고 조선 원산에 상륙
   1945년 10월 14일 평양 군중집회에서 주민들 앞에 최초로 등장
   1945년 12월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책임비서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년 8월 북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
   1949년 6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0년 7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1966년 10월 조선노동당 총비서
   1972년 12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1974년 2월 아들 김정일을 후계자로 공식 임명
   1994년 7월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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