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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버스토리] 컨테이너에 방치된 ‘臨政 100년’ 임시정부 1호 청사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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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553호] 2019.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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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컨테이너에 방치된 ‘臨政 100년’ 임시정부 1호 청사 미스터리

인천항 컨테이너 속 건물의 정체는?

▲ 1994년 국내로 반입한 상하이 화이하이중루 329호 건물의 철거 전 모습. 이 건물 일대가 ‘바오캉리’다. photo 바이두
중국 상하이 황푸구 마당루(路)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사용한 청사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현 루쉰공원) 의거로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기 직전까지 사용된 청사로,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마지막으로 자리 잡은 곳이다. 상하이 임시정부를 수립한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가 가장 처음 자리 잡은 소위 ‘1호 청사’는 지금까지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지 않는다.
   
   1992년 한·중 수교 전부터 옛 외무부, 문교부 심지어 국가안전기획부 등 관계부처가 총동원돼 임정 1호 청사 확인을 위해 노력했으나 아직까지 명확한 위치는 특정되지 않고 있다. 답답한 상황은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 와중에 임정 1호 청사의 행방을 25년째 추적하는 한 재야(在野) 사학자가 있어 주목을 끈다. 상하이 임시정부연구소의 오광택(60) 대표다. 오씨는 “1994년 국내로 반입된 상하이 ‘바오창루(현 화이하이중루) 329호’ 건물이 임정 1호 청사”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오광택 대표는 1994년 해당 건물을 국내로 들여온 고(故) 오성환 청로(淸露·중국 러시아)유적사적발굴연구회 회장의 뒤를 이어 임시정부 1호 청사 발굴에 매진해왔다.
   
   
   임정 수립일 바로잡는 데도 일조
   
   오광택 대표는 임정 수립일이 기존의 4월 13일이 아닌 4월 11일이라는 자료를 발굴해 “임정 수립일을 바꿔달라”는 민원을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무려 10년간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 등 관련 기관에 지속적으로 제기하기도 했다. 결국 올해부터 임정 수립기념일이 4월 11일로 바뀌는 데 일조했다. 지난 4월 9일 만난 오광택 대표는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는 지금까지 임정 1호 청사를 못 찾은 것은 국가적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개탄했다.
   
   오 대표에 따르면, 25년 전인 1994년 고 오성환 청로유적사적발굴연구회 회장이 임시정부 관련 유적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철거자재를 상하이시로부터 기증받아 국내로 들여왔다. 컨테이너 28개에 달하는 막대한 물량이었다. 상하이시가 오성환 회장에게 임시정부 관련 유적을 선뜻 내어준 까닭은 이렇다.
   
   충북 청주 출신으로 목재사업을 하던 문화재수집가 오성환 회장은 1988년부터 청일전쟁 때 충남 아산만 일대에 수장된 청군 유해발굴 및 본국송환 작업에 나선다. 오 회장은 1970년대 후반부터 아산만에서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된 풍도해전(1894) 때 격침된 청나라 북양함대의 수송선 고승호 발굴사업을 벌여왔다. 그 와중에 아산만 인근에 청나라 수병들이 대거 매장된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청일전쟁 당시 막대한 군자금을 싣고 왔다가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에 의해 수장된 ‘보물선’ 고승호의 존재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 일대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민간에서 청일전쟁의 청병 유해발굴과 본국송환에 나섰다는 소식은 당시 외무부, 안기부 등을 통해 청와대에까지 보고가 됐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한·중 수교를 물밑에서 타진하던 노태우 정부로서는 중국 정부를 움직일 수 있는 좋은 소재였다. 하지만 당시는 한·중 수교(1992) 전이라 ‘민간 차원에서 추진하되 긴밀히 협의하라’는 지시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오 회장은 한·중 수교 전인 1989년부터 일일이 방문허가를 받아 중국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결국 이 과정에서 중국 측 관계자가 감사를 표하며 다른 제안을 해보라고 했고, 오 회장은 당시 철거 위기에 놓인 것으로 알려진 상하이 임시정부 관련 유적을 국내로 가져가겠다는 얘기를 하게 된 것이 발단이었다. 마침 상하이시는 지하철 1호선 부설에 착수해 지하철 건설에 방해가 되는 도심의 낡은 건물들을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도심 재개발에 들어가면 어차피 헐릴 낡은 건물을 생색내며 처리할 수 있었다. 이에 상하이시도 외사(外事)판공실 주도로 흔쾌히 협조하고 나섰다. 이후 중국 사회과학원, 중국 불교문화연구소 등으로 중구난방이었던 교섭창구는 상하이시 외사판공실로 일원화가 됐다.
   
   오광택 대표는 “당시만 해도 건물 폐자재의 중국 국외 반출이 불가하고 중국이 북한의 눈치를 보느라 우여곡절 끝에 1993년 말부터 1994년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군수물자를 실어나르듯이 컨테이너를 한국으로 반출했다”며 “이마저 처음에는 부산항으로 잘못 들어가서 인천항으로 다시 가져온다고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오성환 회장과 고향이 가까운 충남 공주 출신 오광택 대표가 임시정부 연구에 뛰어든 것도 이즈음이다.
   
   
▲ 1994년 기자회견을 한 고 오성환 회장(가운데)과 오광택 대표(왼쪽).

   상하이서 해체해 들여온 건물 2동
   
   앞서 관련 학자들의 자문을 거쳐 1993년 말부터 1994년 초까지 상하이에서 인천으로 해체해 들여온 건물은 모두 2개 동. 당시 해체된 건물의 주소는 현재 도로명으로 ‘루이진2루 22호’와 ‘화이하이중루 329호’였다. 임정 관련 자료에 등장하는 ‘진션푸루 22호’와 ‘바오창루 329호’가 각각 현재의 ‘루이진2루 22호’와 ‘화이하이중루 329호’로 바뀌었다고 봤다. 이 주소에 있던 건물을 철거한 벽돌과 목재, 기왓장 등 건축자재들이 컨테이너에 실려 인천항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간 사학계에서는 “프랑스 조계 진션푸루(지금의 루이진2루)에서 1차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렸다”는 기록을 근거로 임시정부 제1차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가한 현순 목사(건국훈장 독립장)의 거주지인 ‘진션푸루 22호’를 임시정부 1호 청사의 유력한 자리로 추정해왔다. 독립기념관이 1990년 상하이 현장조사를 다녀와 ‘대외비’로 작성한 문건에도 ‘진션푸루 22호’와 ‘화이하이중루 329호’는 임정 청사 관련 조사대상 6개 건물 중에 속해 있었다. 당시는 1992년 한·중 수교 전이라 기밀을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1994년 임정 1호 청사로 추정되는 건물의 ‘환국(還國)’ 소식에 당시 조선일보를 비롯 국내 언론들은 대서특필했다. 신문과 방송에서 대서특필하자 임정 1호 청사 복원에 써달라고 성금기부 의사를 밝히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하지만 국내로 들여온 건물의 1차 검증 과정에서 인천항에 들여온 ‘루이진2루 22호’가 변경 전 지번인 ‘진션푸루 22호’의 임정 1호 청사가 아니라는 것으로 결론이 나면서 제동이 걸렸다. 당시만 해도 해당 건물을 국내로 들여온 오성환 회장은 고(故) 이현희 성신여대 교수진의 연구용역 결과에 따라 ‘루이진2루 22호’ 건물은 ‘임정 1호 청사’, ‘화이하이중루 329호’ 건물은 ‘임정 요인숙소’라고 소개했었다. 하지만 1992년 한·중 수교 이전까지 공개적인 현장조사는커녕 지적도 같은 관련 자료 확보조차 여의치 않았던 상황에서 이뤄진 연구라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이후 오성환 회장과 오광택 대표 등이 사재를 털고 관련 유물을 저당 잡고 사채까지 써가며 관련 기록들을 재차 추적한 결과, 1994년 국내 반입 당시 ‘루이진2루 22호’에 비해 덜 주목을 끌었던 ‘화이하이중루 329호’가 임정 1호 청사일 가능성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오광택 대표가 ‘화이하이중루 329호’의 옛 지번인 ‘바오창루 329호’가 임시정부 1호 청사라고 보는 근거는 임정이 1919년 펴낸 ‘국제연맹 제출 조일(朝日)관계사료집’이다. 이 ‘사료집’ 제4권에는 “임시사무실을 법계(法界·프랑스 조계) 바오창루 329호에 정하고”라고 기록돼 있다.
   
   조일관계사료집은 안창호가 총재를 맡고 이광수가 실무책임을 담당한 ‘임시사료편찬회’가 펴낸 임정 최초이자 유일한 사료집이다. 상하이 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부가 작성한 ‘조선민족운동연감’에도 “독립임시사무소를 상하이 불조계(佛租界·프랑스 조계) 바오창루 329호에 설치”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밖에 ‘바오창루 모처’ 등지로 언급된 사료들도 많다. 이를 근거로 오광택 대표는 “바오창루 329호 독립임시사무소(임시사무실)가 곧 임시정부 1호 청사일 것”이란 주장을 펴왔다.
   
   이런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국내로 들여온 ‘화이하이중루 329호’ 건물에 대해서도 독립기념관 의뢰로 2004년 한시준 단국대 교수팀이 고증에 나섰지만 “‘바오창루 329호’와 현 ‘화이하이중루 329호’는 전혀 다른 곳이다”란 결론이 나면서 다시 미궁 속에 빠져버렸다. “1925년과 1932년 두 차례에 걸친 지번 변경이 있었는데, 국내로 들여온 ‘화이하이중루 329호’ 건물이 당시의 ‘바오창루 329호’ 건물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고증의 요지였다. 현 화이하이중루 329호는 1932년까지만 해도 ‘바오창루 329호’가 아니라 ‘209호’였고, 지번이 변경됐던 1925년 자료는 아예 찾을 수조차 없다는 것이 조사팀의 결론이었다. 조사팀은 “국내에 반입해온 건물(화이하이중루 329호)의 자재가 ‘바오창루 329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 밝혀짐에 따라 2, 3단계 조사는 불필요하게 되었다”고 결론 내렸다.
   
   
▲ 건물 철거 때 수거된 ‘바오캉리’ 석판. 인천항 컨테이너 속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컨테이너에 ‘바오캉리’ 석판이 있다
   
   결과적으로 인천항 보세창고의 건축 폐자재들 역시 졸지에 ‘보물’에서 ‘폐물’로 둔갑해버렸다. 오 대표에 따르면, 당시 진위 여부만 확인되면 컨테이너 적치장 사용료는 물론 해당 건물의 복원비까지 내겠다고 자처한 모 그룹 회장도 있었다. 오광택 대표는 “오성환 회장은 당시 보고서를 보고 충격을 받아 화병이 나서 이듬해인 2005년 세상을 떴다”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주간조선 취재 결과 인천항에 보관 중인 건물 폐자재가 단순히 ‘폐물’이 아닐 가능성이 다시 대두됐다. 상하이에서 인천항으로 반입된 철거건물의 폐자재 속에 ‘바오캉리(寶康里)’라는 석판이 포함돼 있음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상하이의 옛 주택은 ‘리(里)’라고 하는 주소를 썼고, 주택들이 다닥다닥 줄지어 늘어선 골목길 입구의 석고문(石庫門)에 표기를 하는 경우를 지금도 흔히 확인할 수 있다. 복원된 상하이 황푸구 마당루의 임시정부 청사의 주소도 ‘마당루 푸칭리(普慶里) 306롱(弄) 4호’다. 당시 프랑스 조계의 도로명 주소와 상하이 특유의 ‘리롱(里弄)식’ 주소 체계를 혼합해 쓴 표현이다.
   
   미주 한인들이 발행한 ‘신한민보’ 등에는 임정의 주소를 ‘상해(상하이) 법계(프랑스 조계) 보창로(바오창루) 보강리(바오캉리)’로 쓰는 한글 표현이 등장한다. 오광택 대표는 “건물 철거 때 인부들이 ‘바오캉리’ 석판을 떼내다가 손을 크게 다쳐 오성환 회장이 직접 붕대를 감아줬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바오캉리 석판은 지금도 인천항 컨테이너 속에 들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화이하이중루 329호’ 건물은 1994년 철거돼 한국으로 들어오기 직전까지 ‘바오캉(寶康)백화상점’이란 소형 잡화점으로 쓰여왔다. 건물 폐자재들을 보낸 상하이시 루완국제교류중심 측은 “루완구(현재 황푸구로 통폐합) ‘바오캉리’ 인근에 있던(원 바오창루 329호) 바오캉백화상점의 철거 건축재료”라는 증명서까지 보내왔다. 2층 높이의 철거 전 건물의 모습은 독립기념관에서 펴낸 ‘월간 독립기념관 1989년 9월호’ 커버에도 실려 실물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건물의 바로 뒤편에 있던 주택 밀집지가 바로 바오캉리 1가(街), 2가였다. 상하이 루완구(현재 황푸구)의 또 다른 자료를 확인해도 해당 지역이 ‘바오캉리’로 광범위하게 통칭됨을 확인할 수 있다. ‘바오캉리’는 당시 상하이 임정 요인들의 집단 거주지로 각종 문헌 속에 등장하는 곳이다. 1990년 독립기념관 측이 현장조사를 벌여 ‘대외비’로 작성한 문건에는 임정 요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바오캉리 일대의 가옥번호까지 특정해 조사한 현황이 나온다. 가령 바오캉리 23호(이동휘), 27호(김구), 44호(안창호), 54호(이유필), 60호(신규식), 65호(김붕준), 68호(조성환) 등이다.
   
   당시 조사를 담당한 독립기념관 측은 “화이하이중루 도로와 인접된 연립주택으로 동서로 길게 연결되어 10여가구가 1개의 건물로 되어 있음. 현재 지하철 입구 광장으로 조성 계획되어 철거될 예정임. 건물 내부 조사 불능”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최고지도부가 집단거주 하는 베이징의 중남해(中南海)처럼 바오캉리가 임정 요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셈이다. 한시준 교수팀의 결론처럼 ‘화이하이중루 329호’가 임정 1호 청사는 아니더라도, 임정 요인들의 집단 거주지로 추정되는 곳의 입구 현판이 컨테이너 속에 들어 있는 셈이다.
   
   
▲ ‘바오캉리’ 석판이 붙어 있던 석고문. photo 상하이 임시정부연구소

   임정 요인 집단 거주지일 가능성
   
   바오캉리 일대는 1995년 상하이지하철 1호선 화이하이중루 구간 개통에 맞춰 헐렸고, 상층부는 루이안광장이란 오피스빌딩으로, 하층부는 태평양백화점으로 바뀌었다. 한동안 화이하이중루의 랜드마크였던 태평양백화점은 최근 2년간 리모델링을 통해 ‘신천지광장’이란 쇼핑몰로 재개관했다. 수년 전의 흔적조차 찾기가 어려워졌다.
   
   ‘바오캉리’ 석판의 존재가 확인된 만큼 인천항 보세창고에 무려 25년간 방치된 컨테이너를 개봉해서 재조사해볼 필요성도 제기된다. 2004년 조사를 맡았던 한시준 교수팀은 공식 조사보고서의 ‘향후 과제’에서 “큰 거리는 거리 이름과 호수가 많이 변하였지만, 롱(弄)이나 리(里)의 경우는 변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적시한 바 있다.
   
   1994년 인천항으로 들여온 건축물의 폐자재는 국내로 반입된 지 25년이 흐른 지금까지 컨테이너 상자 속에 방치돼왔다. 현재 컨테이너를 관리하고 있는 오광택 대표는 “상하이에서 한국으로 반출될 때 당시 도합 28개였던 컨테이너는 부산항에서 다시 인천항으로 옮기는 우여곡절 과정에서 2개의 행방이 묘연해졌고, 후일 2개를 정리해 합치면서 지금은 24개만 남아 있다”고 말했다. 지금 오 대표는 25년간 밀린 컨테이너 보관료 납부와 함께 컨테이너를 보세창고에서 빼라는 압력까지 받고 있다. 오 대표는 “그나마 인천본부세관과 한국관세무역개발원의 협조 덕에 25년간 지켜올 수 있었다”고 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서울 서대문형무소 옆에 국립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까지 지어 올리는 마당에 임시정부 관련 유적(바오캉리)이 들어 있는 컨테이너가 비바람 속에 놓여 있다.
   

   임정 1호 청사 추적이 어려운 이유
   잦은 정권교체 따른 도로명 변경이 혼란 초래
   

   상하이 임시정부 ‘1호 청사’의 정확한 위치 추적이 어려운 까닭은 해당 지역이 프랑스 조계, 왕징웨이(汪精衛) 친일 괴뢰정부, 장제스의 국민정부, 중화인민공화국을 거치면서 도로명과 주소가 끊임없이 변해왔기 때문이다. 논란이 되는 ‘바오창루(寶昌路)’의 경우 동쪽의 시장루(西江路)와 통합돼 ‘바오창루’란 이름이 붙은 뒤 샤페이루(霞飛路·1915), 타이산루(泰山路·1943), 린썬중루(林森中路·1945)로 이름이 계속 바뀌었다. 화이하이중루(淮海中路)란 현재의 이름이 붙은 것은 1950년이다. 국공내전 때 중국공산당 3대 전역(戰役)의 하나인 화이하이전역을 기념하는 뜻에서 1949년 중국공산당 집권 후 붙여진 이름이다. 길 이름의 가운데 ‘중(中)’ 자는 전체 길 중에 가운데(middle) 부분을 뜻한다.
   
   ‘진션푸루(金神父路)’의 경우도 황산루(黃山路·1943), 중정난2루(中正南2路·1946)라는 이름으로 바뀐 뒤 1950년에야 ‘루이진2루’란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도로 이름의 변화를 보면 이 지역의 흐름을 볼 수 있다. ‘샤페이루(Avenue Joffre)’와 ‘진션푸루(Route Pere Robert)’는 각각 프랑스 조제프 조프르 장군과 로베르토 신부의 이름을 딴 작명이다. 1943년 친일 왕징웨이 괴뢰정부가 프랑스 조계를 폐지하면서 타이산이나 황산 같은 명산의 이름을 도로에 붙였다가, 1945년 일제 패망 후 장제스 정부가 재집권하면서 린썬(전 중화민국 국가주석), 중정(장제스) 같은 정치인의 이름을 붙였다. 1949년 공산당 집권 후에는 화이하이전역, 루이진(중화소비에트정부의 수도) 같은 공산혁명 관련 이름이 도로명으로 붙었다.
   
   도로명이 수시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혼재해 표기한 흔적도 보인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은 이미 프랑스 조계 내 ‘바오창루’가 ‘샤페이루’로 이름이 바뀐 1915년에서 4년이나 흐른 뒤다. 하지만 당시 자료에는 이미 폐지된 ‘바오창루’라는 이름이 ‘샤페이루’라는 이름만큼이나 흔히 나온다. 당시 한인이나 중국인 입장에서는 입에 잘 안 달라붙는 ‘샤페이루’란 프랑스식 이름보다 한자식 ‘바오창루’란 이름을 흔히 썼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가장 최근인 2011년에는 복원된 임시정부 마당루 청사를 비롯해 임시정부 관련 주요 유적들이 속한 상하이시 루완구가 인근 황푸구와 통폐합돼 ‘황푸구’로 바뀌면서 관련 자료를 찾는 데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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