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인과 대화할 때는 ‘정치’ ‘종교’ 외에 주제로 삼지 말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자살 얘기다. 핀란드 정착 초기 친하게 지내던 한 핀란드 이웃이 있었다. 하루는 그가 친한 친구가 죽었다며 슬픔에 잠겨 있었다. 슬픔을 나눠보자는 생각에 친구가 어떻게 죽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질문을 못 들었다고 생각한 나는 눈치 없이 재차 물었다. 이번에도 그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냥…, 죽었다…”고.

그제야 나는 ‘혹시 자살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후에도 핀란드 사람들로부터 ‘자살’이란 단어를 직접적으로 들어본 적은 거의 없다. 핀란드인과 교류가 잦아지며 웬만한 핀란드 가정은 그 가족 구성원이나 친척 중 자살한 사람이 한두 명씩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에게 ‘자살’은 남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자신과 너무 가까운, 그래서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단어인 것이다.

핀란드에선 거리 곳곳에서 탱고를 배우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핀란드에선 거리 곳곳에서 탱고를 배우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산업화 과정서 자살률 3배 급증

핀란드는 20세기 내내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핀란드가 지리적으로 극지방에 인접해 겨울에 해를 보기 어렵고, 인구 밀도가 낮아 사람들 간 교류가 부족하여 고립감을 느끼기 쉬울 것으로 생각했다. 정치적으로는 주변 열강의 침입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경제적으로 위기가 여러 번 닥쳤다는 점도 높은 자살률의 원인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딱 꼬집어 그 이유를 얘기하지는 못했다. 특히 핀란드의 산업화와 도시화가 가속화되었던 1965년부터 1990년까지 25년 동안 핀란드의 자살 사망률은 3배나 늘어났다.

이렇게 한없이 치솟는 자살률로 국가적 위기의식까지 느낀 핀란드 정부는 1986년 세계 최초로 국가가 주도하는 거국적 ‘자살예방프로젝트’를 단행했다. 핀란드 정부는 자살을 국민 정신 건강의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생산노동인구를 감소시켜 국가경쟁력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프로젝트의 1단계는 자살자 1337명의 자살 원인을 자세히 밝히는 ‘심리적 부검(자살 전 자살자의 행동, 주변인물 심층 인터뷰 등을 통해 자살원인을 밝히는 작업)’을 실시한 것이었다. 사회·경제·개인적 요인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자살 원인을 정확히 알아내야 종합적인 자살 예방 대책을 세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전문가 5만명 동원 자살자 ‘심리 부검’

1986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6년간 학교·병원·사회복지기관·군대·교회 등 각계 각층의 전문가 5만명이 동원되어 1337명에 대한 심리적 부검이 진행됐다. 1992년 핀란드 정부는 심리적 부검 결과를 바탕으로 자살 원인을 유형별로 분류하고 자살 예방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이후 4년간 이 프로그램은 핀란드 전역에서 실행되었다.

핀란드 자살 예방 프로그램의 핵심은 자살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조기에 파악하여 빠르고 적절한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이다. 심리적 부검 결과에 따르면 자살자의 3분의 2 이상이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병원 기록에 따르면 이 중 불과 15%만이 우울증 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었고 나머지 대부분의 자살자는 자신이 우울증인지도 모른 채, 아니면 알더라도 적절한 치료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생애를 비극적으로 마무리했다.

핀란드 정부는 보건소나 일반 병원에서 정신과 환자가 아닌 일반 외래 환자라도 우울증이나 자살 충동 여부를 혈압이나 혈당 검사처럼 주기적으로 체크하도록 했다. 잠재적 우울증 환자를 적극적으로 발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자살자들은 대부분 자살 전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자살과 관련된 암시나 신호를 여러 번 보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살 예방 프로젝트를 이끈 마일라 우파넨 박사는 “만일 주변에서 그런 신호를 좀 더 주의력 깊게 읽어낸다면 사전에 자살을 막을 수 있다”고 밝혔다.

자살위험군 상담·약물 치료 병행

여러 경로를 통해 자살 위험군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파악되면 국가는 이들을 상대로 상담 치료와 약물 치료를 병행했다. 상담 치료를 받기 어려운 경우에는 약물 치료만을 시행했는데 약물 치료만으로도 환자의 우울증이나 자살 충동 등의 증세가 놀랄 정도로 많이 완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예방 프로그램에서 의학적 치료만큼 강조점을 둔 것은 ‘사회와의 접촉’이었다. 우파넨 박사는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 사회와의 접촉을 통한 소속감과 공감대 형성이 자살을 막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인 것으로 나타났다”며 “외롭고 공허함을 느끼던 사람들이 사회와의 접촉을 통해 ‘내 편이 있다’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핀란드의 대표작가 아르토 파실린나의 소설 ‘기발한 자살 여행’에는 버스를 타고 단체로 자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단체 생활을 통한 서로간의 교류를 통해 삶의 의지를 찾게 되고 어느새 ‘죽음’은 ‘삶’으로 바뀐다. 이 작가는 자살 연구학자는 아니었지만 무엇이든지(비록 자살여행일지라도) ‘함께’ 해 나갈 때 사람들이 삶의 의지를 되찾게 된다는 것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이 밖에 자살 예방 프로그램에서 중요시한 것은 언론의 자살 관련 보도 자제였다. 핀란드 자살 예방 프로젝트 위원회의 한 보고서를 보면 “자살은 마치 잔잔한 물 속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다”고 쓰여 있다. 한 사람의 자살은 큰 파문을 일으키며 주변을 흔들고 때로는 사회 전체도 흔든다. 더구나 자살자가 유명인일 경우에 그 파문은 더 크고 멀리 간다.

WHO도 핀란드 본뜬 모델 만들어

핀란드 언론기관도 자살 예방 프로그램에 협조하여, 이때부터 동반 자살 충동을 일으키거나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자살 관련 기사를 자제하고 있다. 핀란드 언론은 개인적 죽음과 관련된 보도에서 ‘자살’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자살과 관련된 구체적인 방법도 보도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1986년부터 1997년까지 10년 이상 지속됐던 핀란드의 자살 예방 프로젝트는 상당히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90년 10만명당 30명이던 핀란드의 자살률은 해마다 떨어져 2005년에는 10만명당 18명, 2008년에는 16.7명으로까지 떨어졌다. 세계 3위까지 올라갔던 자살국 순위도 13위로까지 떨어져 서유럽의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와 비슷한 수준이 되어 핀란드는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벗게 되었다.

핀란드 자살 예방 프로젝트는 인근 스칸디나비아 국가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10여개국에서 비슷한 프로젝트를 만드는 데도 큰 영향을 주었다. 세계보건기구(WHO)까지도 핀란드 모델을 본뜬 자살 예방 모델을 만들 정도로 대외적으로는 자살 예방 정책의 모범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핀란드 내부에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의견이 많다. 2007년 통계를 보면 자살은 여전히 핀란드인의 전체 사인 중 4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핀란드 청소년의 높은 자살률은 자살 예방 프로젝트에도 불구하고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 신문 논평에는 1990년대 말에 종결된 자살 예방 프로젝트를 다시 부활해야 한다는 의견이 자주 개진되고 있으며 어떤 학자는 이제 심리적 부검을 1000명대가 아닌 10만명 정도로 늘려서 더 자세히 자살의 원인을 분석해야만 자살률을 확실하게 잡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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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영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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