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강렬한 태양빛처럼 엄하지만 그 속심은 한밤중의 은은한 달빛처럼 부드럽고 자애로운 게 부정(父情)이다.

조선시대 아버지 10인의 편지

‘아버지만큼 제 아들에 대해 아는 이 없다’ 했다. 자식의 성품과 장단점을 가장 잘 아는 이가 아버지라는 의미일 터이다. 정민 교수와 박동욱 교수가 함께 엮어 만든 책 ‘아버지의 편지’(김영사)엔 조선시대를 풍미한 아버지 10인이 자식에 대한 솔직한 사랑을 표현한 다수의 편지들이 실려 있다. 이황, 유성룡, 박지원, 박제가, 김정희 등 내로라하는 당대 학자요 문인이요 예술가인 열 명의 인물들이 자식들에게 직접 써 보낸 편지들이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의 독자들이 봐도 자식을 향한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지대했었는지를 말해준다. 오늘날의 아버지가 갖는 자식에 대한 관심과 열정, 그리고 걱정과 염려가 수백 년 전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확인케 된다. 어떤 책을 읽어라, 이런 방법으로 해야 한다, 그저 읽기만 해서는 안 된다 등과 같은 아버지들의 주문과 요구는 끝이 없다. 때로는 공부의 방법을 찬찬히 일러주는가 하면, 때로는 자식의 나태함을 엄하게 꾸짖는다. 그리고 또 어떤 경우엔 멀리 떠나 있는 자식에게 전하는 늙은 아버지의 세심한 당부에서 애틋한 부정이 묻어난다. “네가 지금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으면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가서 한번 가면 뒤쫓기가 어렵다. 끝내 농부나 병졸이 되어 일생을 보내려 한단 말이냐? 천 번 만 번 마음에 새겨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1542년, 이황이 아들 준에게 공부에 열중하라고 보낸 편지내용의 일부이다.

“‘3경까지 자지 않으면 피가 심장으로 돌지 않아 초췌해진다’고도 했다. 나아감이 빠르면 물러남도 신속한 법이다. 꾸준히 그만두지 않고 해서 유익한 것만 못하다. 기운을 헤아려가며 해서 근심을 끼치지 않도록 해라.” 유성룡이 세 아들에게 전한 편지의 한 대목에는 자식들이 밤늦도록 공부하는 것을 은근히 대견해 하면서도 자칫 지나쳐 건강을 해칠까 염려하는 심정이 엿보인다. 공부는 서둘러 하는 것이 아니며 꾸준히 쉬지 않고 하는 것이라는 사랑과 충고가 담겨 있다.

케니 켐프의 ‘아버지에게 가는 길’

최근 번역 출간된 ‘아버지에게 가는 길’은 평범한 우리 모두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잔잔한 감동을 주는 책이다. 1999년 ‘라이터스 다이제스트’가 후원하는 전미 최우수 자비출판도서상을 수상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영화제작자이기도 한 케니 켐프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이 책에서 저자는 자질구레하다 싶을 정도로 아버지와 함께 했던 일련의 크고 작은 기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우리 앞에 조용히 펼쳐 보인다. 거기서 우리는 전혀 특별하지 않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아버지의 꿈과 삶과 죽음을 만난다. 어떤 대목에서는 잔잔한 미소를, 그리고 또 어떤 대목에서는 어느새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게 한다. 이 책이 전하는 감동은 극적인 소설이나 드라마가 제공하는 그런 유형의 감동과는 거리가 멀다. 내게서,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언제나 겪고 보고 듣는 그런 지극한 일상이 자아내는 감동이다. 나와 다른 어떤 특별한 사람의 아버지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내 아버지의 얘기이며 내 친구 아버지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리처드 폴 에반스는 “아무도 몰라주는 영웅, 우리의 아버지들에게 바치는 가슴 뭉클한 찬사”라며 이 책을 높이 평가했다.

한편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특히 요즘처럼 한 자녀만을 둔 상당수 가정에서의 아버지는 그야말로 어떤 존재일까. 과거의 아버지가 지녔던 엄하고 권위적인 아버지가 아닌 오히려 친구에 가까운, 아니 아예 망가진 모습도 불사하는, 그래서 때로는 초라하고 측은해 볼품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그런 아버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아동문학가 노경실의 베스트셀러 ‘우리 아빠는 내 친구’(시공사)를 보면 남 얘기 같지 않다. 노경실은 때로는 강한 척해 보이려고 무진 애를 써보지만, 돌아서면 혼자서 깊은 숨을 호흡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하는 오늘날의 평범한 아버지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그는 우리 어린이들의 아버지를 무겁게 그리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코믹하고 명랑한 개성을 한껏 부여해 오히려 친근감을 이끌어낸다. 콧구멍은 뻥 뚫렸고, 엉덩이는 오리 엉덩이지만 학교 다닐 땐 늘 1, 2등이었고, 군대 얘기하면 태권도 유단자라고 말하는 아버지이다. 송편을 먹은 뒤 아버지와 자녀가 배 깔고 엎드려 소리내어 함께 읽으면 딱 안성맞춤일 책이다.

예순 살 아들의 고백 “아버지, 참 좋았다”

‘아버지, 참 좋았다’(비타베아타)도 시선을 끈다. 정치인 원혜영의 자전 에세이다. 그간 정치인들이 선보인 책들을 보면 대부분 자신의 정치역정이나 그와 관련된 가치, 신념 등을 담아냈다. 그것들에 견주면 이 책은 더욱 도드라진다. 원혜영 의원이 자신의 정치이력에 대한 목소리보다는 올해로 아흔일곱이 된 노부(老父)와의 관계에서 울려 나오는 사적이고도 은밀한, 그래서 더욱 사람냄새 나는 진솔한 감동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원 의원은 20대는 민주화운동으로 보냈고, 30대는 풀무원 식품을 창업해 사업을 하며 보냈고, 40대부터 지금까지는 정치를 해오고 있다. 이 책을 펼쳐 읽으면 가슴에 와 남는 대목이 여럿 있다. 그중 하나를 들면 “아버지가 그랬고 내가 그랬듯이 세상의 모든 아들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아버지가 거름되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아버지보다 진화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아버지는 농부다”라는 대목이다. 이 책은 아버지 원경선 옹이 아들에 대한 부정을 전하는 게 아니라, 아들 원혜영이 아버지에 대한 뭉근한 사랑을 담는다. 원 의원은 “내가 아버지와 다른 삶이 가능했던 것은 원경선이라는 아버지가 내게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일찍이 나의 본성을 알고 그것을 살려주었다. 나대로의 길을 가게 두었다. 아버지는 농사만 유기농을 했던 것이 아니라 아들도 유기농한 분이었다”고 회고한다. ‘땅의 본성을 살려 그대로 농사짓는 유기농’처럼 아버지 원경선 옹은 원혜영 자신의 본성을 그대로 살려주어 지금의 자신이 있게 했다는 얘기다.

원경선 옹의 땅과 생명에 대한 철학이 삶으로 녹아 아들에게 전달된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좋은 것이다’란 말을 하나의 믿음으로 간직하고 살고 있는 원경선 옹과 원혜영 부자의 사랑이 이채롭다.

부자의 진솔한 대화 ‘아들과 함께 걷는 길’

이외에도 1996년에 초판이 나와 지금까지 10여년간 꾸준히 독자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이순원의 장편소설 ‘아들과 함께 걷는 길’도 이번 추석 연휴에 읽을 만하다. 이 소설은 강원도 대관령 굽이굽이길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걸어 넘으면서 나누는 진솔한 대화를 감동적으로 담아냈다. 이순원은 “한 집안의 아버지로서 아이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중략) 훌륭했던 조상들의 이야기를 하며 그 아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딘지 스스로 깨닫게 하고, 또 작게는 삶은 바로 이런 거란다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라고 이 소설에 대한 집필동기를 밝혔다. 이 소설은 이미 TV문학관으로도 제작되어 방영된 바 있다.

이구용 출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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