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할 때 나누지 못하면 부자가 돼서도 나누지 못한다”

범죄율 높은 소외층 도와야 국민 삶의 질 높아진다 판단
유모차를 끌고 헬싱키 거리를 걷고 있는 핀란드 여성들. ⓒphoto 조선일보 DB
유모차를 끌고 헬싱키 거리를 걷고 있는 핀란드 여성들. ⓒphoto 조선일보 DB

진짜 원조 산타클로스가 살고 있다는 핀란드. 필자는 지난 10여년간 산타클로스의 나라 핀란드에서 살며 핀란드 정부 자체가 산타 할아버지처럼 느껴진 적이 많았다. 지금은 많이 무덤덤해졌지만 주위의 모든 것이 새로웠던 이민 초기에는 이 나라가 국민에게 선심 쓰듯 베푸는 여러 사회보장제도에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필자도 핀란드 정부가 베푼 혜택을 여러 번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핀란드 정부로부터 받은 최초의 선물(?)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첫째 아이 임신 중 받은 대형 소포였다. 내 이름 앞으로 배달된 큰 소포 상자를 호기심에 재빠르게 풀어보니 그 안에는 마치 친정엄마가 출산을 앞둔 딸자식을 위해 준비한 것처럼 보이는 유아용품 세트가 한아름 들어있었다. 여러 벌의 배냇저고리, 아이 젖병, 장난감, 아이 침구, 그리고 이유식까지. “아직 유아 침대를 마련하지 못한 가정에서는 이 소포가 배달된 박스를 당분간 침대로 써도 된다”는 친절한 설명도 적혀 있었다.

80년 전부터 임산부에 ‘엄마 상자’ 배달

‘엄마 상자’라고 불리는 이 소포는 핀란드의 모든 임산부에게 정부가 보내주는 것으로 이 제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핀란드에서만 시행되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제도가 핀란드가 경제성장을 이룬 1960년대 이후가 아닌, 핀란드가 정치·경제적 혼란을 겪고 있던 1930년대 말에 처음 시작됐다는 점이다. 지난 가을, TV 인터뷰 건 때문에 ‘핀란드 경쟁력 100’의 저자인 헬싱키 대학 교수 일카 타이팔레 박사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때 들었던 얘기 중 지금까지도 귓가를 맴도는 한 대목이 있다.

“우리(핀란드)는 가난할 때부터 나누며 살아왔다. 가난할 때 나누지 못하면 부자가 돼서도 절대 나누지 못한다.”

핀란드는 현재 세계에서 영아 사망률이 가장 낮은 나라다. 이는 모든 임산부의 건강 상태를 나라에서 다달이 꾸준히 점검해주는 것과 함께, ‘엄마 상자’를 일일이 모든 임산부에게 배포하는 핀란드 정부의 지극정성 때문이 아닐는지….

이렇게 핀란드 정부의 귀한 선물을 받은 지 얼마 안 돼 첫째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를 유모차에 싣고 시내 곳곳을 마실 다닐 즈음, 우리는 핀란드 정부가 제공하는 소소한 혜택 하나를 또 누리게 된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만 해도 핀란드의 교통비가 너무 비싸서 될 수 있으면 외출을 피하거나, 꼭 외출해야 할 땐 공공 교통수단을 덜 이용하고 가능한 한 많이 걷는 루트를 이용했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상황이 바뀌어 외출에 대한 경제적 부담이 오히려 줄어들었다. 그 이유는 유모차 한 대만 끌면 헬싱키뿐만 아니라 헬싱키 주변 모든 위성도시까지 공공 교통수단이 모두 무료이기 때문이다.

유모차 끌면 공공 교통요금 무조건 공짜

이런 무임승차 혜택을 더 길게 누리기 위해 비록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핀란드의 어떤 부모는 충분히 걸을 수 있는 5~6세 아이들도 유모차에 태워서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버스 안에서 꽤 큰 아이가 유모차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자 그 어머니가 아이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그 아이를 유모차의 포로로 만들어버렸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공짜를 좋아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런 유모차 무임승차 서비스 혜택을 받으며 처음에는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는 나라이니 엄마와 아이에게 이런 무료 서비스까지 제공하는구나’라고 단순하게만 생각했다. 그런데 핀란드 전차와 버스 운영 방식을 자세히 살펴보니 유모차와 함께 동승한 1명의 부모에게 돈을 받지 않는 것은 여러 면에서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보통 승객들은 요금을 내면서 좁은 앞문으로 승차하고, 널찍한 뒷문은 하차할 때만 이용한다. 만약 좁은 앞문으로 유모차가 드나든다면 그 뒤 많은 사람이 승차를 기다려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될 것이다. 결국 유모차 무임승차는 유모차를 모는 부모뿐만 아니라 다른 승객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사회보장제도의 혜택과 그런 혜택이 가져오는 부수적 효과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다.

일카 타이팔레 박사는 핀란드에서 ‘가난한 독신 남성의 대변인’으로 불린다. 그는 소리 높여 “그들이 아직 은퇴 연령이 되지 않았지만 조기 은퇴 연금을 지급하여야 하며, 또 집이 없는 노숙자 독신 남성에게는 집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은 ‘가난한 독신 남성’의 정반대 대척점에 있는 ‘여유 있는 유부남’이지만 말이다. 이분은 왜 가난한 핀란드 독신 남성의 복지에 대해 이토록 목소리를 높이는 걸까?

“핀란드의 가난한 독신 남성은 사회의 가장 바닥층이다. 가난한 독신 남성의 3%에 해당하는 4만명이 핀란드 전체 범죄의 3분의 2를 저지르고 있다. 대부분의 노숙자도 가난한 독신 남성이며 감옥에 갇힌 수형자, 마약 중독자, 알코올 중독자 등 사회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거의 다 이 범주에 속해 있다. 1996년 이래 핀란드에서는 감옥 수형인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다. 핀란드에서 일반 시민이 안전한 일상생활을 누리려면 가난한 독신 남성의 복지에 반드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결국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가난한 독신 남성의 복지 증진을 통해 나머지 일반 국민의 삶의 질이 제고되는 것이다.

그는 인터뷰나 연설할 때, 도스토옙스키가 한 소설에서 언급했던 ‘감옥과 정신병원은 한 사회의 거울’이라는 말을 자주 인용한다. 그의 직업이 정신과 의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외국 여행을 할 때면 그는 그 사회를 알기 위해 관광지보다는 감옥과 정신병원을 방문한다고 한다. 일카 타이팔레 박사의 주장대로라면 감옥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정신병원에서 치료받는 사람들이 속해있는 사회 약자 집단에 대한 복지를 증진시킨다면 그 혜택은 결국 감옥 밖, 그리고 정신병원 밖에 있는 일반 사람들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이다.

편하게 실업연금 받는 것보다 일이 좋다

헬싱키의 한 초등학교 교실 모습.
헬싱키의 한 초등학교 교실 모습.

이 외에도 필자가 받았던 여러 복지 혜택 중 기억나는 것들을 잠시 열거해보면, 아이가 아팠을 때 병원에 택시를 타고 갔는데 정부에서 택시비를 전액 지원해주었던 일, 아이가 등하교 시 정부가 지원하는 스쿨택시를 이용했던 것(핀란드에서는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의 집이 학교에서 3㎞ 이상 떨어져 있으면 택시를 이용해서 등하교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지원해 줌), 남편이 잠시 직장을 잃었을 때 정부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 없이 가계를 꾸려나갔던 일(실업자는 2년 이상 본인이 받던 월급의 70% 가까운 실업자금을 받고, 유치원비도 무료로 바뀌며, 필요한 경우 아파트 월세도 보조받음) 등이 있다.

남편이 실업자가 됐을 당시 실업자금을 500일 동안 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남편은 실업자금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직장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성경에는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먹을 것이 풍부한 더운 열대 나라보다는 핀란드처럼 혹독한 자연환경을 극복해야 하는 추운 냉대지방에 위치한 나라에 더 어울리는 구절인 듯하다.

핀란드는 예로부터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 굶어 죽기 딱 좋은 동토의 땅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핀란드에서 노동은 삶이고 삶은 또 노동이다. 이런 의미에서 핀란드에서는 직장을 갖는다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직장이 곧 개인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평상시 개인 프라이버시를 중요시하는 핀란드 사람들이지만 초면에 다짜고짜 직업이 뭐냐고 묻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만약 “직업이 없다”는 대답을 듣는다면 슬프지만 그들은 더 이상의 대화를 원치 않을 수도 있다.

만약 노동에 관한 관념이 상대적으로 희박한 나라에서 핀란드 같은 실업자 혜택을 실시한다면 그 나라 국고는 바닥이 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노동을 신성시하며 심지어는 일하는 것에 대해 강박관념까지 가진 대부분의 핀란드인은 달콤한 실업혜택에 안주하기보다는 일자리로 빠르게 복귀하는 것을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한다. 핀란드 정부가 관대한 실업자 혜택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배경에는 핀란드인의 근면한 국민성도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복지국가의 밑바탕은 신뢰

가끔씩 일과 관련해서 핀란드를 방문하는 한국 분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다. 그들에게 나는 “핀란드에서 가장 부러운 것은 교육제도도, 사회보장제도도 아니고 신뢰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사람이 사람을 믿고, 사람이 정부를 믿고, 또 공교육을 믿는 사회, 다른 어떤 것보다 이 점이 가장 부러웠기 때문이다.

이번 글을 준비하며 사전조사를 하던 중 흥미로운 한 논문을 발견하게 됐다. 그 논문에서는 ‘복지와 사회적 신뢰도가 밀접한 상호 인과관계가 있다’고 쓰여 있었다. 핀란드를 포함, 노르딕 복지 모델을 시행하고 있는 북유럽 모든 나라는 사회적 신뢰도가 상당히 높은 데 비해,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 사회적 신뢰도가 낮은 편에 속한다고 한다.

그 논문에 따르면 내전을 치른 나라들은 거의 대부분 사회적 신뢰도가 매우 낮은데, 유일한 예외가 핀란드라고 했다. 1918년 핀란드도 우리나라처럼 백군과 적군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내전을 치렀고 민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백군이 승리를 거두어 분단의 슬픔까지는 겪지 않았지만, 그후 오랫동안 백군과 적군은 서로 반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겪게 된 러시아와의 전쟁, 그리고 정부의 적군까지 감싸는 여러 제도 시행을 통해 현재의 통합된 사회, 신뢰하는 사회를 일구어냈다. 여기에는 정치인과 공무원에 대한 높은 신뢰도 포함된다. 뿐만 아니라 핀란드 국민과 정부 사이에도 굳은 신뢰가 형성되어 있다. 국민은 세계에서 가장 부패 없는 국가로 선정된 핀란드 정부를 믿고, 정부도 핀란드 국민을 신뢰한다. 실제 지난 2006년 한 여론조사에서 공공 및 민간 각 부문에 대한 일반인의 신뢰도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경찰 부문의 신뢰도는 전체 부문에서 가장 높은 83%로 집계됐다. 이 밖에 군대에 대한 신뢰도가 75%, 대학 70%, 기술연구센터(VTT) 64%, 사법조직 62%, 과학자 59%, 핀란드 학술원 50% 등 공공부문에 대한 신뢰도가 전반적으로 상당히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서로 믿는 사회를 원한다면? ‘복지’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한다. 복지 국가를 원한다면? 서로 믿고 믿음을 줄 수 있는 사회 구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핀란드가 해냈다면 우리에게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보영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 1999년부터 핀란드에 거주. 투르크 대학원 동아시아학 석사과정.

키워드

#신년특집
이보영 통신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