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아산 현충사의 충무공 장도(구조 비교를 위해 원본을 비례 축소한 사진), (아래)서울 광화문 동상의 장도
(위) 아산 현충사의 충무공 장도(구조 비교를 위해 원본을 비례 축소한 사진), (아래)서울 광화문 동상의 장도

최근 서울 광화문 광장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의 보수와 맞물려 불거진 논쟁은 사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논쟁은 1968년 조각가 김세중(1928~1986)이 제작한 충무공 동상이 세종로에 들어선 이후 1970년대부터 시작됐고, 5년에서 10년 정도의 주기를 거치면서 무려 42년이 지난 2011년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 국민이 잊을 만하면 되풀이되는 이 사안의 요점은 동상이 잘못된 고증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세간에서는 이번에 문제를 제기한 ‘문화재제자리찾기운동본부’(사무총장 혜문 스님) 측에 의해 속칭 ‘이순신 동상의 5대 문제점’이라는 내용으로 회자되고 있다. 문화재제자리찾기운동본부의 문제 제기는 △동상 속 충무공이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어 패장의 모습이며 △쥐고 있는 칼이 일본도이고 △입고 있는 갑옷이 ‘중국 갑옷’이고 △동상의 얼굴이 충무공의 표준영정과 다르며 △ 동상 앞의 독전고(督戰鼓)가 서있지 않고 뉘어있다는 점으로 요약된다.

이에 대해 옹호하는 측은 예술가로서의 창작에 관련된 소관이라는 점과 제작 당시의 상황을 들어 동상에 대한 변론을 하고 있다. 논쟁을 얼핏 보면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측의 논거가 일리 있는 듯 보이고 그냥 놔두어야 한다는 측의 변론이 미흡해 보인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정작 다른 데 있다. 일견 타당해 보이는 논쟁의 핵심 중 상당 부분에서 근본적인 오류가 존재한다. 지적하는 측의 근거와 반박하는 측의 변론들 자체가 잘못된 정보를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고증에 입각한 증거 자료와 논리로서 냉정히 풀어가야 할 사안이 주관적인 오해 아래 불필요한 소모전의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부터 충무공 동상으로 야기된 논쟁이 간과하고 있는 문제에 관해 고증과 자료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쟁점 1.충무공 동상은 항복하는 장군의 모습인가?

▶ 문제제기 측 주장 : 동상 속 충무공은 칼을 오른손에 들고 있다. 이는 항복한 장군의 모습이다.

▶ 동상 제작자 측 주장 : 오른손에 칼을 든 이유는 전쟁 종료라는 개념으로 전쟁이 끝난 뒤 이긴 자의 모습이다. 오른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다는 건 상징적인 의미다.

충무공 동상이 쥔 칼자루 부분의 줄 감은 모습
충무공 동상이 쥔 칼자루 부분의 줄 감은 모습

칼을 어느 손에 쥐는가를 기준으로 승장·패장의 논리를 적용하여 문제로 삼는 쪽이나, 작가가 동상의 모습에 부여한 의미는 창작의 영역이니 문제될 것이 없다는 쪽 모두 지극히 관념적인 해석을 하고 있으며 문제 자체가 핵심에서 벗어나 있다. 문제의 핵심은 동상 속 충무공이 ‘칼을 차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2000년 전부터 칼의 휴대 방식은 원시부족이 아닌 이상 기본적으로 차는 것이지 드는 것이 아니다. 왕의 주위에 검을 들고 서있는 운검(雲劒)과 별운검(別雲劍)들은 예외의 경우지만 임진왜란 당시는 물론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장군이든 장령이든 무관이든 문관이든 칼을 휴대하는 자는 당연히 차고 있어야 했다.

패검(佩劍)이란 칼의 명칭은 말 그대로 ‘차는 칼’을 의미하는데 ‘세종실록(世宗實錄)’ ‘군례서례(軍禮序禮)’의 기록을 보면 ‘패검은 우리말로 환도(環刀)라 한다’고 했다. ‘융원필비(戎垣必備)’에는 환도를 ‘이 칼이 환(環)이라 명명된 것은 칼집이 있고 고리를 만들어 이 고리에 끈을 묶어 찼기 때문에 환도라 하였다’라고 설명되어, 환도라는 용어 또한 그 자체로서 ‘차는 칼’을 의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지금 전국 여러 곳에 세워진 충무공 동상 거의가 왼손이건 오른손이건 간에 손에 칼을 들거나 쥐고 있고 혹은 가운데로 모아 짚은 모습(조선시대 그림에서 장수와 병사들이 이런 식으로 시립 또는 도열하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지만 지휘관의 경우엔 해당되지 않기에 이 또한 정확한 고증은 아니다)을 하고 있는 것은 모두 잘못된 고증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잘못된 고증은 비단 광화문 동상만의 문제가 결코 아닌 대한민국에 소재한 충무공 전체 동상의 문제이다.

만약에 충무공이라면 과연 어땠을까 하고 의문을 가진다면 저 유명한 시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긴 칼 옆에 차고…’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즉 전투에서 벗어나 시름에 빠져 앉아있는 상황에서도 충무공은 칼을 풀어 쥐거나 들지 않고 차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 옳게 문제제기를 하려면 ‘왜 차고 있어야 할 칼을 쥐고 있느냐? 그것도 오른손에?’라는 식으로 해야 한다.

충무공 장도의 일본식 코등이 사진. 코등이는 손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photo 아산 현충사
충무공 장도의 일본식 코등이 사진. 코등이는 손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photo 아산 현충사

전시 상황이라면 칼을 왼손에 들었을 테지만 전쟁이 끝난 뒤 승자의 모습이기에 오른손에 쥐게 했다는 작가 측의 해명은 오히려 문제제기 측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는 자충수가 된다. 전쟁이 끝나 평화가 왔기에 일단 칼은 풀었으니 갑옷을 벗기 전 한번 칼을 짚고 감상에라도 젖고자 하는 모습이란 말인가. 정말로 작가가 그런 모습을 상정한 것이라 한다면 이 경우엔 당연히 칼은 왼손에 들어야 한다. 문제제기 측의 주장처럼 왼손잡이가 아닌 이상 언제라도 칼을 뽑을 수 있는 상태여야 하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전쟁을 끝내고 칼을 풀어 손에 잠시 든 것이라 해도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국가의 위기에 항시 대처해야 할 장군이라면 평시나 전시나 승전후일지라도 항상 칼을 뽑아 적을 물리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무장의 기본이다.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오른손에 (칼을) 쥐고 있는 것이 조국 수호의 충심을 표현한 것이며 의지의 표현’이라는 말은 설사 작가의 유족 측에서 창의력이란 명분을 내세운다 해도 일방적으로 부여한 모호한 의미로 느껴질 뿐 설득력이 부족하다.


쟁점 2.충무공 동상이 쥐고 있는 칼은 일본도다?

▶ 문제제기 측 주장 : 동상의 칼은 일본도이다. 아산 현충사의 충무공 장검은 많이 휘어있는, 즉 곡률(曲率)이 상당히 큰 데 반해 광화문 충무공 동상의 장검 곡률은 직선에 가깝다. 광화문 동상 속 충무공이 들고 있는 칼은 일본도이거나 일본도의 변형일 뿐이다. 제대로 된 고증이라면 충무공의 실전검인 쌍룡검을 들어야 한다.

▶ 동상 제작자 측 주장 : 아산 현충사의 칼(이 충무공 장도 두 자루)은 원래 일본도가 맞다. 제작자는 현충사 칼을 모델로 동상의 칼을 제작했을 뿐이다.

1_ 충무공 장도의 칼자루 부분 photo 아산 현충사 2_ 교차매기를 적용한 조선시대 정기룡 환도 칼자루 photo 경남 하동 현충사기념관 3_ 교차매기를 적용한 조선시대 환도 칼자루 photo 경인미술관 4_ 교차매기를 적용한 조선시대 환도 칼자루 photo 육군박물관 5_ 융원필비의 환도 실물과 도해 photo 경인미술관 6_ 쌍룡검의 칼자루 부분에 보이는 교차매기 흔적 사진
1_ 충무공 장도의 칼자루 부분 photo 아산 현충사 2_ 교차매기를 적용한 조선시대 정기룡 환도 칼자루 photo 경남 하동 현충사기념관 3_ 교차매기를 적용한 조선시대 환도 칼자루 photo 경인미술관 4_ 교차매기를 적용한 조선시대 환도 칼자루 photo 육군박물관 5_ 융원필비의 환도 실물과 도해 photo 경인미술관 6_ 쌍룡검의 칼자루 부분에 보이는 교차매기 흔적 사진

‘동상의 칼은 일본도가 아니다’가 정답이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확인할 필요없이 일본도에 지식이 있는 일본인에게 동상의 칼 사진을 보여주고 묻길 권한다. 충무공 동상의 칼을 일본도라고 대답하는 일본인이 있다면 그는 자국의 칼을 모르는 문외한이 분명하다. 광화문 충무공 동상의 무엇을 보고 도대체 일본도라고 하는가.

동상의 칼은 칼집 안에 들어있어 칼날의 형태는 확인되지 않으니, 밖으로 보이는 칼집과 칼자루를 살펴보자. 동상 속 충무공이 쥐고 있는 식의 외장을 가진 일본도는 없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동상의 칼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도의 전형인 가타나(刀)의 모습은 물론 우치가타나(打刀·다치에서 가타나로 바뀌는 중간 단계의 칼)나 다치(太刀·허리에 차는 긴 칼)와도 확연히 다르다. 그 이유는 조형된 동상의 칼이 투박하고 충무공 장도와 구조적 비례가 맞지 않아 얼핏 원본과 다르게 보이긴 하지만 전체적인 조형에서 조선 환도의 형태적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과연 동상의 칼은 아산 현충사 충무공 장도와 어디가 다르고 어디가 같은가? 충무공 장도의 외장에 보이는 구성요소들이 모두 적용되었나? 결론을 먼저 말하면 구성요소는 거의 적용되었다. 작가가 비례적용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장식의 크기와 간격을 임의로 왜곡시켰다. 예를 들어보자. 동상이 쥔 칼자루의 머리장식은 충무공 장도의 그것과 유사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칼날과 칼 손잡이 사이의 장식인 코등이 또한 완전히 똑같다고는 할 수 없어도 테두리 부분은 흉내를 냈다. 오히려 이 부분은 충무공 장도의 코등이와 세부적 차이가 있기에 일본식 코등이로 보기 어려운 결과를 얻었다.

칼집에는 분명히 패용장식이 보인다. 한데 패용장식의 두 개의 환 사이 간격이 원본의 간격보다 많이 좁아져버렸다. 또한 칼집 끝 장식은 원본의 크기보다 필요 이상으로 커져버렸다. 빠뜨린 장식도 한 개 있다. 원본에 있는 칼자루 하단 장식은 아예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본의 날렵한 외형이 동상의 칼에서는 투박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런 미비한 재현들이 동상의 칼을 실제 칼과 달라 보이게 하는 근본적 요인이 되어버렸다. 작가가 왜 이런 식의 실수를 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전체적인 비례가 어긋나게 재현한 점이 충무공 장도와 동상이 쥔 칼을 얼핏 다른 칼로 보이게 하는 근본적 문제를 야기시킨 것이다. 애초 비례적 축소만 정확히 했다면, 구태여 일본도다 환도다 하는 세간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가 없었을 문제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이는 작가의 불찰이다. 그러나 사진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제작자 측의 주장대로 미비한 재현이나마 동상의 칼이 충무공 장도를 본으로 하고 임의 축소해 제작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려면, 동상의 칼에 참고했다던 충무공 장도의 길이를 축소할 때 비례적용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점, 칼집의 곡률을 변형한 점, 일부 장식을 임의로 원본과 달리 변형하거나 생략한 점, 그리고 전체적으로 투박한 외형으로 만들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충무공 장도와 다른 칼로 보이게 하는 오해의 소지를 만든 점을 지적해야 옳은 것이다.

충무공 장도의 원래 모습 ⓒphoto 아산 현충사
충무공 장도의 원래 모습 ⓒphoto 아산 현충사

동상 제작자가 칼자루 부분의 줄감기 방식을 현충사 칼과 다르게 한 것도 논란의 소지를 제공하고 있다. 동상의 칼을 일본도라 주장하는 이들은 동상 칼자루에 보이는 줄감기 방식을 흔히 증거로 내세운다. 줄감기 방식은 정작 임진왜란 당시 어떤 일본도에서도 사용하지 않았던 시대불명의 방식이다. 당시 일본의 X자 교차매기식 줄감기를 수용한 조선환도에서도 이런 식은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작가가 동상 칼자루의 줄감기 형태를 이런 식으로 만든 것은 정말로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일본도라서 비판받아야 할 것은 결코 아니며 유물을 참조한다면서 임의로 변형해 근거없는 끈감기 방식을 동상의 칼에 적용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얼핏 교차매기처럼 보이지만 동상이 쥔 칼의 손잡이끈 형태를 자세히 보면 두 줄로 교차하여 감아올린 방식이 아닌 한 줄로 꼬아 감아올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방식은 임진란 당시는 물론 에도시대에도 ‘정식 일본도’에 차용했던 예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877년 세이난(西南)전쟁 때 사쓰마의 맹주였던 사이고 다카모리의 반란군이 사용했던 일부 도검에서 이런 식의 칼자루 줄감기를 사용한 경우가 확인된다. 즉 일본의 근대에 들어서야 드물게 보이는 유형인데, 이마저도 2차대전 당시 일본이나 조선의 조병창에서 제작된 ‘정식 군도(軍刀)류’에서는 볼 수 없고 동남아의 현지에서 급조해 줄을 감은 경우 드물게 확인되는 유형이다. 또한 중국제 일본군도의 모작이나 중국의 사제(私製) 칼에서 많이 확인되는 형식인데 이러한 줄감기 형태 때문에 동상이 쥔 칼을 일본도라 간주할 수는 없다.

그러면 광화문 동상 칼의 원형인 아산 현충사의 충무공 장도가 일본도라는 논란을 살펴보자. 제작자 측이 이 칼이 일본도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장도 칼자루의 X자 교차매기식 줄감기 방식이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고성능 무기였던 일본도의 일부 요소(칼자루의 파지를 견고히 해주는 효율적 기능)를 조선의 도검에 받아들인 결과다. 이 줄감기가 조선의 보편적인 방식 중 하나로서 수용된 사실은 1813년 ‘융원필비’에 수록된 관제 군용‘환도’의 도해에서도 확인된다. 이 도해는 당시 조선 군사들이 사용하던 환도 제도(制度)에 칼자루를 교차매기(일본도의 줄감기 유형 중 하나인 히네리마키)로 줄을 감는 방식이 정착됐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교차매기식 줄감기 형태를 들어 일본도라고 단순하게 간주한다면 임진란 이후 조선 중·후기 군영의 장졸들은 환도가 아닌 일본도를 사용했다는 결론이 되어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쌍룡검 ⓒphoto 조선민속대관
쌍룡검 ⓒphoto 조선민속대관

다시 말해 동상의 칼이 일본도란 제작자와 그 가족들 주장은 충무공 장도를 크게 오해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무생, 태귀련이 어떤 연유로 이 칼을 만들었든 이 칼은 결코 일본도가 아니다. 아산 현충사의 충무공 장도는 일본도적 요소(칼날의 규격과 혈조(血漕·칼날에 낸 흠)의 형식+코등이 장식) 두 가지를 제외한 모든 부분은 조선시대 도검의 전형(조선시대 도검의 전형에는 일부 중국적 요소가 오래전에 수용되어 조선식으로 변화된 부분도 있다)에 속하는 칼이다. 결국 현충사의 충무공 장도는‘일부 외래적인 요소와 조선환도의 주된 요소가 당시의 시대상황에 의해 결합되어 만들어진 칼’이라고 할 수 있다.

현충사 충무공 장도 칼집의 패용장식은 이 칼이 조선환도의 전형이라는 점을 확인해 준다. 이 칼집의 패용 양식은 전형으로 정착된 형태이며 패용장식에 무늬를 넣은 은입사(銀入絲)의 연화당초 문양과 모란 문양 역시 조선 무구 유물에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유형이다.

충무공의 용검이라는 쌍룡검 역시 마찬가지다. 손잡이끈이 결락되어 있기는 하지만 쌍룡검의 칼자루에는 줄을 교차매기로 감았던 증거(마름모꼴 흔적)가 남아있다. 즉 임란 당시 충무공의 용검에도 이미 교차매기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줄 감는 방식 하나를 보고 칼을 일본도라 분류한다면 최악의 경우에는 쌍룡검마저도 일본도로 격하시키는 자충수를 두는 것이다. 아울러 이순신 장도의 칼자루에 매인 가죽끈 사이로 보이는 돋을새김한 동편(27쪽의 교차매기를 한 조선시대 환도 사진 중 경인미술관 환도 칼자루에서도 확인된다)은 칼날과 자루의 결합을 견고히 보완하기 위한 마무리 장식으로 일본, 중국의 도검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조선환도 특유의 기능성 장식 중 하나이다.

일본도와 조선환도의 구분에 대한 세간의 일반적 인식은 칼날이 많이 휜 것은 일본도, 직선에 가까울 정도로 곡률이 작은 것은 조선환도라는 식이다. 한데 문제제기 측에서는 오히려 동상의 칼이 아산 현충사의 충무공 장도에 비해 곡률이 작아 직선에 가까운 점을 지적하면서 동상 속 칼은 일본도 혹은 일본도의 변형이라고 비판한다. 문제제기 측이 상당히 큰 곡률을 가졌다고 주장한 아산 현충사의 충무공 장도의 곡률은 실제로는 완만한 편에 속한다. 오히려 이 정도의 곡률은 조선시대 환도 유물에서 드물지 않게 확인된다. 장도의 곡률만을 들어 일본도라 단정해서는 안된다.

과연 조선시대 도검의 곡률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 300여점에 달하는 조선시대 도검 유물 중 환도 유물의 도신도해(刀身圖解)를 겹쳐 놓으면 일반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곡률의 편차가 너무도 다양하여 단적으로 정형을 말하기 어렵다. 물론 가장 많은 곡률의 빈도가 있고 그것이 상대적으로 일본도의 평균적 곡률보다 작은 것은 맞지만 그것을 조선환도의 기준 곡률이라고 확정지을 만큼 통계상 비율이 높지 않다. 즉 조선시대 환도 유물들이 보여주는 칼날 곡률은 다채로워서 우리 칼의 특정 곡률을 주장하기는 애매한 상황이란 것을 안다면 곡률 시비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원융검(元戎劍)이라고도 불리는 쌍룡검(雙龍劍)은 제작자가 1968년 동상을 만들 당시에는 관련 사진이 발견되기 전이라 정보가 없었다. 충무공의 용검(用劍)인 쌍룡검이 존재했다는 것은 19세기 초의 기록인 박종경(朴宗慶)의 ‘돈암집(敦巖集)’ ‘원융검기(元戎劍記)’에 기록되어 있었지만 실물의 존재와 형태에 대해 제작 당시로서는 알 수 없었다. 쌍룡검이 수록된 조선미술대관이 1910년에 발간되었다지만 도록에 수록된 사진을 통해 칼의 실물이 확인된 것은 서지학자인 고(故) 이종학 선생이 이 책을 입수해 공개한 1984년이다.

즉 동상을 세운 1968년 시점에는 쌍룡검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도 없었고, 설사 존재했음을 알았다고 해도 형태와 규격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이름만 전해오는 칼을 참고할 여지는 애초에 없었다. 새로 동상을 만들 기회가 생긴다면 쌍룡검의 사진을 참고하여 적용해야 하겠지만, 자료와 정보가 없는 당시 상태에서 제작자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칼인 장도 두 자루(명 신종의 하사품인 귀도鬼刀 두 자루와 참도斬刀 두 자루는 명나라에서 제작한 칼이므로 당연히 해당되지 않았을 것이다)를 참조하여 동상에 응용하여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사진 속 쌍룡검 칼집의 패용장식 위로 칼을 허리에 차기 위한 띠돈장식(이 장식은 임진란 당시 유성룡 도검이라 전해지는 유물에서도 확인된다. 즉 임진란 당시에도 칼의 패용에 띠돈을 사용했던 것이다)이 보인다. 즉 쌍룡검을 동상에 적용할 경우에도 칼은 차는 것이지 결코 들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현재 동상이 쥔 칼에 대해 바른 문제제기를 하려면 ‘이순신 장도를 참조했다면서 왜 제대로 재현하지 않았는가?’를 지적하면서 ‘새로 만들 동상은 이순신의 용검인 쌍룡검을 차야 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쟁점 3.충무공 동상은 중국 갑옷을 입고 있나?

▶ 문제제기 측 주장 : 조선식 갑옷은 두루마기처럼 입는 형태로 만들어지고, 중국식 갑옷은 덮어쓰는 형태로 만들어진다. 이순신 동상은 어깨 부분이 조각으로 덮여 있다는 점을 볼 때 조선식이 아니라 중국식 갑옷인 점이 명백하다.

▶ 동상 제작자 측 주장 : 이당의 이순신 영정을 참고했고 복식전문가 석주선의 고증을 받았다.

여반 장군 상하분리형 갑옷 ⓒphoto 문중소장
여반 장군 상하분리형 갑옷 ⓒphoto 문중소장

광화문 충무공 동상의 갑주에 문제가 많은 것은 분명하다.(행주산성에 세워진 권율 장군 동상의 갑옷도 거의 동일하다.) 두루마기형 갑옷을 입지 않았다거나 피박형 갑옷을 입고 있어서가 아니다. 작가의 임의 해석이 시대와 국적이 불명한, 조선도 중국도 아닌 모호한 갑옷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동상에 고증의 잣대를 적용하여 볼 때마다 특히 눈에 거슬렸던 점은 첫째가 투구였다. 동상이 쓰고 있는 복발형 투구의 챙 밑에 당연히 있어야 할 이마가리개 장식이 생략된 것 때문인데, 자료가 부족한 1960년대라 해도 고증에 충분한 정도의 조선 투구 유물은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식의 모습으로 만든 것은 아무리 작가의 창작 관련 부분이라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두 번째는 동상이 입은 갑옷 후면의 망토였는데 이 부분은 필요치 않은 사족(蛇足)이기에 눈에 거슬렸다. 결국 충무공 동상의 갑주가 현존하는 유물의 형식과 일치하지 않음은 물론 동상 제작 시 참조했다는 이당 김은호의 충무공 영정에 묘사된 갑주 역시 마찬가지로 고증 미비의 문제가 있다. 다만 기억할 점은 동상이 좀 더 철저한 고증을 거쳐 제작되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동상 제작 당시 고증이 과연 어디까지 가능했겠는가에 대한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문제를 제기한 측의 주장처럼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 갑옷 유물 중 두루마기형 갑옷이 다수를 차지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장수 갑옷이 무조건 도포식의 두루마기형만 있는 것은 아니며 상의와 갑상의 2중구조로 구성된 갑옷(조선 후기 수군절도사였던 여반呂攀 장군의 갑옷) 또한 유물로 존재한다. 상하 2중구조의 갑옷은 서울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에서도 확인되는데 이러한 예들은 이순신 장군이 임란 시에 반드시 두루마기형 갑옷을 입었을 것이라 단정하기 어렵게 한다.

상하분리형 갑옷 중 갑상 ⓒphoto 서울대 박물관
상하분리형 갑옷 중 갑상 ⓒphoto 서울대 박물관

필자는 피박형 갑옷이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쓰였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제기 측의 주장과는 달리 덮어쓰는 갑옷은 당·송대 유행했던 고형갑옷에 속하며 원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의복형 갑옷이 주류를 이룬다. 명대의 중국 갑옷에는 지역에 따라 여러 유형이 있어 덮어쓰는 유형도 존재했지만 주류는 두루마기형 갑옷과 같은 의복형 갑옷이었다. 다만 문제제기 측에서는 명대 갑옷의 착용법을 덮어쓰는 방식으로 오해하고 있는데 명대의 피박형 갑옷은 조선의 두루마기형 갑옷과 같은 의복형 갑옷에 피박을 별도로 다는 형식인 것이며 이는 청대 팔기군의 갑옷도 동일하다. 문제는 임란 전후의 조선에도 피박형 갑옷이 존재했는가 여부에 대한 것인데 조선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자료들이 있기에 속단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러니 피박만을 들어 ‘중국 갑옷’이라 주장한다면 문제제기 측의 의견 자체도 또 다른 왜곡을 유발할 수 있다.

조선 전·중기의 갑옷에 대한 고증 여부와 피박형 갑옷은 현재도 학계에서 논쟁 중인 상태이며 전문연구자들은 최소한 피박형 갑옷의 조선 전기 존재 가능성에 대해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임진란을 전후한 시점의 그림(또는 당시의 원화를 후대에 모사한 그림)과 책자의 도해’에서 피박형 갑옷이 빈번히 확인되는 데 비해 조선 중·후기의 임진란 묘사 그림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가 있다. 이 그림은 임진란 전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을 주축으로 한 여진족 토벌을 기념하여 참가했던 장수와 장령들을 기록하기 위해 전투 직후에 그렸던 그림을 조선 후기에 다시 모사한 것이다. 그림 하단의 명단에는 이 토벌전에 충무공이 우화열장(右火烈將)의 신분으로 종군한 사실이 적혀있는데 임란전 그림 속 조선 장수와 군사들 모두 피박형 갑옷을 입고 전투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모사도라 할지라도 원래 그림은 임진란 이전에 병마절도사의 명으로 화공이 그린 것이니 화공이 당시의 복장을 마음대로 상상할 여지는 없다. 후대에 이를 모사한 화공 역시 원래 그림을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다. 다시 말해 이 그림은 그 당시의 조선군 복식을 여실히 증언하고 있다.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중 피박형 갑옷 그림 ⓒphoto 육군박물관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중 피박형 갑옷 그림 ⓒphoto 육군박물관

두 번째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다. 임진왜란이 1598년에 끝나고 21년이 지난 1619년(광해군 8년)에 간행된 임란 당시의 충신, 열녀, 효자 등의 일화를 담은 이 책의 도해에도 피박형 갑옷이 다수 확인된다. 전란의 상흔이 조선 전국에 뚜렷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도해에 그려진 조선 갑주(갑옷과 투구)의 모습에 피박이 보이는 것은 어찌할 것인가. 단순히 원화를 그린 화공의 무지로 간주하기에는 일반 병사들의 복식이 너무도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어 장수의 갑옷만 왜곡하여 그렸다고 보기 어렵다. 더구나 광해군은 임란 당시 전장의 실상을 생생히 경험한 군주에 속한다. 책의 발간을 주도하여 명한 광해군이 책자 속 도해에 묘사된 조선군 복장의 허실을 지적하지 않았을 것이라 보기는 불가하다. 즉 문제가 없기에 도해가 실린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조선 전기에 피박형 갑옷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세 번째 그림은 조선 후기에 그려진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이 있다. 북관유적도첩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함경도 지역에 있었던 전투를 기록한 그림인데 이 그림들에서는 두루마기형 갑주와 피박형 갑주가 동시에 그려져 있다. 이는 직책과 직능에 따라 갑주의 형태가 여러 유형으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실물로서는 러시아의 ‘표트르대제 인류학민족학박물관’에 소장된 피박형 조선 갑옷이 있다. 이 갑옷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이런 자료만 봐도 임란 전후의 시기에 조선에 피박형 갑옷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언하는 것은 속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중 피박형 갑옷을 입은 충무공 그림 ⓒphoto 서울대 규장각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중 피박형 갑옷을 입은 충무공 그림 ⓒphoto 서울대 규장각

제작자 측이 변론을 하면서 동상 제작 당시 참조했다는 이당 김은호의 충무공 영정에 묘사된 갑옷(갑옷의 형태와 갑옷 각 부위의 문양) 자체도 문제지만, 제작자가 여기에 자의적 해석을 곁들여 제작한 동상의 갑주를 제작한 것이 더욱 문제를 촉발시킨 것은 분명하다. 제작자 측은 김은호의 영정을 참고한 외에도 복식전문가에게도 고증을 받았다고 했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문제는 복식전문가가 꼭 갑옷전문가이기는 어렵다는 점에 있다. 갑옷을 연구하려면 단순히 복식에 대해서만 알아서는 접근이 불가하고 전투복식에 대한 전문적 지식은 물론 갑옷에 수반되는 장비와 무기 등에 대한 지식이 함께 필요하다. 갑옷은 전투를 수행하기 위한 기능적 요소는 물론, 함께 착용되는 장비나 수반되는 무기와 함께 전체를 일습(一襲·한 벌)으로 이해할 때 진정한 분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동상이 제작되던 1960년대 중반의 시점은 유물에 대한 전문가라 하더라도 접할 수 있는 자료가 극히 한정적이었고 연구도 미비하며 척박한 수준이었다. 지금과 같이 인터넷만 치면 정보와 자료가 풍부하던 시절이 결코 아니었고 전화 한 통화로 풍부한 사진자료가 들어있는 도록을 퀵으로 당일에 배달해 주는 시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동상을 세운 지 거의 20년이 지난 1987년이 되어서야 문화공보부에서 비매품으로 출간한 ‘한국의 갑주’라는 책자가 간행되었다. 당시 국내외에 있는 갑주를 최초로 집대성한 이 책의 발간 이전에는 박물관 근무자나 연구자라 하더라도 자신들이 소속된 기관의 유물 외에는 갑주 유물의 사진정보조차 접하기 어려웠다. 현 시점의 연구가 1980년대 말에 비해 진척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비약적인 성과를 이루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는 상황이다.

북관유적도첩 중 정문부 장군을 그린 창의토왜도. 피박형 갑옷과 두루마기 갑옷이 함께 묘사돼 있다. ⓒphoto 고려대 박물관
북관유적도첩 중 정문부 장군을 그린 창의토왜도. 피박형 갑옷과 두루마기 갑옷이 함께 묘사돼 있다. ⓒphoto 고려대 박물관

하물며 1960년대 당시의 수준이 얼마나 척박한 상황이었는지를 이해한다면 당시 고증이 가진 한계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이는 현충사의 충무공 장도를 일본도로 단정했던 당시 도검연구 수준과 마찬가지로 그 시절은 문화재위원(1960년대는 조선시대의 전통도검과 갑옷에 대해 전문가가 거의 전무한 시절이었다)들이라 해도 한정된 자료만 알고 있었고 전문연구 역시 육군박물관과 같은 군사유물 소장기관에서 극소수 연구자만 관련된 제한적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쟁점 4.충무공 동상의 얼굴은 왜 표준영정과 다른가?

▶ 문제제기 측 주장 : 동상의 얼굴이 현충사의 충무공 국가 표준영정과 일치하지 않는다.

▶ 동상 제작자 측 주장 : 예술가들은 은연중에 작품 속 인물 얼굴을 자신과 비슷하게 한다고 하지만, 충무공 동상의 얼굴이 작가와 닮았다는 말은 가족 입장에서 할 수는 없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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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2년 청전 이상범의 충무공 영정 photo 해군박물관
2. 1952년 이당 김은호의 충무공 영정 photo 국립현대미술관
3. 1952년 월전 장우성의 충무공 영정 photo 아산 현충사 (이 그림은 광화문 동상 설치 5년 후에 문화공보부에 의해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이 부분은 애초 시비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사안이다. 기존 언론을 통해 해명되었듯이 충무공을 직접 보고 그린 초상화는 애초 존재하지 않으며 동상 제작 당시에는 표준영정이 지정되지 않았다. 표준영정 지정 이전에 그려진 모든 초상화와 영정은 모습이 제각각이었고 작가들이 상상력을 발휘해 그린 상상화였다. 더구나 작가는 기술자가 아닌 예술가였다. 그런 상황에서 동상의 제작자 역시 자신만의 이순신 얼굴을 만들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창작의 자유에 속하는 영역인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충무공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누구도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지만 임란 당시 충무공과 절친했던 유성룡의 두 가지 증언이 남아있다. 유성룡은 임란 후 쓴 징비록(懲毖錄)에서 젊은 시절 충무공의 모습을 “순신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는 단아하여 마치 삼가 수양하는 선비와 같으며 당찬 면이 있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유성룡은 또 태촌집(泰村集)에서 49세이던 충무공의 아픈 뒤 여위고 초췌한 모습을 묘사하며 “그의 언론과 지모는 과연 난리를 평정할 만한 재주였으나 얼굴이 풍만하지도 후덕하지도 못하고(여위었다는 의미) 상(相)도 입술이 뒤집혀서 마음속으로 여기기를 ‘복장(福將)은 아니로구나’ 하였는데”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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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박물관 소장 이순신 초상화 photo 동아대박물관
표준영정은 어떠한가. 표준 영정 제작자가 가장 오래된 충무공 초상화를 참조하여 그렸다면 그래도 의의가 있겠지만 실존하는 조선시대의 유일한 충무공 초상화(이것 역시 당대의 그림이 아니므로 상상화에 속한다)는 정작 표준영정으로 정해진 모습이나 다른 작가들이 그린 어떤 초상화와도 닮지 않았다. 그러므로 동상 제작 후에 지정된 표준영정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차라리 그 이전에 비록 상상화일지라도 조선시대에 전해지는 유일한 충무공의 초상화를 들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바른 접근이다. 작자 미상의 조선시대 충무공 초상화는 동아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작가 유족의 주장은 어떠한가. 이 점에 대해서는 작가 유족 측의 말이 매우 합당하며 예의를 지키고 있다고 본다. 저 정도의 답변이면 감정을 절제하며 최대한 이성적으로 응대한 것이 느껴진다. 초기 동상 문제가 불거졌던 1977년 당시 동상의 얼굴에 대해 제기된 문제는 ‘서양인 얼굴’이라는 점이었다. 코가 높고 얼굴이 각졌으며 눈썹과 눈 사이가 가깝고 눈꼬리가 높이 올라간 눈매(이 부분은 청전 이상범의 이순신 영정 그림을 응용한 것으로 보인다) 등으로 인해 제기된 지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2010년을 지나 2011년 1월에 이르는 현 시점에서는 갑자기 제작자와 비슷하다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눈매와 코의 모양 얼굴형에서 제작자 사진과의 유사점을 찾기 힘들었는데, 다른 것은 차치하고 특히 눈꼬리가 치솟은 치켜뜬 눈매와 각진 얼굴형 때문에 더욱 동의하기 어려웠다.


쟁점 5.戰鼓가 누워있는 문제는?

▶ 문제제기 측 주장 :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북이 눕혀 있어 패전을 뜻한다

▶ 동상 제작자 측 주장 : 최근에 제기된 주장인 탓인지 제작자 측에서 별다른 반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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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중 전고를 치는 고수 그림 photo 육군박물관
동서양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좌대 위에 세워진 커다란 전고(戰鼓)를 체격이 우람한 거한이 치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전고를 세워놓는 것이 올바른 형식이라면 설사 전쟁이 끝나 평화의 시기가 도래했다 할지라도 항상 유사시를 대비하여 세워져 있어야 할 것이고 그럴 경우라면 문제제기 측의 지적이 옳다. 그러나 이 역시 재고의 여지가 있다. 전고를 세워놓고 치지 않고 눕혀놓고 쳤다면 어떨 것인가. 세워놓고 전고를 치는 경우도 있지만 눕혀놓고 치는 경우도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임진란 전 전투를 묘사한 기록화인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를 다시 보면 시전부락의 포로를 장양공 이일이 추국하는 장면 하단에서 조선군이 좌우로 두 개의 전고를 눕혀놓고 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전고를 눕혀놓고 치기도 했음을 보여주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다. 이뿐만 아니다. 전고를 거치하는 제3의 방식도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그림 중 충무공의 함선(판옥선은커녕 어선 정도의 모습이므로 이 그림이 판옥선을 보지 못한 화공의 상상화임을 알 수 있다)에 묘사된 전고를 치는 모습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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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신속삼강행실도 중 충무공 함선에 매달린 전고의 그림 photo 서울대 규장각
이 경우 북을 치는 방식은 세워놓은 것도 아니고 눕혀놓은 것도 아닌 매달아 놓은 방식이다. 더구나 육지도 아닌 바다 위라면 세워졌거나 매달린 전고를 치는 방식보다는 눕혀놓은 전고를 치는 것이 물결에 흔들리는 배의 갑판 위에서 쳐야 하는 고수의 입장에서는 훨씬 안정적일 가능성도 부정하기 어렵다. 통영 앞바다의 한산도 제승당이 소장하고 있는 ‘노량해전도’에는 매달아 세워놓은 전고가 그려져 있지만 이 역시 현대에 그려진 상상화일 뿐이다. 진실이 궁금하지만 임란 당시 충무공 함대의 배를 직접 타본 사람이 없고 이에 대한 연구도 미미하니 현재로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두는 상황 속에서도 계속 전고를 치게 했다는 기록이 있기에 충무공의 함선에 전고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다만 세워진 전고인지, 매달아 놓은 전고인지, 아니면 눕혀놓은 전고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상식으로 과거를 함부로 예단해서는 안 된다는 실증사학의 원칙으로 이 사안을 평가한다면 이 또한 문제제기 측의 주장이 현재의 선입견에 입각한 속단일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 충무공 동상을 제작할 때 적용할 고증 요소

현재까지 밝혀진 연구와 유물, 문헌을 통한 고증을 근거하여 적용할 수 있는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칼의 휴대와 관련, 들거나 쥐거나 짚지 말고 반드시 차는 방식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경우 칼은 왼편에 패용토록 한다.

2. 칼의 형태는 충무공의 용검인 쌍룡검으로 하되 규격은 80㎝ 이상 1m 미만으로 한다.

3. 갑주와 관련, 투구는 현존하는 다수의 원수(元帥)용 투구 중에서 선택하고 갑옷은 두루마기형과 상하분리형 갑옷 중에서 고형(古形)으로 택하여야 한다. 피박형 갑옷은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는 부분이니 새로운 동상에서는 일단 제외한다. 현재의 동상에 보이는 망토는 없애도록 한다.

4. 얼굴은 현재의 표준영정 역시 충무공의 진짜 얼굴과는 관계 없으니 시비의 여지가 없도록 기록을 참조한 표준영정을 다시 만들고 이를 동상 제작에 참고하여야 한다. 표준영정 제작에는 유성룡의 충무공 묘사와 현존 조선시대 유일한 충무공 초상화를 참고해야 한다.

5. 신장과 관련, 충무공의 키가 특별히 크다는 기록이 없으니 신장은 당시 표준치 정도로 상정하면 된다. 무인이므로 무예수련에 의해 키가 보통이라 하더라도 근골은 발달한 체형일 수 있다. 노량해전 당시 충무공은 54세이고 당시로서는 노인에 속한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임란 당시의 남자 성인의 평균신장은 약 160㎝이니 이 정도 혹은 약간 큰 정도의 인물이 90㎝ 전후의 환도를 패용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이를 적용한 비율로 확대하여 장군의 모습을 재현한다.

6. 장군의 지휘봉인 등채를 새로 동상에 집어넣을지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등채는 무장한 지휘관들이 들던 등나무 재질의 채찍으로 지휘와 지시를 할 때 쓰였다.

이석재

현재 경인미술관의 2대(代) 관장으로 재직 중인 필자는 우리나라 전통무기 연구의 권위자이며 특히 전통도검에 관한 한 독보적인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국내외에 소재하는 거의 모든 한국전통무기유물을 직접 조사·분석한 유일한 연구자로서 1만여점에 달하는 한·중·일 도검 및 무구유물을 수집한 국내 최대 소장가이기도 하다. 방대한 유물 분석과 폭넓은 자료인용을 토대로 한 그의 연구는 반론을 불허하는 치밀한 논증으로 유명하며 특히 인검(寅劍)을 비롯한 조선시대 도검 연구가 대표적 업적이다.

이석재 경인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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