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집 등 비밀 아지트에서 몰래 예배 “신도 수 많으면 들킨다” 50명 단위로 활동
불법 ‘지하교회’ 80만개, 신도 수 6000만명

문화대혁명 기점으로 농민들 중심 확산
평일에도 ‘조장’ 지휘로 성경 공부
핍박 속 부흥… 절실한 신앙심으로 무장

2004년 ‘종교자유’ 선포 후 규제완화 불구 2007년 한 해만 체포된 신도 700여명
지난 10일 베이징서 옥외예배 중 체포되기도

정부서 인정한 삼자교회 포함 신도 1억명 시대
중국 기독교 부흥… 2020년 2억명 돌파 예상
외국인 선교활동은 엄격 금지… ‘반쪽 개방’ 비난도

기독교 신자 급증하면서 목회자 부족 신도 1000명 삼자교회 중 목사 없는 곳도
신학대학 전국 19곳밖에 없어
중국 난징의 한 지하교회에서 신도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중국 난징의 한 지하교회에서 신도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지난 4월 7일 중국 장쑤성(江蘇省) 난징(南京). 오후 4시경 기자의 휴대폰으로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한 취재원이 보낸 문자메시지에는 중국어로 된 주소가 찍혀 있었다. 중국인들이 난징 외곽의 한 가정집에 차린 지하교회를 찾아갈 접선 장소의 주소였다.

기자는 하루 전 난징의 한 한인 목회자에게 “지하교회를 방문해 보고 싶다”고 부탁했었다. 이 목회자는 “지하교회와 교류하는 건 위험하다. 크게 문제될 수 있다. 우리는 지하교회와 왕래를 하지 않는다”며 어림없는 부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대신 그는 “우리가 직접 연락하는 곳은 없고 주위를 통해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한 지인의 휴대전화 번호를 기자에게 건네줬다.

우여곡절 끝에 연결된 그 지인의 첫 반응도 지하교회를 안내해주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러 번의 설득 끝에 “목요일에 모임을 갖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고, 마침내 이 지인이 휴대폰 문자로 지하교회 주소를 보내온 것이었다.

‘차오베이(橋北)’로 시작하는 주소는, 난징 북서쪽의 장강(長江)을 건너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목적지를 말하자 택시기사는 “여기서부터 거리가 너무 멀다”며 얼마가 걸리든 기다릴 테니 왕복으로 이용해달라고 요구했다. 택시가 시 중심을 빠져나가 장강대교를 건너 교외를 1시간쯤 달렸다. 갓 올라간 건물들이 밀집한 한 위성도시의 아파트촌이 주소에 나와있는 목적지였다. 택시를 세우고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자 몇 분 뒤 멀리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점퍼 차림의 남성이 택시를 향해 걸어왔다. 기자에게 지하교회 주소를 알려준 그 지인이었다. 그는 택시에 타더니 기자와 인사하고는 굳은 얼굴로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줬다.

“내 직업을 나타낼 수 있는 단어는 사용하지 마십시오. 이곳에서 제 호칭은 ‘선생님’입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얘기를 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직업도 그렇고 하시니….”

그는 처음 본 기자에게 최대한 말을 아꼈다. 이름도, 평상시 하는 일도 알려주지 않았다. “중국에서 활동한 지 10년쯤 됐다”는 말만 했다. “나 같은 사람이 중국에 상당수 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택시기사에게 또 다른 목적지를 말했고 가는 도중 중국인 2명을 더 태웠다. 15분쯤 더 달렸을까. 아파트 단지가 나타났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6층까지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노크를 하자 문이 열렸다.

30평 아파트 방문마다 십자가

화선지에 붓글씨로 쓴 십계가 지하교회 벽에 붙어있다
화선지에 붓글씨로 쓴 십계가 지하교회 벽에 붙어있다

중국의 일반 가정집을 연상케 하는 실내는 어두운 편이었다. 우리나라 30평형대 아파트 정도의 크기였지만 가전제품이나 가구가 하나도 없었다. 3개의 방문 앞엔 각각 십자가가 걸려 있었고, 거실 한쪽 벽면엔 화선지에 붓글씨로 쓴 기독교의 ‘십계(十誡)’가 붙어 있었다. 십계명의 처음인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를 뜻하는 중국어 ‘除了我以外不可有別的神’부터 한자로 쓰여 있었다.

어두운 실내와 대자보처럼 벽에 붙은 붓글씨가 어우러져 뭔가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1980년대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 시절 운동권 인사들이 모여 비밀 회합을 갖던 장소가 바로 이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6시30분이 되자 교인들이 모여들었다. 일요일엔 50여명이 예배를 드리지만 이날은 평일 성경공부를 위해 15명만 문을 두드렸다. 귀퉁이에 접혀있던 접이식 의자를 펼치고 탁자 두 개를 놓자 거실 공간이 사람들로 꽉 찼다. 탁자 위로 집에 보관 중이던 찬송가와 성경책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찬송가 282장을 큰소리로 부르기 시작하자 가구 없이 텅빈 공간이 쩌렁쩌렁 울렸다. 행여나 옆집에 소리가 들려 신고라도 들어갈까 오히려 기자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가 시작되자 교인들이 하나둘 안경을 벗었다. ‘예수(耶蘇)’를 외치며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기도자의 목소리가 간절해질수록 흐느낌도 커졌다. 기자는 ‘들키면 추방’이라는 생각에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중국 정부의 허가 없이 운영되고 있는 지하교회에 외국인이 섞여있을 경우 처벌이 더 엄해지는 까닭이다.

방문 전 한국인 목회자들로부터 “지하교회는 핍박 속에 부흥한 교회기 때문에 절실함이 배어 있다”는 설명을 들어서인지 이날 본 신도들의 모습은 같은 날 오전 삼자(三自)교회에서 만난 신도들보다 더욱 절박해 보였다. 삼자교회는 중국 정부가 허가한 공인 교회로 1950년대부터 생겨났다.

예배가 끝나자 성경공부가 이어졌다. 자신은 목사가 아니며 평신도이니 ‘조장’이라고 불러 달라던 위(與·35)씨가 공부를 지도했다. 신약성서 로마서 8장 5절부터 11절까지를 설명하며 문답형식으로 진행된 성경공부는 꼬박 1시간이 걸렸다. 어두운 조명 아래서 작은 글씨의 성경책을 계속 응시하자 눈에 피로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다른 교인들은 이에 익숙한 듯 나눠 받은 프린트물에 조장의 설명을 꼼꼼히 적어내려갔다.

예배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30개의 눈이 곧바로 기자에게 쏠렸다. 한국 교회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는지 한국의 기독교 현황과 관련된 질문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오히려 취재를 당하는 꼴이었다. “한국은 기독교의 자유가 많이 허락됐다고 하는데 얼마나 자유로운가”라고 묻는가 하면 “한국에도 교파가 많은 것으로 아는데 한국 교회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도 했다. 기자가 “한국은 종교 활동이 자유롭고 ‘다락방’이나 ‘심방’ 등으로 가정에서의 조별모임도 활성화 돼 있다”고 말하자 부러운 듯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삼자교회·지하교회 성경책은 같아

삼자교회를 따르는 금릉협화신학원의 예배시간. 창밖이 눈부신게 지하교회와 환경이 대비된다.
삼자교회를 따르는 금릉협화신학원의 예배시간. 창밖이 눈부신게 지하교회와 환경이 대비된다.

“일반적으로 가정교회 한 곳의 신도 수는 50명 안팎입니다. 이 수를 넘게 되면 행동거지가 쉽게 눈에 띄거든요. 지난 40년 동안 가정교회가 지하세계에서 음성적으로 운영됐지만 보시다시피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2004년 정부가 종교 신앙의 자유를 기존 헌법 내용보다 완화해 선포하면서 지금은 옛날처럼 예배 보다 잡혀서 처벌받는 정도는 아닙니다. 정부에서도 특별히 문제가 없으면 눈감아 주는 게 일반적이고요. 가정교회에도 이제는 지식분자들이 많이 옵니다.”

조장인 위씨가 말했다. 위씨는 지하교회 대신 가정교회라는 용어를 썼고, 기자의 눈에 지금도 열악해 보이는 교회를 “보시다시피 지금은 옛날과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에서 과거 중국의 지하교회들이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어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실제로 미국의 대중국원조협회(China Aid)가 밝힌 ‘2007년 중국 가정교회 박해보고서(Persecution Report)’에 따르면 중국 18개 도시와 1개 직할시에서 확인된 박해 사례는 총 60건. 박해(Persecuted)받은 신자는 788명, 체포된 신자는 693명이었다. ‘박해’의 내용이 어떤 형태인지 정확히는 확인할 수 없었다. 대중국원조협회는 미국 텍사스주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기독교와 관련된 중국 정부의 억압 사례를 웹사이트에 싣고, 이를 모아 1년에 한 번 관련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다.

성경 한 구절을 놓고 30분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위씨에게 “성경은 어디서 공부했느냐”고 묻자 “나는 개혁주의 장로교(중국 지하교회의 한 소수파)를 따르고 있지만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틈틈이 배웠다”며 “신학대학에도 잠깐 다녔다”고 했다. 중국 정부가 공인하고 있는 삼자교회를 놔두고 열악한 지하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이유를 묻자 그는 “삼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보다 (중국) 정부에 대한 충성이 먼저인 것 같아서”라고 답했다.

위씨는 “요즘의 지하교회는 도시의 화이트칼라 신도 수가 늘어난 까닭에 ‘도시교회’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고 말했다. ‘가정교회’라는 용어에 대해 “지하교회는 중국 정부가 인정하는 공식 교회인 ‘삼자교회’에서 우리를 폄하하기 위해 이르는 표현”이라며 불쾌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지하교회 신도들이 보고 있는 성경이나 찬송가 책을 자세히 살펴봐도 이날 낮에 들렀던 삼자교회의 그것과 다른 점이 없었다. 이들의 성경공부 내용 또한 특별히 정통교리에 반하거나 삼자교회와 크게 다른 부분은 없는 듯했다. 그런데도 이들은 왜 ‘정부의 교회’에 가지 않고 불편한 ‘지하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일까. 기자를 지하교회로 안내해준 지인의 설명이다.

“가정교회와 삼자교회는 관리체계와 계파가 다릅니다. 쉽게 말해 가정교회는 스스로가 관리하고, 삼자교회는 정부의 지침에 따라 운영되죠. 가정교회는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의 감시를 피해 하층민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민초운동이 배경입니다. 중화복음단체, 안휘성 인상 단체, 리샹 단체 등이 대표적 교파입니다. 이들은 본인들을 순수 신앙이라고 주장하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신앙에 애틋함도 있고요. 반면 삼자교회는 정부의 3자원칙(자립·自立, 자양·自養, 자전·自傳)에 따라 제도 중심으로 왔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이들의 신앙을 ‘건조하다’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삼자교회도 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등 제대로 된 성경지식을 가진 목회자들을 양성하고 있어서 교리 기반 자체는 튼튼한 편이죠. 어느 쪽이든 중국 기독교가 전례없는 부흥을 경험하고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

종교의 자유 어디까지인가

실제 중국의 기독교인 수는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중국 종교국이 지난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중국 전역에 퍼져있는 기독교인의 수는 모두 1억명. 1949년 70만명으로 집계됐던 데서 무려 142배나 증가했다.

지난 2007년 화둥사범대학(華東師範大學) 교수 2명이 발표한 ‘종교신앙조사’에 따르면 중국 국민의 약 31.4%는 신봉하는 종교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단은 16세 이상 자국민 45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 중국 관영 영자지인 차이나데일리에 이같이 밝혔다. 당초 중국 정부가 1억명일 것이라고 예상한 종교인 수보다 3배나 더 많은 것이다. 조사에 참여한 화둥사범대학 류중위(劉仲宇) 교수는 “연해지역이나 경제가 비교적 발달한 곳에서 신도들의 증가율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인 것은 기독교였다”고 밝혔다.

중국 정부가 공인한 5대 종교는 기독교, 가톨릭, 이슬람교, 불교, 도교다. 기독교는 이들 5개 종교 중 신도 수 3위권에 속해있지만 류 교수의 말처럼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중국 종교국은 국가 전역에 퍼져있는 지하교회 수를 약 80만개로, 지하교회 신도 수는 60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국 비정부 정치개혁 연구기관인 ‘중국민간조직세계·중국연구소’ 리판(李凡) 소장은 지난해 7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한 학술회의에서 “중국의 기독교인 수는 2020년까지 2억명을 돌파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기도 했다. 이는 중국 전체 인구의 16%에 해당하는 수치다. 리 소장은 “정부 당국의 통제 속에 가정교회가 급증하고 있고 이를 탄압할수록 더욱 확산되고 있어 정부 당국이 딜레마에 빠져 있다”며 “사람들에게 신앙을 갖게 해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게 한 것이 기독교 부흥의 주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오늘날 중국 기독교의 부흥에 대해 난징 금릉협화신학원(金陵協和神學院)에서 만난 왕자웨이(王嘉瑋·기독교 사상사) 교수는 “당시 제2차 아편전쟁으로 인해 체결된 톈진조약으로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중국에 유입되기 시작했다”며 “당시 영국 선교사들이 대거 중국으로 들어와 복음을 전했고 중국인들은 이에 매우 적대적인 감정을 가졌다”고 말했다.

“예전엔 중국에서 크리스마스를 기념한다는 것이 말도 안되는 얘기였습니다. 하지만 농촌에서 도시로 기독교 신도들이 확대되면서 기업가와 지식 분자 신도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지금은 전례없는 발전을 거듭하게 됐어요. 오히려 우리에게 기독교를 전파한 영국이 쇠락을 경험하고 있죠.”

하지만 삼자교회 목회자를 양성하고 있는 신학원들은 늘어나고 있는 기독교 신자에 비해 목회자가 터무니없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 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쑨톈리(孫天理·25)씨에 따르면 “중국엔 신학대학이 19개뿐이라 늘어나는 기독교 신자를 감당하기가 역부족”이라며 “교인이 수백 명인 교회에 신학원을 나온 목사가 없는 곳도 있다”고 말했다. 신학원을 졸업한 학생들의 진로에 대해서는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 삼자교회 목사가 된다”며 “중국 신학원은 신학 관련 박사학위 과정이 없어 신학을 더 공부하고 싶은 학생들은 영국이나 미국, 스위스 등으로 유학을 떠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여전히 정부 통제받는 종교

지난 4월 10일 베이징의 대표적 가정교회인 서우왕교회 교인 150여명이 옥외예배 중 중국 공안에 연행되고 있다. ⓒphoto 뉴욕타임스
지난 4월 10일 베이징의 대표적 가정교회인 서우왕교회 교인 150여명이 옥외예배 중 중국 공안에 연행되고 있다. ⓒphoto 뉴욕타임스

삼자교회로 대표되는 중국의 공인 기독교는 아직도 ‘반쪽 개방’의 결과물이라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중국 정부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기독교를 통제하기 위해 1982년 12월에 발표한 헌법 제36조가 이러한 비판의 근거다. 정부는 이를 2004년 다시 수정해 발표했지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해석이 가능한 독소 조항들을 여전히 담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헌법 제36조의 1982년 당시 관련 조항은 이렇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은 종교 신앙 자유를 누린다. 어떤 국가기관이나 사회단체 또는 개인도 인민이 종교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거나 종교를 강압하지 못하며 신앙을 가진 자들을 경시해서도 안된다. 국가는 정상적인 종교활동을 보호하고 종교를 이용해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공민의 신체건강을 손상시키며 국가 교육제도를 방해하는 것은 단호히 제압한다. 중국의 종교단체와 종교사무는 외국의 영향력을 받지 않는다.’

여기서 독소 조항이라고 얘기되는 곳은 ‘정상적인 종교 활동을 보호하고’와 ‘외국의 영향력을 받지 않는다’이다. 중국 정부가 말하는 ‘정상적인 종교활동’은 뒤집어 말하면 종교국의 승인을 받지 못한 지하교회는 여전히 보호받을 수 없는 대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뒷부분의 ‘외국의 영향력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 역시 중국 정부가 외국교회나 외국인의 중국 내 선교활동을 엄격히 금하고 있음을 뜻한다. 만 18세 이상의 인민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주겠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종교를 정부 통제하에 두겠다는 중국 정부의 의지가 읽혀지는 대목이다.

세계기독교정보연구원 정병화(39) 목사는 중국 기독교의 자유에 대해 “중국이 갖고 있는 특유의 사회주의를 이해하지 않고는 이야기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중국의 기독교 운영방식을 두고 ‘중국 기독교는 반쪽짜리’라고 폄하하는 교인들이 많지만 중국 정부는 ‘우리는 절반이나 허용했다’는 입장이다”라는 게 정 목사의 시각이다.

중국 정부 단속 기준은 ‘장소’

최근 중국의 지하철에서 성경을 마음껏 펼쳐놓고 있는 중국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반면, 대규모 지하교회인 베이징 서우왕(守望)교회, 상하이 완방(萬邦)선교교회 등이 여러 이유로 문을 닫거나 폐쇄되었다는 소식도 동시에 접하는 게 중국 기독교의 현주소다. 차이나네트워크연구소 함태경(49·베이징대 정치학 박사) 이사는 “현재 중국 정부는 삼자교회에 대해 ‘지도와 감독’, 가정교회에 대해 ‘단속과 탄압’의 두 가지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며 “하지만 지역별로 현지 상황과 정부의 세부정책에 따라 기조가 달라 하나의 잣대로 진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 목사는 “중국 정부가 종교적 제약을 가할 때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은 장소”라고 말했다. 정부가 지정한 장소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이른바 가정교회는 교회 등록 자체가 돼 있지 않아 정부가 이를 ‘불법집회’로 보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1989년 10월 제7차 인민대표대회에서 공표한 중화인민공화국 집회시위행진법에 따르면 “ 관련 행위로 인해 사람이 모일 경우 행위 지도자는 5일 전 정부에 그 내용을 상세히 신고해야 한다. 누구도 어떤 수단으로든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힐 수 없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거기다 최근 중국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모리화(재스민) 집회 움직임도 잠복돼 있어 중국 정부가 예배 장소에 어느 때보다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 4월 10일 베이징 중관춘(中關村)의 광장에서 옥외예배에 참가하려던 지하교회 신도 수십 명이 당국에 의해 버스로 연행돼 인근 초등학교에 구금된 것이 그 대표적 사례다. 사건이 베이징의 대표적 가정교회로 신 도 수가 1000명에 달하는 서우왕교회의 주일 예배시간에 벌어진 일이라 교계의 충격은 더욱 컸다. 서우왕교회는 지난 2009년부터 중국 당국의 감시 속에 마땅한 예배장소를 찾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우왕교회는 베이징대 교수 및 재계 인사들을 비롯한 화이트칼라들로 구성된 대표적 ‘도시교회’다. 이들은 중국 정부의 ‘종교적 탄압’에 맞서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발언을 언론에 내비치기도 했다.

‘지하교회’서 ‘도시교회’로

서우왕교회 사건이 뉴욕타임스 등 전 세계 외신에 보도되면서 중국이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자 삼자회 차이쿠이(蔡葵) 주석이 이를 옹호하고 나섰다.

중국 관영 영자지 차이나데일리의 4월 12일자 보도에 따르면 차이쿠이 주석은 “베이징 기독교도들은 신의 사도이자 선한 시민이어야 한다”며 “옥외 또는 무허가 예배에 참석을 금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익명을 요구한 중국 내 한 목회자는 “지난 2009년 서우왕교회가 예배 장소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건축 헌금으로 한국돈 60억원에 상당하는 액수를 모았다는 말을 들었다”며 “하지만 중국 정부가 건물주에게 압력을 가해 계약이 불발됐고 교인들이 옥외예배를 전전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는 결정적 순간이 되면 통제하려고 하고, 개방사회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궁지에 몰리면 사회주의식 통제에 들어가죠. 아직 중국식 사회주의의 허물을 완전히 벗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모리화 혁명도 마찬가지고요. 최근 정부의 심기가 많이 불편할 겁니다. 이런 체제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중국에서 목회생활을 하기가 힘듭니다. 중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운운하고 비난하기가 조심스러운 것도 이 때문이고요.”

21세기교회, 온누리교회, 소망교회 등 중국에 진출한 한국 교회는 중국 종교사무국에 정식으로 등록된 외국인 종교기관으로 신앙생활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단 허가된 집회 장소에서만 예배를 볼 수 있고 중국인과의 합동예배는 금지라는 조건이 붙는다.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선교활동이나 종교단체 조직, 교육기관 설립도 일절 금지돼 있다.

삼자교회와 양회

중국공산당 통제 아래 종교정책 수행 역할

베이징 동청구에 있는 기독교 양회.
베이징 동청구에 있는 기독교 양회.

삼자교회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한 후 형성된 중국식 교회다. 1950년대 안정적인 신(新)중국 수립을 고민하던 중국공산당이 펼친 대중운동인 삼자혁신운동(三自革新運動) 과정에서 탄생했다. 삼자혁신운동의 목표는 정부의 지도를 받는 전국적인 성격의 기독교 조직을 건립하자는 것이었다.

1954년 중국은 미국의 원조를 받아 중국 기독교 삼자애국운동위원회(三自會)를 건립한다. 이때부터 삼자회에 가입된 교회를 삼자교회라 칭하게 됐다. 삼자교회는 ‘중국 공산당과 인민정부의 지휘 아래 전국의 기독교 신도들이 단결해 조국을 사랑하면서 국가의 법령을 준수하고 자립(自立)·자양(自養)·자전(自傳)의 삼자를 지지해 나가자’는 것을 기치로 내걸었다.

중국기독교협회는 1980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조직된 삼자회의 자매 조직으로 중국 기독교회의 교무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다. 또 중국기독교협회와 삼자애국운동위원회를 통칭한 것이 ‘양회(兩會)’다. 양회는 ‘나라 사랑’이라는 큰 틀에서 당의 지도를 받으며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사상을 지지할 것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때문에 삼자교회는 애국 기독교 성격을 띠며 정부와의 협력을 통해 정부의 종교 정책을 수행하는 임무도 띠고 있다. 중국이라는 사회주의국가 내부에 존재하는 독특한 교회 형태인 것이다. 양회는 삼자교회 신도들이 충성할 대상은 첫째가 정부이며 둘째가 하나님임을 공개적으로 선포하기도 했다.


중국 기독교의 역사

삼자교회·지하교회 발생 역사와 전파 경로 달라

중국 기독교의 역사는 삼자교회와 지하교회로 구분지어 설명할 수 있다. 지하교회는 문화대혁명(1966~1976년)을 기점으로 농부나 공장 노동자가 많은 안후이성(安徽省)과 허난성(河南省)을 중심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가난한 농민들이 기독교 부흥 운동의 중심축이었다. 중국이 2차 아편전쟁에 패배하면서 체결된 톈진조약으로 중국에 정식으로 들어오게 된 기독교가 1949년 공산정권 수립과 함께 탄압을 받아 세가 꺾였다가 문화대혁명 시기 부흥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초 지하교회에서 육성된 신도들이 점점 도시로 범위를 넓혀가며 복음을 전한 게 오늘날의 지하교회, 즉 가정교회 형태를 띠게 됐다. 기독교 전파에는 도시로 이주해온 공장 노동자들이 동향 사람들을 상대로 선교를 했던 것이 주 형태였다.

삼자교회의 역사는 1949년 베이징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를 기점으로 시작됐다. 당시 8명의 종교계 인사(기독교 5명, 불교 2명, 이슬람교 1명)가 모여 종교정책에 관한 토론을 벌였다. 이들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동시에 이를 남용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종교 내면에 숨겨진 부패와 악습, 그리고 제국주의 요소를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를 위해 종교가 공산당과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결의했다.

그 후에도 삼자교회는 여러 가지 굴곡을 거친다. 1950년 당과 국가가 원하는 교회와 기독교인으로 의식화를 결의했지만 1960년대에는 1950년대보다 더 강력한 정부의 관리와 통제를 받았다. 특히 1961년 주일학교 활동이 금지됐고 1966~1976년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홍위병들이 삼자애국운동위원회를 강제로 해체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러다 1980년 공산당의 정책 전환과 전략적 고려로 삼자애국운동위원회 활동이 재개됐으며 이때부터 삼자교회와 지하교회와의 본격적인 대립도 시작됐다. 1982년에는 삼자교회가 해외의 지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1989년 톈안먼사태 후부터는 정부에서 삼자교회를 전면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유마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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