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내 비주류 전락… 원내대표 경선 후 칩거에 당 복귀? 당분간 정국 관망하다 반격 시도할 듯
이재오 특임장관이 지난 5월 9일 전국과학기술정보협의회 초청 간담회가 시작되기 전에 입을 굳게 다문 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photo 연합뉴스
이재오 특임장관이 지난 5월 9일 전국과학기술정보협의회 초청 간담회가 시작되기 전에 입을 굳게 다문 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photo 연합뉴스

이재오 특임장관은 지난 4월 13일과 20일 두 차례에 걸쳐 한나라당 내 계파 모임에 공개적으로 참석했다. 한나라당 내 친이(親李)계 최대 계파 모임인 ‘함께 내일로’였다. 친이 주류 의원 65명이 속해 있는 ‘함께 내일로’ 회원들이 이 장관을 초청한 형식의 자리였지만, 정치권에선 이 장관이 4·27 재보선을 앞두고 계파 결속 작업에 나선 것이란 해석이 많이 나왔다. 현역 의원이기도 한 이 장관도 이 모임의 회원이다.

이 자리 이후 20여일이 지난 5월 11일, ‘함께 내일로’에 속한 장제원 의원 등 초선 의원들은 이 모임의 해체를 모임 운영위원회에 공식 건의하기로 했다. 장 의원은 “‘함께 내일로’가 당내 파벌로 비친 점을 반성하고 다음 주 모임 해체 문제를 공식 논의하기로 뜻을 모았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이 장관이 이끌었던 ‘함께 내일로’에서 이 장관의 색깔을 빼겠다는 흐름으로 해석됐다.

불과 한 달이 채 안 된 사이 이 장관과 그를 중심으로 한 한나라당 내 친(親)이재오계에 불어닥친 변화는 한나라당의 4·27 재보선 패배에서 비롯됐다. 이명박 정권 출범 후 3년여간 정국을 주도해온 이 장관과 친이계가 재보선 패배의 책임론에 휩싸이면서, 곧이어 5월 6일 치러진 원내대표 경선에서 이 장관이 밀었던 주류의 안경률 의원이 중도 비주류의 황우여 의원에게 패했다. 이로 인해 이재오 장관 진영은 활로를 새로 모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배신 한 번이면 족하다”

이재오 장관은 5·6 원내대표 경선 이후 사실상 칩거에 들어갔다. 지역구가 있는 서울 은평의 자택과 세종로 정부청사 그리고 이미 예정돼 있던 외부 강연 일정을 소화할 뿐 여의도 국회 쪽엔 발길을 끊었다. 지난 5월 9일에는 새벽에 자택에서 지하철을 타고 정부청사에 나와 체력단련장에서 운동을 한 뒤 청사 집무실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자택으로 돌아갔다. 언론 접촉도 피하고 있다. 이 장관의 측근들은 “이 장관이 국정 난맥의 장본인으로 자신을 지목하는 한나라당 내 분위기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이 장관은 경선 뒤 주변에 “배신은 한 번으로 족하다” “희생양도 한 번이지, 희생양이 직업은 아니지 않으냐”고 토로했다고 한다. 이 장관은 또 “내가 권력을 이용해 땅을 한 평 샀나, 돈을 한 푼 받았나. 정권 성공을 위해 일한 나더러 ‘권력의 화신(化身)’이라니 답답할 노릇”이라며 “주류 의원들이 혼자만 살겠다고 흩어질 수 있느냐. 내가 정치를 잘못한 것인가,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잘못한 것인가”라고도 했다고 한다. 이 장관은 원내대표 경선 사흘 전에도 트위터에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허 참 그게 아닌데…’ 하고 웃어넘겨라”라고도 썼다.

이 장관이 거론한 ‘배신자’가 누구냐를 놓고 당내에선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을 겨냥한 것’ ‘이 장관의 2선 후퇴를 요구하며 쇄신을 주도한 소장파를 지칭한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이 장관이 ‘배신’의 주체로 이 전 부의장을 겨냥했다는 해석은 5월 6일 황우여·안경률·이병석 의원 간에 치러진 원내대표 경선에서 이 전 부의장이 지원한 것으로 알려진 이 의원 지지표의 향방을 근거로 나왔다. 당시 1차 투표에서 3위를 한 이 의원 지지표(33표)가 황·안 의원 간에 치러진 2차 결선투표에서 같은 친이계인 안 의원 쪽으로 갈 것이란 예상을 깨고 대부분 황 의원 지지로 돌아섰다. 이 의원 지지표가 안 의원에게 갔으면 안 의원이 이길 수 있었다. 이 의원 지지표가 2차 투표에서 황 의원 지지로 가게 된 배경에 이 전 부의장의 ‘역할’이 있었다고 이 장관이 의심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 장관과 이 전 부의장 두 사람은 모두 이런 관측을 부인했다. 이 장관도 “배신 언급은 SD(이상득)를 겨냥한 말이 아니라 친이계 소장파를 두고 한 말”이라고 했다. 지난 2008년 17대 총선에서 ‘이명박 바람’을 타고 당선된 수도권 초·재선의 소장파 의원들이 4·27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하자 이 장관의 2선 후퇴를 요구하며 쇄신을 요구하고 있는 데 대한 분노를 표시한 것이란 얘기였다. 수도권 소장파 의원들은 재보선 이후 치러진 원내대표 경선에서 비주류의 황우여 의원을 밀어 당선시킴으로써 이 장관에게 ‘일격’을 가했다. 이재오계의 한 의원은 “이들 중에는 이재오계로 분류됐던 사람들도 상당수 있는데 누구보다 먼저 이 장관의 등에 칼을 꽂는 행태를 보인데 대해 이 장관이 분노하고 있다”고 했다.

“장관직 사퇴는 없다”

하지만 이재오계와 이상득계 내부에선 서로를 향해 “먼저 배신한 건 너희들”이라며 삿대질을 하는 양상도 있다. 이 연장선상에서 4·27 재보선과 원내대표 경선을 기점으로 친이계의 분화가 본격화했다는 관측이 많다. 이명박 정권 출범 후 친이계는 이 장관과 이 전 부의장이 양분해 왔는데, 이번 원내대표 경선 결과 한나라당 내 세력 구도가 ‘이재오계 vs 친이 소장파+이상득계+박근혜계’로 재편됐기 때문이다. 수도권 친이 소장파와 이상득계가 박근혜 전 대표 진영과 전략적 연대를 통해 이 장관 측을 포위한 구도다. 이 장관 측도 이런 구도 변화를 인정하고 있다. 이재오계의 한 의원은 “이제 이재오계가 비주류가 된 것”이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장관은 당분간 정국 운영에서 한발 떨어져 관망할 가능성이 크다고 측근들은 전하고 있다. 이 장관의 측근은 “비주류가 당의 운영을 맡게 된 상황에서 비주류가 정국 운영을 주도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는 것이 이 장관의 생각”이라며 “일단 비주류들의 정국 운영을 지켜볼 생각”이라고 했다. 일각에선 이 장관이 특임장관에서 사퇴할 가능성도 거론하고 있다. 이와 관련, 이 장관은 이미 5월 6일 개각 전에 이 대통령에게 ‘언제든지 백의종군할 각오가 돼 있다’는 뜻을 밝혔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이 장관이 계속 역할을 하라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이 장관도 자신의 사퇴 가능성이 거론되자 5월 11일 측근을 통해 “장관직 사퇴 의사는 없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6월 말이나 7월 초로 예상되는 한나라당 차기 전당대회를 기점으로 이 장관이 정치 활동을 재개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이 장관과 가까운 의원들은 이 장관에게 “정국 운영의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당으로 돌아오는 것도 방법”이라고 권하고 있다. 이 장관도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있어 연말에는 당으로 복귀하는 문제를 고민해 왔다는 점에서 전당대회를 전후해 당으로 복귀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일부 친이계 인사들은 “이 장관이 당권 도전에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고도 말했다. 하지만 이 장관 측은 “이 장관은 설령 당으로 돌아오더라도 자신이 당내 갈등의 축이 되는 상황은 원치 않는다”고 했다.

“정치란 밀물과 썰물이 있는 것”

이 장관의 한 측근은 “이 장관은 서두르지 않고 사태를 관망할 것”이라며 “정치란 밀물과 썰물이 있는 것”이라고 여운을 남겼다. 실제 이 장관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완전히 실각했다고 보기엔 이르다는 관측도 적지 않다. 친이계가 분화에 들어갔지만 이 장관을 중심으로 한 친이계가 여전히 60여명에 달한다. 실제 이 장관이 밀었던 안 의원은 이번 원내대표 경선 1차 투표에서 58표를 얻었고, 2차 결선투표에선 64표를 얻었다. 더욱이 이들 이재오계도 수도권 소장파들의 ‘반(反)이재오’ 전선에 맞서 세력을 재정비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함께 내일로’ 해체 추진이 친이계 초·재선 의원들과 정몽준 전 대표와 가까운 초·재선 의원들을 중심으로 20여명 규모의 새로운 정책 연합 결성 움직임으로 이어진 것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동안 덩치를 키워온 전략이 부작용만 낳고 실패한 만큼, 몸을 가볍게 소그룹으로 분화해서 내년 총선·대선 전략을 짜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수도권 초·재선 소장파 의원들이 중심이 돼 결성한 ‘새로운 한나라’가 중도 개혁적 가치를 내걸고 있는 만큼 ‘가치 연합’에 중점을 두고 정책 개발에도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친박(親朴) 진영 내에서조차 “이 장관이 비주류 정치에 능숙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도 말하고 있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이 장관이 올 연말 대선 주자들이 활동을 본격화할 시점에 맞춰 본격적인 정치 활동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이 장관과 가까운 한 의원도 “현 정권 출범의 핵심인 이 장관이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진 않을 것”이라며 “다만 이 대통령의 의중이 어느 방향으로 흐를지가 변수가 될 것”이라고 했다.

최경운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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