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공사’ 부친 따라 중1 때 도미… 클린턴 국무장관이 강력 추천
“겸손하고 순발력 강해” 평가… ‘골목친구’ 정진석 전 수석 “성 김은 효자”

“성 김 대사 보낸 건 한국에 대한 배려” 분석
“한국 사람처럼 한국말… 너무 잘 알아 버거워” 시각도
한·미수교 129년 만에 처음 한국계 주한 미국 대사로 부임하는 성 김 지명자. ⓒphoto 연합
한·미수교 129년 만에 처음 한국계 주한 미국 대사로 부임하는 성 김 지명자. ⓒphoto 연합

상원 인준 청문회를 마친 성 김(Sung Kim·한국명 김성용·51) 차기 주한 미국 대사가 7월 부임한다. 그는 1882년 양국이 수교한 후 129년 만에 처음으로 부임하는 한국계 주한 미국 대사다.

김 대사는 올 초까지만 해도 주한 미국 대사와는 인연이 없어 보였다.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는 미 국무부 동아태국의 조 도노번 수석 부차관보를 캐슬린 스티븐스 대사의 후임으로 고려했었다. 지난 1월 외교 전문지인 ‘포린 폴리시’가 이 같은 기류를 보도했으며 우리 정부도 도노번 부차관보가 부임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스티븐스 대사에 이어 두 번 연속 재외 공관장 경험이 없는 커리어 외교관이 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일었다. 오바마 미 대통령도 한·미 관계가 한 단계 상승한 것을 고려, 한국에서 호감을 가질 만한 인물을 찾아보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조 도노번 국무부 동아태 수석 차관보 카드를 접은 후, 미국에서 인정받는 정치인들을 후임 대사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일부 한반도 전문가들이 국방장관 물망에 올랐던 척 헤이글 전 상원의원을 추천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국무부는 지난 3월 중국계인 게리 로크 상무장관의 주중 대사 지명이 중국과 미국 양측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을 눈여겨보았다. 주재국의 반응도 좋고, 미국 내의 중국인 커뮤니티에서도 호평이 나오자 이를 한국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때부터 오바마 행정부는 한국계인 성 김을 지명하는 방안을 적극 고려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직업외교관들 주한 미 대사 선망

미국 측의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를 지낸 그가 주한 미국 대사로 내정된 것은 지난 5월이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그를 백악관에 추천했다. 김 대사를 한국에 보내자는 제안은 백악관 내에서 즉각 호평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백악관은 한국계인 김 대사가 한국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북한 상황에 대해 정통하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김 대사를 자신이 중시하는 한·미 관계를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인물로 판단했다는 것이 핵심 외교 소식통의 전언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6월 워싱턴DC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발표한 ‘한·미 동맹 미래 비전’을 통해 양국 관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정도로 한·미 동맹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이 합의문은 지난해 외교통상부가 대한민국 외교사를 결산하기 위해 출간한 ‘한국 외교 60년’에서 가장 중요한 13개의 외교 문서에 포함될 정도로 의미가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남북통일과 북한 인권문제까지 처음으로 포함시킨 이 문서를 통해 양국관계를 격상시키고 싶어 했다. 두 차례 방한과 각종 다자(多者) 회의를 통해 이명박 대통령과 우의를 다진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계인 성 김이 주한 미 대사로 적임자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의 부임에는 국무부 내의 역학관계가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주한 미국 대사는 아시아를 전공하는 외교관들이 가장 선망하는 포스트다. 중국과 일본은 정치적으로 임명되는 대사들이 부임하는 국가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커리어 외교관들이 대사로 부임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미 국무부 내에는 한국을 커리어 외교관들이 대사로 부임하는 포스트로 유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하다. 이 때문에 클린턴 장관이 한국계 성 김을 절묘한 카드로 제시했다는 시각도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좋아하고, 한국이 환영할 만한 인사를 보내면서도 주한 미 대사에 커리어 대사를 부임시키는 관행을 유지시켰다는 것이다.

1등서기관에서 2년 만에 대사로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 대사는 중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펜실베이니아대와 로욜라 로스쿨을 졸업한 후, 로스앤젤레스에서 검사 생활을 하다가 외교관이 됐다. 주한 미국 대사관 외에도 일본, 홍콩, 쿠알라룸푸르 등 주로 아시아에서 근무했다. 1990년대에 이어 2003년부터 주한 미국 대사관에 1등서기관으로 근무하다가 2006년 주한 미 대사를 지낸 크리스토퍼 힐 동아태차관보에 의해 한국과장으로 발탁됐다. 두 단계를 뛰어넘는 초고속 승진이었다.

김 특사는 2006년부터 2008년까지 국무부 한국과장으로 일한 후, 2008년 7월 미 상원 청문회를 거쳐 ‘대사(Ambassador)’ 직위를 받았다. 1등서기관에서 대사가 되는 데 불과 2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는 2009년 2월부터 미 국무부 북핵특사로 일했다.

김 특사는 특유의 겸손한 자세로 어려운 현안을 순발력 있게 처리하면서 고위 관계자들의 높은 신임을 받아왔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그를 퍼스트 네임인 ‘성’으로 부른다. 커트 캠벨 동아태 차관보, 스티븐 보스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 등은 해외근무를 나가려는 그를 붙잡기도 했다.

한국의 외교가에서는 김 대사의 부임을 환영하고 있다.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지난 6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성 김 대사를 한국에 보낸 것 자체가 미국이 상당히 배려한 것이다. 일부에선 성 김 대사가 얼마 전에 국무부 한국과장을 했으니까 급이 낮지 않으냐고 하는데 그는 이미 2008년 6자회담 수석대표가 됐을 때 상원 인준 청문회를 통과한 대사”라고 했다. “한국 정서에도 부합하고, 능력이 검증됐고, 신뢰도가 크니까 미국에서 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정부 일각에서는 그의 부임을 부담스러워 하는 기류도 있다. 한국 사람처럼 한국말을 하고, 한국 사회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가 우리 정부엔 버거운 상대가 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또 그가 주한 미 대사관에 두 번째 근무할 당시 1등서기관이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부친은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주일 공사

미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더욱 강화된 한·미 동맹을 역설하는 성 김 신임 미국 대사 지명자. ⓒphoto 연합
미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더욱 강화된 한·미 동맹을 역설하는 성 김 신임 미국 대사 지명자. ⓒphoto 연합

일각에선 김 대사의 아버지 김기완씨(다른 이름 김재권)가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주일 한국 대사관에서 국정원 공사로 근무한 것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었다. 당시 김 대사의 아버지가 어떻게 연관됐는지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이나 야당에서 반대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외교부에서도 부임하는 주한 미국 대사에 대해 야당에서 반대하는 초유의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기류가 있었다.

이 문제는 김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박지원 의원이 앞장서서 해결한 후, 논란이 가라앉았다. 당 원내대표를 거친 후, 차기 민주당 대표로도 거론되는 그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2008년경 김 특사가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으로 6자회담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할 때 아버지 전력이 일부 언론에 보도돼 보고했더니 김 전 대통령은 ‘그 아버지와 성 김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했으니 미국과 한국을 위해 외교관으로 성공하길 바란다’고 했다”고 밝혔다.

한국계 전문가로 백악관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그의 부임은 실(失)보다 득(得)이 훨씬 많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무엇보다 양국 간 문화의 차이 등으로 인한 잘못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한 외교관은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은 당시 주한 미국 대사가 한국의 정서를 제대로 알고 대응했더라면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건으로 번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한국의 문화와 감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 대사는 이런 미묘한 문제에 잘 대응할 것”이라고 했다.

특히 올해 71세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이 다시 악화될 경우, 언제라도 한반도에 급변 사태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북한 문제에 정통한 그의 존재는 한·미 동맹에 유리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많다.

그는 2003년 북핵 6자회담이 시작된 후, 빠지지 않고 참석했으며 10여차례 이상 북한을 방문했다. 북한의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하는 협상을 이끌었고 2008년 6월 현장에서 이를 목격하기도 했다. 특히 북한 유엔대표부의 김명길 공사와 수시로 연락을 하며 막후에서 미·북 관계를 다뤄왔다. 미·북 관계가 비교적 활발하게 움직일 때 크리스토퍼 힐 동아태 차관보를 수행해서 북한에 가는 업무는 맡아놓고 했다. 국무부 한국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전시 작전통제권 전환, 북한의 1차 핵실험, 한국 대통령 선거 등을 맡아 처리했다. 백악관과 국무부에서는 그가 한국과장을 마친 후에도 한·미 동맹과 관련한 민감한 사안이 생기면 그에게 조언을 요청할 정도였다.

그가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톰 도닐런 국가안보보좌관, 데니스 맥도너 부보좌관, 대니얼 러셀 아태담당 선임보좌관도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장점이다. 김 특사는 2008년에 대사 타이틀을 달 때 상원 인준 청문회를 통과하면서 미 의회로부터도 신임을 받고 있다. 주한 미 대사 인준 청문회가 40분 만에 쉽게 끝난 것도 미 의회가 그의 활동에 대해 신뢰감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화여대 미대 출신 부인과 딸 둘

한국명이 ‘성용’인 김 특사는 한국말에도 능통하지만, 북한과 협상을 하거나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철저히 영어를 사용한다. 그는 1990년대 초반 서울에 처음 근무할 당시 지인들의 소개로 이화여대 미대 87학번인 정재은씨를 만나 결혼했다. 현재 중학생, 초등학생인 두 딸을 두고 있다.

김 대사의 가장 친한 한국인 친구로는 정진석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있다. 두 사람은 1960년생 동갑으로 서울 성북동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골목친구’다. 정 전 수석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1993년 한국일보 워싱턴 특파원으로 부임할 때 덜레스 공항으로 김 대사가 마중 나왔고, 그의 집에서 2주 동안 머물렀다”고 했다. 같은 해 김 대사가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결혼할 때 정 수석이 함을 졌을 정도로 친밀하다. 정 전 수석은 김 대사를 강직하고 부모에게 효심이 많은 인물로 평가한다. 정 전 수석은 “김 대사가 부친이 폐암으로 투병할 때 워싱턴과 로스앤젤레스를 자주 오가며 병간호를 했으며 홀로된 어머니에게도 자주 전화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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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 조선일보 정치부 외교안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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