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복지… 형평이 효율 잠식
정경유착 속 대중 눈치만
정치가 결국 경제 발목 잡았다
지난 11월 16일 이탈리아의 새 총리로 임명된 마리오 몬티가 로마의 대통령궁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photo AFP
지난 11월 16일 이탈리아의 새 총리로 임명된 마리오 몬티가 로마의 대통령궁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photo AFP

17년간 이탈리아 정치의 중심에 서있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75) 총리가 11월 12일 사임했다. 베를루스코니는 2008년 조기 총선에서 압승하여 연립정부를 이끌어왔으나 재정위기와 디폴트 사태를 더 이상 감내하지 못해 중도하차했다. 총리의 사임을 통해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정치가 가능하리라는 전망이 나오기도 하지만 복잡다기한 문제를 푸는 것이 어렵다. 그런 만큼 상당 기간 정치사회적 혼돈이 이어질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위기관리 내각을 이끌 마리오 몬티는 이탈리아 명문 밀라노의 보코니대학 총장을 역임하고 이사장으로 있으며 유럽연합에서의 경력도 화려하여 국내외적으로 기대를 모은다.

베를루스코니, 그는 누구인가

한 시대를 풍미한 베를루스코니는 어떠한 인물인가. 재계 인사가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유와 배경, 그 비결은 무엇인가? 베를루스코니는 1936년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밀라노 국립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여 광고법에 대한 졸업논문을 작성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 부동산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으며 밀라노 외곽의 신도시인 밀라노 두에 지역의 대규모 아파트 건설사업에 참가하였다. 이후 미디어산업에 진출하여 지방 방송국을 시작으로 전국적 규모의 민간 방송 채널을 세 개나 소유하는 미디어 재벌로 변모하였다. 그 과정에서 동향인 밀라노 출신 사회당 대표였던 베티노 크락시 전 총리의 비호 아래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크락시는 1980년대 중반 4년여 동안 총리직을 수행한, 이탈리아 경제의 재도약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대중적 인기를 지닌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였다. 그러나 1992년 부패추방운동인 마니 풀리테가 진행되면서 정경유착의 화신으로 지목되었다. 밀라노 검찰이 수사를 진행하자, 1994년 초 튀니지로 망명하여 2000년 1월 그곳에서 당뇨병으로 사망하였다.

베를루스코니에게 크락시의 부재는 재앙이었다. 그는 자신의 회사와 동생인 파올로 베를루스코니에게까지 검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수세적 자세에서 직접 정치 일선에 뛰어드는 방식으로 위기를 타개하려 했다. 정계 진출에 대한 이러한 동기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그를 괴롭히게 되었고 자주 재판대에 올라야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마니 풀리테와 총선

다수대표제에 기초한 새로운 선거법으로 치러진 1994년의 총선에서 신생정당인 포르자 이탈리아는 북부동맹과 민족연합과의 연합공천으로 승리하여 중도우파 연정을 구성하게 된다. 이로써 베를루스코니는 총리에 등극하였고 이후 17년간 총리 아니면 야당의 지도자로 이탈리아 정치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게 된다.

많은 나라에서 재벌이나 기업인이 대권에 도전한 사례들이 있지만 성공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미디어 재벌이자 경제인인 그가 어떻게 단시일 내에 거대 정당을 창당할 수 있었으며 선거에서 승리하였는가는 관심의 대상이다. 베를루스코니의 창당은 전무후무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1986년 AC밀란 축구팀을 인수하여 유럽과 세계 클럽 챔피언을 여러 차례 차지, 전성기를 맞이했다. 베를루스코니는 전국적으로 이 팀을 응원하는 팬클럽과 산하 기업망을 동원하여 지구당 조직으로 개편하는 마술을 보여주었다. 축구는 이탈리아인들에게 브라질 못지않게 일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하다. 포르자 이탈리아라는 정당의 이름도 축구경기에서 국가대표팀이 선전하라고 응원하는 구호로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 결과 정당 결성 수개월 만에 총선에 참가하고 결국 승리하는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결과를 만들게 된다.

물론 몇 가지의 성공 비결이 있었다. 우선 부패수사를 통해 기존 정치인의 대부분이 감옥에 가거나 정계를 은퇴한 공백 상태에서 정치 신인들이 각광받을 수 있는 환경이 찾아왔다. 베를루스코니는 자신이 소유하는 기업의 간부들을 정치 일선에 후보로 내세워 참신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운영하는 방송 채널을 통해 이들 후보의 광고를 도맡으면서 시민들에게 친숙한 이미지를 줄 수 있었다.

반면 야당인 좌파는 공산권의 붕괴로 인해 정체성의 혼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베를루스코니 진영의 치밀한 선거 전략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그의 미디어 정치는 이렇게 서막을 보여준 것이다.

장기집권의 비밀

출범한 베를루스코니 1기 정부는 단명하였다. 연정의 파트너였던 북부동맹과 민족연합은 정치적 이해가 상반되었으며 상호 간에 주도권 다툼이 가열되자 정부의 위기로 이어졌고 중도우파 정부는 급기야 9개월 만에 붕괴한다. 1996년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야당이었던 좌파에 유권자들이 기회를 주었다. 특히 구공산당인 좌파민주당은 총리 후보로 볼로냐대학 경제학과 교수 출신인 로마노 프로디를 내세움으로써 레드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로써 베를루스코니는 야권의 지도자로 5년을 보내게 된다.

2001년의 총선은 우파의 승리가 예견되는 사실상 싱거운 선거를 맞이하게 된다. 프로디는 유럽연합의 집행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국민은 좌파 정권에 대한 실망이 지배적인 분위기였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경제살리기 차원에서 베를루스코니에게 기회를 한번 더 주자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그는 선거일에 임박하여 이탈리아인을 위한 협약이라는 문건을 제시하였는데 주 내용은 일자리 창출과 연금 수준의 상승 등이었다.

이해 상충, 국제 언론의 비판

당시 총선에서는 여야의 대결보다는 영국신문 파이낸셜타임스와 프랑스신문 르몽드에 의한 베를루스코니 비판이 화제로 등장하였다. 언론을 소유한 재벌이 정치 권력마저 차지한다면 이는 이해의 상충(conflict of interests)이 되며 그가 유럽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베를루스코니는 이러한 기사들이 이탈리아에 대한 내정간섭이며 부당하다는 주장으로 반박하였다.

실제로 재집권한 베를루스코니는 자신의 민간 채널에 더해 국영방송인 RAI마저도 장악, 언론 독점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RAI 기자단은 그의 방송국 장악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기에 편성의 자율권을 주장하면서 적지 않은 긴장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알 권리와 비판할 권리가 차단되면 건전한 민주주의가 보전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베를루스코니는 이러한 국내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5년간 안정적으로 집권할 수 있었고 이탈리아 사회에 대한 지배력이 더욱 배가되었다.

그러나 선거전을 통해 제시한 이탈리아인을 위한 협약의 내용은 지켜지지 않았으며, 경제성장은 부진하였고, 청년실업과 재정적자의 악순환은 해소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2006년 선거에서 좌파가 다시 집권하게 된다.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을 마치고 돌아온 프로디는 다시금 총리 후보로 나서 베를루스코니를 두 번째로 패퇴시켰다. 그러나 프로디 좌파연정은 출범부터 삐꺽거렸으며 연립정권 내 소수당들의 주장이 거세지면서 예정된 정부 재정의 건전화와 성장동력의 회복 등에서 실패하게 되고 급기야 2008년 초 의회의 신임을 잃으면서 붕괴하였다.

조기총선으로 치러진 선거에서 승리, 베를루스코니는 세 번째로 총리에 오르게 된다. 2008년의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심판은 그가 좋아서 표를 주었다기보다는 두 번이나 지지했던 좌파정권이 기대에 못 미치고 우파의 부정적 모습과 별반 차이를 보이지 않았던 점이 중요했다. 즉 대안 부재의 논리가 우파의 승리 비결이라 볼 수 있다.

이후 베를루스코니가 보여준 행태는 국민을 실망시키는 것이었다. 경제회복은 요원하고 이탈리아의 재정악화는 가속화하였다. 잃어버린 10년 동안의 저성장은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국민 불만은 쌓여만 갔다. 그는 개혁에 성공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개인적 추문과 스캔들, 권력 오남용 및 이해상충으로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고갈시키는 위험한 게임을 지속하였다. 그의 사임은 필연이라 볼 수 있다.

이탈리아 정치사회 구조

대통령 관저를 떠나고 있는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 ⓒphoto AP
대통령 관저를 떠나고 있는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 ⓒphoto AP

오늘의 이탈리아 위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모든 책임이 베를루스코니 한 사람에게 돌아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매우 흥미롭다. 만일 그렇다면 이제 그가 사임했으니 이탈리아는 좋아질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전후 이탈리아는 1950년대의 경제 기적기를 거치고 1960년 로마올림픽 경기를 성공적으로 치르면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석유 위기로 어려운 1970년대를 보냈지만 1980년대의 경제적 붐으로 중소기업 중심의 세계화라는 모델을 제시하였고 급기야 1987년에는 국민총생산 기준으로 영국을 제치고 세계 5대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정치·행정 분야에서는 경제적 성공에 비해 많이 뒤떨어진 것으로 평가받아왔다. 파시즘의 일당 독재를 극복한다는 정신으로 채택한 단순비례대표제 방식의 선거와 내각책임제의 결합은 선거 결과 수십 개의 정당을 양산하였다. 단일 정당이 의회의 절대다수를 점하지 못한 상태에서 연립정권이라는 방식은 필수였다. 그 결과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기제가 제대로 작용하지 못해 마니 풀리테 이전까지 정부의 평균수명이 11개월에 불과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정치와 경제의 부조화는 경제력에 비해 국제적으로 파워를 갖지 못하게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비효율의 정치는 복지국가의 보편적 실시와 함께 공공부문의 비약적 확대를 야기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정치가 개입하는 유착의 관행이 자리잡게 되었다. 1992년의 마니 풀리테 부패수사는 역설적으로 이탈리아의 경제적 붐이 전성기에 달하던 시기에 발생하였는데 이는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전형적 사례로 이해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정권 교체가 잦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인 인물 기준으로는 매우 안정적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즉 과거 기민당의 정치인 중에서는 40여년간 내각에서 총리, 외무, 내무 및 기타 장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사실상 장기집권을 지속한 인물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행태를 들어 이탈리아의 정치가 안정과 불안정의 변증법 내지 민주주의의 실험실이라는 지적이 있어왔다.

정경유착 부패와 문화

정경유착의 부패구조는 이탈리아 문화의 특징과 연결된다. 이탈리아는 중세 이후 자치도시적 전통이 강하며 서기 476년 로마제국 붕괴 이후 반도에서의 통일은 1861년에 와서야 가능했다. 북부 중심의 통일과정은 남부의 소외와 저발전을 영속화했으며 지금까지도 남부와 북부의 격차는 고질적인 지역 문제다.

자치시 전통은 가족주의와 맞물리면서 독특한 정치문화를 탄생시켰다. 강력한 정부의 부재는 가족과 친족 중심의 사회구조를 만들었으며 20세기 후반기의 정치 행태에서도 후견제적 관행이 자리잡게 된다. 후견제는 정치인이 유권자의 투표에 대한 대가로 반대 급부를 제시하는 것으로 현대적 대의민주주의에 위배되는 모습이다.

지방 차원의 각종 관급공사에서 발생한 유착의 행태는 결국 중앙정치 무대의 개혁을 저해했으며 특히 산업화에서 지식경제사회로의 이행을 가로막는 요인이 된다. 즉 가족중심의 중소기업은 산업화 시대에서 틈새시장을 맡으면서 지역경제의 세계화라는 산업지역 모델을 제시하였지만 정보화사회로의 이행에서 뒤처지는 요인이 되었고 결국 이탈리아 경제의 부진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탈리아의 미래는

베를루스코니의 퇴장으로 이탈리아 정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일단 중립적 기술관료 내각의 출범으로 급한 불을 끌 수는 있겠지만 필요한 개혁조치가 진행될지는 의문이다. 내각책임제의 특성상 의회 내의 안정적 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포르자 이탈리아와 야당인 민주당은 새 내각에 지지를 표명하고 있지만 사안에 따라 어떻게 나올지 예측하기 어렵다. 대체로 재정위기와 경제활성화의 제한된 목표를 기준으로 한다면 1년 정도의 기한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렇다면 2013년의 총선 일정이 앞당겨지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일부에서 베를루스코니의 완전한 퇴장을 가정하는 의견이 있는데 사실상 그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 자신은 정계 은퇴를 표명한 적이 없으며 국회의원으로서 그리고 정당의 대표로서 활동할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복지와 포퓰리즘

이탈리아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유럽은 전후 복지국가를 성공적으로 실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사회모델은 효율에서 미국에 뒤지지만 형평과 연대라는 가치로 존중받아 왔다. 그러나 최근 남유럽 사태는 과도한 복지가 야기할 수 있는 폐해가 크며 따라서 형평이 효율을 잠식하는 수준에 이르러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유연안전모델로 알려진 덴마크의 경우 시장의 효율과 사회적 형평의 결합으로 이상적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보편적으로 적용되기 어렵다는 것이 다수의 시각이다. 베를루스코니가 지배한 지난 17년간 이탈리아 사회는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개혁하지 못한 채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면서 위기를 맞이하였다.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가 결국 국가를 부도사태로 몰아간 것이다.

가처분 소득에 비해 과도하게 부담되는 사회복지 비용은 기업으로 하여금 추가적 고용을 꺼리게 했으며 이는 청년실업의 구조화를 야기했다. 사실 유럽에서 이탈리아는 독일과 함께 65세 인구가 가장 많은 초고령화사회에 이미 진입한 상태이다.

결국 해답은 연금 중심의 사회복지제도의 수술을 통해 돌파구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19세기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은 20세기에서도 핵심적 문제였듯이 오늘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방정식이라 생각된다. 효율을 희생하는 그 어떠한 형평도 지속가능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우리의 복지 논의는 유럽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김시홍 한국외국어대 이탈리아어과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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