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6일 온라인 취임식을 마친 박원순 서울시장이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시민들과 만나 지지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DB
지난 11월 16일 온라인 취임식을 마친 박원순 서울시장이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시민들과 만나 지지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DB

“다 이리 가까이 오세요. 왜 멀리 떨어져 앉아 계십니까.”

지난 11월 10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 있는 서울시 민원전화 ‘120 다산콜센터’ 건물. 업무 현황을 파악하려고 이곳을 찾은 박원순 서울시장은 보고를 받는 과정에서 중앙 탁자 뒤에 의자를 놓고 일렬로 앉은 실무자들을 가운데로 모았다.

이들은 평소 관행대로 시장 가까이 앉은 간부들 뒤편에 간이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는데 박 시장이 “아니 옆에 있어야 하고 싶은 얘기도 하고 그러죠”라며 중앙으로 끌어모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장과 배석한 간부, 시의원, 실무자들이 한 덩어리로 오밀조밀 섞여 앉는 이색적인 풍경이 연출됐다. 공식 보고 자리가 다과회처럼 변한 것이다.

격식과 권위를 타파하는 박 시장의 파격 행보는 한 달 내내 이어졌다. 고급 승용차 에쿠스를 거부한 채 전에 쓰던 승합차 카니발로 출퇴근을 고집하고, 시청 본관 출입문에 우글대던 방호원들도 대폭 줄였다. 시장접견실을 없애고, 집무실은 책으로 뒤덮인 작업 공간처럼 만들었다. 한쪽 벽은 후보 시절 시민이 응원 메시지와 바라는 점을 적은 메모지(포스트잇)로 형형색색 빼곡하게 채웠다. 세종문화회관을 빌려 하던 취임식을 인터넷 온라인 중계로 대체하고, 오세훈 전 시장이 “혹시 실수할까봐” 꺼리던 트위터를 매일 40~50건씩 올리며 내키는 대로 소통을 시도한다. 공식 일정에도 없는 행사가 박 시장 트위터에 올라와 담당 시 직원들이 상황을 파악하느라 곤혹을 치르기도 한다. 양복 차림으로 어깨에 가방을 메고 출퇴근하며 말단 직원에게도 허리를 꺾어 이른바 ‘배꼽 인사’를 한다.

서울시 직원들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다. 오세훈 전 시장이 본인은 의자에 앉은 채 상대방을 세워놓고 각종 보고를 받았던 것과 달리, 박 시장은 의자를 주면서 “왜 힘들게 서서 그러십니까”라며 앉으라고 권하는 모습에 감동했다는 간부들이 많다. 한 주무부서 과장은 “오 시장은 보고 내내 아무 말 없이 무뚝뚝하게 눈 한번 마주치지 않아 거북했는데, 박 시장은 물어보고 토론하고 대화하려 애써서 친근하다”고 말했다.

어리둥절할 때도 있다. 박 시장의 한 측근은 “회의 중간에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보자며 ‘노래하자’고 제안하니 직원들은 당황할 수밖에. 물론 이제는 이런 박 시장 코드에 맞춰보겠다며 갑자기 회의에 앞서 시(詩)를 읊는 직원도 있었다”고 전했다. 한 서울시 직원은 “옆에서 지켜보면 ‘4차원’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며 “마치 안드로메다에서 온 사람처럼 독특하고 호기심이 많은 분”이라고 말했다.

박 시장 측은 이런 자세를 ‘경청(傾聽)’ 행정으로 포장하지만, 정작 외부에 정책으로 형상화될 때는 ‘즉흥’ 행정일 때가 잦다. 방사능 오염 아스팔트 의혹으로 뒤숭숭한 노원구 월계동에 가서는 “전체 도로에 대해 전수조사를 하라”고 지시하고, 서초구 우면산 산사태 현장에서는 “천재(天災)가 아닐 수 있다”고 지적하는 등 전문가 조사 결과를 외면한 채 외부 시민·환경단체 주장에 치우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 동국대 특강에서는 “어렵게 등록금 인하 투쟁을 해왔는데 왜 철폐를 위한 투쟁은 하지 않습니까”라고 발언하면서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박 시장은 “그런(선동) 의도가 아니었는데 진의가 왜곡됐다”고 반발했지만, 서울시 내부에서도 “시정(市政)을 책임지는 수장(首長)으로 경솔했던 측면이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한 서울시 의원은 “살얼음판을 뛰어다니는 럭비공 같다”고 평가했고, 한 서울시 과장은 “‘포스트잇’ 집무실이나 ‘트위터’ 소통에서 과연 시정에 관한 내실 있는 지적이나 정제된 분석이 얼마나 담겨 있을지 의문”이라며 “위계질서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 역시 보기는 좋아도 공무원 사회는 관료주의가 필요한 집단”이라고 지적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11월 16일 서울시청 서소문별관에서 생중계로 진행된 온라인 취임식에 앞서 2012년도 예산표를 설명하고 있다. ⓒphoto 사진공동취재단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11월 16일 서울시청 서소문별관에서 생중계로 진행된 온라인 취임식에 앞서 2012년도 예산표를 설명하고 있다. ⓒphoto 사진공동취재단

사실 박 시장 개인 행보가 파격이건 일탈이건, 왼쪽이건 오른쪽이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본질은 시장으로서 시민을 위한 정책을 어떻게 제대로 구현해 나갈 것인가에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박 시장은 사실 ‘행정가’라기보다는 ‘정치인’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 시장은 우선 오세훈 전 시장 흔적을 지우면서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지난 5년간 지속한 전시성 토건 중심의 시정 패러다임을 사람 중심, 복지 중심으로 바꾸겠다”는 게 목표. 이 과정에서 오 전 시장의 역점 사업이었던 한강르네상스(한강예술섬·서해뱃길 등)나 노인복합시설 어르신행복타운 건립은 백지화될 형편이고, ‘디자인 서울’을 브랜드처럼 관리했던 오 전 시장과 달리 “디자인이란 단어를 가능한 한 다 빼라”는 지침이 내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한 서울시 직원은 “오 전 시장 시절에는 정책 슬로건을 정할 때에도 ‘글로벌 톱 5 도약’ ‘브랜드 마케팅’ ‘디자인’ 같은 용어를 내세워야 했는데 이제는 그런 말은 쓰지 말고 ‘참여’ ‘소통’ ‘희망’ 같은 따뜻한 느낌의 단어를 쓰라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 박 시장은 “임기 중 복지예산을 전체 예산의 30%까지 늘려 ‘복지 시장’이라 불리고 싶다”며 공공임대주택 공급, 서울시립대 반값 등록금 예산 등을 1순위로 배정했다. 비정규직을 정규화하고, 노동 전문 보좌관직을 신설하는 등 시정을 넘어 국정(國政) 분야까지 손을 뻗치는 모양새다. 김용석 서울시의원(한나라당)은 “이제 복지를 늘려가야 한다는 방향성에 대해서는 한나라당 시의원들도 수긍을 한다”며 “그러나 시립대 반값 등록금처럼 대표적인 무차별적 복지 포퓰리즘 정책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실제 서울시립대생들 반값 등록금에 서울시 세금을 쓰는 것이나, 2500여명에 불과한 시 비정규직 직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주고, 지하철 해고자 복직 문제까지 검토하겠다는 발상은 서울시장 역할을 넘어서는 문제다. 시립대 등록금을 반값으로 깎아준다고 전국 대학들이 갑자기 등록금을 대폭 낮출 리 없고, 얼마 되지 않는 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올려준다고 해서 600만명에 달하는 전국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시에서는 노사문제를 담당하는 부서도 없는데 노동 문제를 다루는 보좌관을 만든다는 것도 어색하다는 지적이 있다. 법으로 확정된 해고자를 어떻게 복직시킬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박 시장과 함께 입성한 정책 관련 전문가들도 “시정이 너무 광범위해 아직 다 파악하지 못했다”며 “차차 공부하고 정책에 대해 방향을 언급하겠다”고 답하는 상황에서, 박 시장이 너무 앞서간다는 우려가 생기고 있다. 한 한나라당 서울시의원은 “서울시장 박원순이 아니라 대권주자 박원순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박 시장은 직접 연필을 깎아 쓴다. 평소 아이디어와 현장 목소리를 꼼꼼히 적는다고 알려진 ‘빨간 수첩’ 내용은 남는 시간에 따로 컴퓨터로 문서 작업을 해서 직접 정리한다고 한다. 집무실에는 혼자서 보려고 만든 문서 파일들이 항목별로 꼼꼼하게 정리돼 있다. 한 서울시 고위 간부는 “이렇게 수많은 사안을 정리해서 살펴보고 되돌아보면 좀 더 나은 시정을 위한 동력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고 말했다. 이런 기대가 단지 서울시 직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경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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