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조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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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를 낮추고~, 스케이트 날을 옆으로 밀고~, 그렇지!” 지난 2월 4일 오후 1시,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아이스링크에서 낯익은 쇼트트랙 스타가 한 초등생의 고사리 손을 이끌며 스케이팅 기본기인 ‘찍기’와 ‘코너’를 지도하고 있었다.

그는 2002년 쇼트트랙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대회 전관왕의 위업을 달성한 ‘한국 쇼트트랙의 영웅’ 김동성(32)씨다. 학부모들이 어느새 그를 알아보고 다가가 휴대전화로 ‘인증샷’을 찍고,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그는 “선수 시절엔 사인 요청을 받으면 ‘나중에 보자’며 거절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반갑고 고마운 생각뿐”이라며 싱글벙글했다.

2005년 스물다섯의 이른 나이에 쇼트트랙 국가대표를 은퇴한 후, 김동성은 2006년 1월 코치 자격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버지니아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DS Speed Skating Team’을 운영하며 미 대표선수 줄리앙을 양성해내는 등 미국 주니어 선수권대회 챔피언 7~8명을 키워냈다고 한다.

지난해 11월 4일 6년 만에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그는 그 사이 여덟 살 딸과 여섯 살 아들을 둔 ‘아빠’가 돼 있었다. 지난해 8월 일시 귀국해 모교인 고려대를 찾았다가 학교 측으로부터 “평창동계올림픽에 대비해 2013년부터 빙상부 감독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현재 고려대 유소년 스케이팅 스쿨 코치에다 제주빙상경기연맹 이사 타이틀도 갖고 있다.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1000m 레이스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당시 경기고 3년생 김동성은 기쁨과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그 메달을 1년 전 태릉링크에서 열린 전국남녀종합쇼트트랙선수권대회를 응원하다 고혈압으로 현장에서 쓰러져 숨진 아버지(김태영·당시 53세) 영전에 바쳤다.

김동성은 이후 국제무대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 아폴로 안톤 오노(미국)의 ‘할리우드 액션’ 때문에 1500m 금메달을 놓쳤다.

- 실격 당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죠. “태극기를 들고 금메달 세리머니를 하다 전광판에 오노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오고 맨 아래 제 이름 옆에 ‘DQ(실격)’라는 글자를 보았어요. 눈에 뵈는 게 없더라고요. 세리머니 하던 태극기를 얼음판 위에 내동댕이치고 라커룸에 들어가 의자를 집어던졌어요. 외국 선수들도 다 피신하더군요. 오노는 그 자리에 없었어요. 전명규 감독님이 놀라서 달려오셨고, 전 울다가 실신해버렸어요.”

- 그 사건으로 인해 반미 감정이 확산됐는데. “당시의 허탈감은 반미 정서까지 촉발했던 게 사실입니다. 4개월 후에 효순·미선양 사건이 발생하면서 반미 감정이 더 고조됐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미국전의 골 세리머니도 할리우드 액션 패러디를 했잖아요. 9·11 테러사건 이후 미국인들은 일본계 혼혈인 안톤 오노의 아메리칸 드림 스토리를 만들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가 그렇게 만들어진 선수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오노 뒤꽁무니 따라가 은메달, 동메달을 받을 걸 그랬나봐요(웃음). 중국 선수가 2위로 들어왔다면 휴이시 심판이 실격 판정을 내렸을까요?”

-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게 은메달을 추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묘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올림픽 메달이 하나라도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 불운으로 금메달을 도둑맞다시피한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으로 오히려 스타가 됐지요. “2002년 동계올림픽이 끝나자 CF 제의만 10건이 넘게 들어왔고, 방송 출연 요청도 쇄도했어요. CF 액수만 10억원이 넘었다고 해요. 감독님이 커트시켰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쉽죠.(웃음)”

하지만 그의 무릎은 고질적인 부상과 세 번에 걸친 수술로 선수 생활을 지속하기 힘들었다. 담당 의사는 “계속 운동을 한다면 30살 이전에 퇴행성 관절염이 올 수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전성기에 은퇴를 결심해야 하는 불운이 찾아온 것이다.

결국 2002년 세계선수권대회가 김동성에게는 마지막 국제무대였던 셈이다. 김동성은 오노와 재대결을 통해 명예회복을 꿈꾸며 절치부심했다. 그러나 그해 세계선수권대회에 오노가 CF 촬영을 이유로 불참했다. 김동성은 그 대회에서 ‘분노의 질주’를 비롯해 1993년 김기훈 이후 9년 만에 전관왕(6관왕)을 달성하며 명예회복에 성공했다.

2010년 11월 7일 미 오하이오주의 클리블랜드 하이츠 아이스링크에서 자서전 투어를 하고 있던 안톤 오노(오른쪽)와 지도자로 변신해 유소년팀을 이끌고 참가한 김동성이 만났다. ⓒphoto 연합뉴스
2010년 11월 7일 미 오하이오주의 클리블랜드 하이츠 아이스링크에서 자서전 투어를 하고 있던 안톤 오노(오른쪽)와 지도자로 변신해 유소년팀을 이끌고 참가한 김동성이 만났다. ⓒphoto 연합뉴스

- 오노와의 대결을 염두에 두고 죽어라 훈련만 했는데, 허탈했겠네요. “그때 저는 CF 안 찍고 다음 대회에서 오노를 꺾기 위해 훈련에만 매진했죠. 근데 정작 오노가 CF 찍느라 대회에 불참했다는 거예요. 아무튼 대회 6관왕으로 명예회복을 하고 돌아왔는데, 2002년 월드컵에서 4강 신화로 제게 들어오려던 CF는 거의 축구선수들 차지가 됐어요.(웃음)”

- 지금도 인터넷상에서 ‘김동성’을 입력하면 ‘분노의 질주’ 영상이 뜹니다. “우선 컨디션도 괜찮았고요, 명예회복을 위해 미친 듯 달렸죠. 통상 1500m 레이스는 중반 이후 치고 나갑니다. 13바퀴 반을 도는 레이스에서 감히 처음부터 치고 나가리라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아요. 외국 선수들은 내가 지치질 않고 달리니까 맥이 빠진 거죠. 감독님이 1바퀴 반이나 앞서니까 ‘신기록을 만들어 봐~’라고 소릴 치시더군요. 5000m 계주도 마지막 주자로 나서 스케이트 날을 내밀어 캐나다에 역전승을 거뒀고요.”

- 메달리스트로서 돈은 많이 벌었겠지요. “연금이 얼마나 나올 것 같아요? 한 달에 100만원 나옵니다. 65세까지만요. 연금은 점수로 환산하는데, 금메달 두 개 이상을 따더라도 연금은 100만원입니다. 처음엔 종신까지 지급하다 점차 지급 연한이 내려가고 있더라고요.”

대한빙상연맹의 추천 선수로 2003~2004 시즌 국가대표로 선발됐던 김동성은 태극 마크 반납과 동시에 운동도 포기했다. 김동성은 “국가대표를 안 할 생각으로 대표팀에 들어가지 않은 것일 뿐 코칭 스태프와의 불화설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다.

“무릎만 세 번 그리고 팔에도 한 번 칼을 댔습니다. 모두 전신 마취였죠.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매년 수술대에 오른 셈입니다. 1998년 금메달을 딸 때 2위를 한 리자준(중국)의 스케이트 날에 양쪽 팔을 찍혀 신경까지 끊어진 적도 있었어요. 영국까지 가서 신경을 잇는 대수술을 받았죠. 그래도 매년 목숨 걸고 재활해 현역 최고의 수준으로 뛰었던 겁니다.”

김동성은 “그 당시에는 ‘추천 선수’로 뽑히는 과정에서 다소 억울함이 있었다”면서도 “지금 생각해보면 은퇴를 결정한 것이 현명했다”고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름다운 은퇴는 꿈꾸지 못하고 후배들에게 치이는 모습을 보이다가 사라졌을 것이라고 했다.

김동성은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세 차례나 수술을 받은 끝에 2005년 2월 은퇴를 선언했다. 김동성은 자신의 무릎을 보여주며 “난 연골판이 없다”며 “칠십 넘은 할아버지의 무릎과 같아 비만 오면 쑤신다”고 했다.

이후 부상으로 어린 나이에 은퇴를 결정한 김동성은 연예계 진출, 지도자 변신 등 제2의 인생을 준비했다. 하지만 연예계 쪽의 반응은 냉담했다.

“아파서 은퇴한다는 이미지로 약해 보이기 싫었거든요. 사실상 운동을 그만뒀던 2003년 당시만 해도 코치 한다는 생각은 안 한 상태라 방송 일을 많이 하게 됐죠. 당시 팬들은 ‘운동이나 더 하지, 왜 방송 나오냐’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었잖아요. 그땐 타이밍이 조금 안 좋았다고 봐요.”

- 스스로 끼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글쎄요….(웃음) 전 운동선수의 끼와 연예인 끼는 다른 것 같아요. 운동선수가 연예계에서 성공하려면 메달리스트였다든가, 스포츠 스타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야 해요. 강호동 선배가 방송에서 씨름 이야기 하는 것 못 봤어요.”

2004년 은퇴를 고심하고 있을 무렵, 여배우와의 염문설도 떠돌았다. 여배우 루머는 2004년 한 매체가 유부녀인 여배우 C양과 스포츠 스타 간의 밀회를 이니셜 기사로 보도하면서 악성 루머가 되어 퍼지기 시작했다. 일명 ‘증권가 찌라시’에 김동성의 이름이 올랐고, 공교롭게도 루머의 당사자로 유력하게 지목됐던 여배우가 실제 파경에 이르면서 소문은 더욱 커졌다.

- 왜 당시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나요.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죠. 괜히 대응하면 이슈화한다는 말도 있었고요. 지금은 악성 루머를 퍼뜨리는 개인들에게까지 명예훼손 소송을 걸어 결백하다는 것을 입증하던데, 그게 현명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8년이 지나서야 해명에 나선 이유에 대해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딸아이를 위해 정확하게 바로잡을 필요를 느꼈다”고 털어놨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이름으로 검색어만 쳐도 일부 악성 루머가 노출되는 상황을 보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더 참을 수 없었어요. 늦었지만 이제는 반드시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심지어 아내가 결혼 전에 ‘소문이 진짜냐’고 묻길래 ‘나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고, 남의 가정 파탄내는 일은 안 한다’고 했어요.”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500m 결승에서 실격 처리된 김동성이 망연자실하는 동안 1위로 판정된 미국의 오노가 환호하고 있다. ⓒphoto 조선일보DB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500m 결승에서 실격 처리된 김동성이 망연자실하는 동안 1위로 판정된 미국의 오노가 환호하고 있다. ⓒphoto 조선일보DB

김동성은 “나와 불륜설에 휘말렸던 분을 맹세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면서 “찌라시에 ‘프로 스포츠’ 스타와 불륜이라고 나왔는데, 쇼트트랙은 프로 스포츠가 아니다”라고 했다.

쇼트트랙 국가대표 은퇴 후, 미국으로 건너가 스케이팅 꿈나무를 키우는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던 그에게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2010년 그가 운영하는 버지니아 소재의 스케이팅 클럽에서 학생들이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40명의 학생 가운데 6명의 학생들은 그가 하키 스틱, 스케이트 날, 타이머 등을 사용해 자신들을 체벌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만약 학생들에게 손을 댔다면 부모들이 왜 경찰에 신고하거나 재판으로 결론을 내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했다. 김동성 선수는 “원하는 건 단 하나, 무너진 명예회복”이라고 했다.

미국 스케이팅 연맹은 김동성에게 학생 체벌 혐의로 코치자격 일시정지 처분을 내렸다가 절차상 하자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다시 코치 자격을 복원시켰다. 김동성은 “2002년 ‘오노 사건’ 이후 나는 또 당한 셈”이라며 “지금까지도 연맹을 상대로 인권침해 및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진행 중”이라고 했다. 일단 연맹 쪽에서 잘못을 시인했고, 김동성 측 변호사와 연맹 측 변호사가 합의 중에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온 코치들은 영어가 유창한 것도 아니고 연맹의 규칙을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코치에게도 소명의 기회가 주어져야 해요. 그게 룰이죠.”

김동성은 2002년 이후 8년 만인 2010년 안톤 오노를 처음으로 만났다고 한다. 미국 쇼트트랙 국가대표 상비군 선발을 위한 2차 아메리칸컵 대회가 열린 2010년 11월 7일 미 오하이오주의 클리블랜드 하이츠 아이스링크에서 자서전 투어를 하고 있던 안톤 오노와 지도자로 변신해 유소년팀을 이끌고 참가한 김동성이 조우한 것이다.

“2002년 사건 이후 서로 교류를 끊고 지냈어요. 그러다 우연히 작년에 만났죠. 링크 밖에서 쉬고 있는데, 오노와 마주쳤어요. 그저 안부 정도 물었어요. 오노가 ‘너 미국에서 코치하는 것 봤다. 네가 가르치는 아이들 잘하더라. 나는 지금 자서전 ‘A Journey’ 출판기념 사인회 행사차 미국을 순회 중이다. 이틀 뒤 워싱턴에 가는데 그때 볼 수 있다면 보자’고 하더군요. 그 이후에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김동성은 “오노와 미국인들은 지금도 오노가 자신의 실력으로 정당하게 금메달을 땄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김동성은 지난해 말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안현수(28·빅토르 안)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김동성은 안현수에 대해 “러시아에 간 것은 본인 선택”이라며 “자기 관리를 못해 탈락한 것을 두고 연맹 탓을 하면 안 된다”고 했다. 2008년 훈련 도중 무릎 부상을 당한 안현수는 지난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했고, 러시아행을 선택했다. 김동성은 안현수와 2002년 당시 국가대표로 함께 뛰었다고 한다.

김동성은 “현수와 나는 선발전을 거치지 않고 처음으로 대표선수가 된 혜택을 누린 선수”라면서 “나도 무릎 수술을 받으면서 은퇴했다. 현수가 무릎 수술 후유증으로 그렇게 힘들다면,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게 멋있게 물려주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김동성은 최근 세계선수권에서 여자 계주가 결승 진출에 실패하는 등 한국 쇼트트랙이 다소 부진한 이유에 대해 “우리나라 선수들이 전반적으로 몸 관리를 못하고 훈련에 따라오지 못한다”라며 “우리 때는 태극마크만 보면 외국 선수들이 긴장했는데, 요즘은 그런 것도 덜한 것 같다”고 했다.

김동성에게 “선수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냐”고 물었다. 대답은 의외로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이뤘던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이 아니었다.

“2000년 세계선수권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부끄러운 레이스를 펼쳤던 기억이 납니다. 대회 직전 선수촌을 무단 이탈해 3주 동안 방황했거든요. 그때 저를 붙들어 훈련할 수 있게 한 당시 코칭 스태프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팬들은 제가 1등 한 순간들만 기억할지 모르지만, ‘선수 김동성’에게 그 순간은 평생 약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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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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