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찾은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왼쪽 두 번째)이 지난 3월 20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있다. ⓒphoto 허영한 조선일보 기자
한국을 찾은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왼쪽 두 번째)이 지난 3월 20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있다. ⓒphoto 허영한 조선일보 기자

‘삼성의 롤모델’로 알려진 스웨덴 최대의 기업 ‘발렌베리(Wallenberg)그룹’의 총수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이 유럽 비즈니스 대표단 60여명과 함께 3월 18~20일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3월 20일 기자들과 만나 “한국의 4G LTE시장과 금융시장 진출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발렌베리 회장은 하루 전인 3월 19일 저녁,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삼성전자 이재용 사장과 저녁을 함께했다. 비공개 만찬이었다. 삼성 측은 “스웨덴에서 온 주요 기업 CEO들과 좋은 관계를 맺길 바라는 친선이 주 목적”이라고만 밝혔다. 재계 일각에선 이 자리를 꼭 삼성의 설명대로만 보지 않는다. “스웨덴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 발렌베리그룹의 지배구조와 기업 운영방식 등을 삼성이 벤치마킹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삼성은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2003년 발렌베리그룹의 경영과 지배구조를 심도 있게 살펴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2003년부터 발렌베리 벤치마킹

삼성경제연구소가 발렌베리그룹을 벤치마킹하기 시작한 것은 2003년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상무가 발렌베리 회장을 처음 만났을 때로 알려졌다. 이건희 회장은 당시 삼성전자 상무였던 이재용씨와 그룹 구조조정본부장 이학수씨를 대동하고 2003년 7월 스웨덴을 방문했다. 이 회장이 ‘이례적으로’ 아들 이재용 상무와 이학수 본부장을 해외 출장에 동행했다는 점에서, 당시의 스웨덴 방문은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당시 이 회장 일행은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을 비롯해 발렌베리그룹의 주요 임원들과 만나 새로운 경영 및 기업 지배구조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국내에는 삼성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모델이 스웨덴식 모델(Swedish Model)이란 관측과 함께, 북유럽식 경영을 조명하는 기사가 보도되기 시작했다.

156년 전인 1856년 설립

삼성이 역할 모델로 삼으며 9년간 벤치마킹해 온 발렌베리는 156년 전인 1856년 설립됐다.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안드레 오스카 발렌베리(Andre Oscar Wallenberg)가 해군 장교로 제대한 뒤 은행업에 뛰어들어 1856년 스톡홀름 엔스킬다 은행(SEB·Stockholm Enskilda Bank·지금은 스칸디나비스카엔실다 은행으로 개명)을 창업한 것이 시작이다. 이후 발렌베리 가문은 CEO가 되기 위한 최소 조건으로 △부모 도움 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 유학을 마칠 것과 △해군 장교로 복무할 것의 두 가지 조건을 내세우고 있다. 발렌베리그룹은 지주회사인 ‘인베스터AB’와 은행인 ‘SEB’, 두 개사를 주축으로 구성돼 있는데, 인베스터AB의 야코브 발렌베리 회장과 SEB의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은 모두 이 조건을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발렌베리그룹은 창업자인 안드레 오스카 발렌베리 이후 무려 5대에 걸쳐 경영권을 이어가고 있는 대표적인 세습 기업이다. 연매출은 1100억달러(2010년)로 스웨덴 국내총생산(GDP·2010년 4589억달러·세계은행 기준)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고용한 종업원 수는 39만1355명(2009년 기준)으로 스웨덴 인구의 4.5%에 달한다. 스웨덴의 대표적 은행인 SEB와 일렉트로룩스, 에릭손, 사브, ABB 등 스웨덴을 대표하는 간판기업 19곳을 포함해 100여개 기업의 지분을 갖고 있다. 삼성그룹의 매출은 한국 GDP(2010년 1조1000억달러·세계은행 기준)의 22%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5대째 세습 경영을 하고 있지만 발렌베리는 스웨덴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꼽힌다.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는 이런 현상의 이면엔 발렌베리의 독특한 경영 방침이 자리하고 있다. 이 그룹은 매년 그룹 이익금의 85%를 법인세로 납부, 사회에 환원한다. 발렌베리 재단의 수익금 역시 전액 학술지원 등 공익적 목적에 활용한다. 막대한 세금과 이익을 사회에 돌리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이른바 ‘차등의결권 제도’라는 것을 도입해 오너 일가의 주식에 일반 주식의 최대 1000배(현재는 최대 10배)에 달하는 의결권을 부여받고 있다. 이 가문의 기업에 대한 경영권을 사회가 확실하게 보장하는 것이다.

재단 수익금 전액 학술 등 공익 목적에 활용

이 독특한 제도의 연원은 193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극심한 노사분규에 시달렸던 당시 스웨덴은 우리로 치면 전국경제인연합회라고 할 수 있는 스웨덴경영자연합(SAF)과, 노총에 해당하는 스웨덴노동조합(LO), 그리고 정부의 3자 간에 역사적인 ‘노·사·정 대타협’을 체결했다. 이른바 살트셰바덴협약(Saltsjobaden Agreement)이다. 협상이 이뤄진 휴양지 지명을 딴 이 협약의 핵심 내용은 △차등의결권 제도를 도입해 오너 일가의 기업 지배권을 인정하고 △대신 회사 이익금의 85%를 법인세로 납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제도는 개별 기업이 선택할 수 있다. 차등의결권을 통해 기업 경영권을 보장받는 대신, 세금을 많이 내면 된다. 이 제도는 이후 북유럽으로 확산, 2011년 현재 스웨덴 상장 기업의 55%, 핀란드 상장 회사의 36%, 덴마크 상장 주식회사의 33%가 이를 실시하고 있다. 조명진 유럽연합(EU) 집행이사회 안보전문역은 “스웨덴의 살트셰바덴협약은 국민 화합 차원에서 사용자와 노동자의 대립적 관계를 신뢰의 관계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고, 사민당과 노조 지도자들이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게 함으로써 산업화를 가속화했으며, 결과적으로 스웨덴 국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켰다”면서 “특히 협약에 규정한 해고 노동자의 재교육과 직장 알선을 주선하는 적극적 노무관리 정책은 스웨덴 노사 관계 안정의 주요 배경이 됐다”고 평가했다.

삼성 등 국내 재계 ‘차등의결권’에 관심

국내 재계에서 발렌베리그룹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의 하나가 이 ‘차등의결권’이다. 소위 ‘황금주’라고도 불리는 이 제도로 인해 발렌베리 오너 일가는 지주회사의 지분을 5.3%만 갖고 있으면서도 21.5%의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영국과 독일에서 “기업 인수를 위한 공정한 게임의 룰(level playing field)을 보장하기 위해 차등의결권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스웨덴 정부는 “국내 기업에 대한 외국인의 적대적 인수·합병을 막기 위해서는 이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영국과 독일의 주장을 반박했다.

정부가 나서서 적대적 인수·합병 가능성을 차단할 만큼 발렌베리그룹에 대한 스웨덴 국민의 신뢰는 각별하다. ‘이익금의 85%를 법인세로 납부하는’ 이 그룹은 여타 대기업과 달리 이윤 추구만 지향하지 않는다. 이 그룹은 금융, 통신, 기계, 의료, 방위, 항공, 건강, IT 등 오만 가지 분야에 투자하고 있지만, 이는 모두 중공업이나 첨단산업 분야에 국한된다. 유통이나 식품 등 이른바 중소기업형 사업 분야에 투자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엄청난 경제 집중도를 갖고 있지만 증여·상속 과정에서 법적인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다. 이 같은 투명성은 발렌베리 집안의 가풍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창업자인 안드레 오스카 발렌베리의 아들 크누트 발렌베리(Knut Agathon Wallenberg)는 스웨덴 외무장관(1914~1917)을 지냈으며, 창업자의 증손자인 라울 발렌베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2만명이 넘는 유대인을 독일 땅에서 구출하다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에 살해돼 ‘스웨덴의 신들러’로 추앙받고 있다.

이범진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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