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제네바 레만호의 루소섬에 있는 장 자크 루소의 동상.
스위스 제네바 레만호의 루소섬에 있는 장 자크 루소의 동상.

내가 사는 스위스 제네바는 장 자크 루소가 태어난 곳이다. 루소는 제네바공화국의 시민임을 평생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우리가 군부독재의 군홧발에 짓밟혀 있을 때 루소가 쓴 책 표지의 저자명에 ‘제네바공화국의 시민 장 자크 루소’라고 쓴 것을 보고 그렇게 부러워했던 생각이 난다. 나폴레옹은 루소의 묘지 앞에서 “우리 둘 중 한 명만 태어나지 않았어도 세상이 보다 조용했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루소는 생전에나 사후에나 세상의 저주를 면치 못했다. 그는 생전에 자기 아이를 고아원에 보냈다는 이유로 세상의 조롱과 멸시를 받았다. 또 그의 저서인 ‘에밀’이 가톨릭 교회에 의해 금서가 되고 체포명령으로 갈 곳 없어 도피생활을 했던 불운한 사람이다.

사후에도 혁명의 도화선이 된 그의 사상 때문에 “혁명의 불길을 막기 위해서는 루소를 죽여야 한다”는 이유로 보수세력이 가장 박해한 작가였다. 특히 영국과 미국의 학문 풍토에서 평등을 주장한 루소는 폄하됐다. ‘루소는 아무것도 아니다’ ‘루소는 잘못을 범했다’ ‘루소를 우습게 여겨야 한다’는 연구는 산처럼 쏟아져 나왔고 지금도 쏟아지고 있다. 루소는 ‘열린 사회의 적’이며, 카를 마르크스와 함께 타도해야 할 대상 제1호였다.

그가 없으면 프랑스대혁명도 없었다

루소는 1712년 6월 2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탄생지는 제네바 구도심 한가운데 있는 시청 근처에 있다. 그의 탄생지를 찾기 위해 루소의 동상이 있는 레만호의 루소섬에서 출발해 보자. 호수 위 다리를 건너 제네바의 중심상가인 ‘루 두 마르세’에서 생피에르 성당을 찾아 오솔길을 올라간다. 법원 광장이 나오고 조그만 샘터를 가운데 두고 넓은 광장 곳곳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는 것이 좋다. 제네바시 언덕의 거의 꼭대기에 있는 법원 광장에서 넓은 하늘을 볼 수 있고 구도심 옛 건물에 배어 있는 역사의 흔적을 같이 숨쉴 수 있다. 카페의 테이블은 제네바대학 학생들과 교수, 법원의 변호사 등 근처의 사무원들로 메워져 학구적 분위기이다.

루소의 아버지 아이작 루소는 시계공이었다. 스위스 시계는 그때 이미 유명했다. 아이작은 시라글리오 술탄의 초대를 받아 콘스탄티노플(터키 이스탄불)까지 갔다. 아이작 루소가 만든 시계는 제네바의 시계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어머니 수잔 베르나르는 제네바 종교장관의 딸이었다. 그들은 신분 차이로 맺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광장을 떠나 그 당시 가장 중심가였던 ‘그랑 루’를 따라 걸어가면 오른쪽으로 웅장한 생피에르 성당이 있고 왼쪽으로 시청 건물이 있다. 시청을 지나자마자 좌회전을 하면 제네바대학으로 내려가는 언덕길이 있다. 그 언덕길이 바로 ‘라 트레일’이다. 루소의 아버지 어머니가 어렸을 때 놀던 곳이다. 다시 ‘그랑 루’를 조금 걸어가면 왼쪽에 골동품 가게가 있고 그 건물 2층에 조그만 현판이 보인다. ‘장 자크 루소가 이집에서 1712년 6월 28일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프랑스혁명도 일어나지 않고, 나폴레옹도 가난한 포병 장교로 생을 마감했을까. 역사는 가정이 증명될 수 없는 현상이다. 다만 ‘그랑 루’에서 그때 무엇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루소의 어머니는 루소를 낳고 얼마 후에 죽었다. 그의 아버지 아이작 루소는 루소가 5살 때쯤 그 집을 팔고 제네바 코르나방역 근처에 있는 큰 백화점 ‘마노르’ 근처로 이사를 갔다. ‘생 제르베’ 지역으로 불리는 그곳은 기능공들이 사는 곳이다. 마노르백화점의 바깥 벽에는 루소의 얼굴과 아버지 아이작 루소가 루소에게 한 말이 크게 쓰여 있다.

“장 자크, 네 나라를 사랑해라. 이 좋은 제네바 사람들을 보아라. 그들은 모두 형제들이다. 기쁨과 조화가 이들에게 있다. 언젠가 너는 다른 나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비록 네가 아버지가 간 곳만큼 멀리 간다 하더라도 네 나라 사람만큼 좋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은 루소의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편지에는 또 ‘생 제르베’의 분수가에서 훈련을 마친 군인들이 같이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분수대가 있다. 작은 감동과 함께 나는 이것이 루소가 본 분수대와 같은 것이라고 믿는다. 마노르백화점에서 레만호수로 내려가는 조그만 길의 이름이 ‘루 데 장 자크 루소’다.

시계공 도제로 3년간 견딘 폭력

루소가 10살 때, 그의 아버지 아이작 루소는 결투를 하려 칼을 빼들었다는 혐의로 제네바에서 추방되었고, 제네바 근처의 소규모 도시인 니옹에 살았다. 니옹의 중심지 한 집에 이런 현판이 붙어 있다. ‘여기서 아이작 루소가 죽었다.’ 유명한 아들(루소)을 둔 덕분에 그의 아버지가 생을 마친 곳도 기억되고 있다.

루소는 외삼촌과 함께 자랐다. 이 무렵 루소는 2년 동안 ‘보세’ 지역에 있는 ‘람베르시에르’라고 하는 목사집에서 사촌들과 함께 라틴어 등 기본적인 공부를 한다. 그후 사촌들과 함께 수학도 배운다. 이것이 루소가 배운 공부의 전부다. 그후 루소는 시계금속 가공기술을 배우기 위해 도제가 된다. 폭언과 폭력 속에서 살아야 했던 루소의 생애 중 가장 불행했던 3년이었다. 그가 16세가 된 1728년 어느 날 성 밖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늦어 성문이 닫혀버렸다.

루소는 바로 그때 제네바를 떠나 보다 큰 세상으로 가기로 마음먹고 길을 떠났다. 그날 저녁 프랑스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집주인이 개신교 신자인 루소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제네바 남쪽에 있는 조그만 도시인 ‘앙시’로 가라고 한다.

제네바의 그랑 루에 있는 루소의 생가와 현판(가운데). ‘장 자크 루소가 이 집에서 1712년 6월 28일 태어났다’고 적혀 있다.
제네바의 그랑 루에 있는 루소의 생가와 현판(가운데). ‘장 자크 루소가 이 집에서 1712년 6월 28일 태어났다’고 적혀 있다.

앙시는 유럽 내에선 꽤 알려진 관광지다.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로 보트를 타고 호수 가운데로 가면 산자락이 굽이굽이 겹치고 겹쳐 황홀한 절경을 연출한다. 제네바에서 레만호수를 건너 아스라이 몽블랑을 바라보는 것도 위대한 감동이다. 저녁 무렵 지는 해를 받아 핑크빛으로 물든 몽블랑 3만6000봉. 루소의 ‘고백록’과 서간체 소설인 ‘줄리’를 보면 이 지역의 아름다움을 잘 묘사하고 있다. 루소를 읽고 몽블랑과 스위스 관광객이 늘었다고 한다.

앙시에서 루소는 와렌 부인을 만난다. 그녀의 나이는 28세였다. 지금 그 집은 헐리고 없다. 루소가 와렌 부인을 만난 장소에는 그 만남을 나타내는 부조가 새겨진 기념비가 서 있다. ‘여기서 루소가 와렌 부인을 만났다.’ 앙시의 구도심에 있는 조그만 운하를 따라 많은 상점과 식당이 있는데 한가운데쯤 약간 주택가 쪽으로 기념비가 서 있다.

역사적 기념비가 새겨질 만큼 와렌 부인은 루소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와렌 부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루소는 길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29세가 되던 해 성공을 위해 프랑스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 와렌 부인의 보호 속에서 성장하고,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고 공부했다. 그녀는 그에게 연인이자 보호자이자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고아원에 아이를 버린 아버지

와렌 부인은 이후 프랑스 샹베리의 ‘레 사르메테스’ 계곡 근처의 집으로 이사를 갔다. 루소의 6년간 행복했던 시절(1735~1740)은 바로 이 샹베리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성공을 위해 파리로 떠났다. 루소는 그가 묵었던 파리의 호텔에서 일하던 테레사를 만났다. 루소는 테레사에게 “평생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결혼은 할 수 없다”고 말한다. 테레사는 루소가 죽을 때까지 그의 반려자가 되고 결국 1768년에는 결혼까지 하게 된다.

문제는 테레사와의 사이에 난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냈다는 것이다. 이것은 루소를 공격하는 사람들의 좋은 무기가 됐다. “키울 수 없는 애들을 왜 낳았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를 변호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러나 그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개의 나무를 이 세상에, 인류의 역사에 심기 위해 그의 생명을 바친 사람이다. 그가 방에 틀어박혀 책을 쓰고 있을 때 ‘자유’와 ‘평등’이라고 하는 두 개념 외에는 아무것도 그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가족도 자신의 삶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그는 오로지 이를 위해 살았다.

루소를 비난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권리다. 그러나 비난하기 전에 그가 쓴 책을 읽어 보자. 신이 왜 그를 자신의 도구로 썼는지 알게 된다. 그가 없이는 ‘자유’ ‘평등’의 프랑스혁명은 없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나 ‘실천이성비판’은 루소의 ‘에밀’을 재구성한 것이다. 그의 ‘판단력 비판’은 알프스의 신비한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가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톨스토이는 루소의 메달을 목에 걸고 다녔다. 루소 없이는 ‘안나 카레니나’는 나올 수 없었다. 이 세대 최대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루소의 ‘언어기원론’의 분석으로 그의 해체론을 시작했다.

파리에서 예술가를 꿈꾼 루소

루소는 파리로 갈 때 예술가로서 성공할 생각이었다. 새로운 기보법(記譜法)을 파리의 과학아카데미에서 발표했다. 그의 오페라 ‘마을의 아첨쟁이’는 1752년 왕궁의 왕 앞에서 공연되었고 파리 오페라에서도 공연돼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음악작품은 몇 년 전에 스위스에서 공연되었다. 전문가들은 “그의 음악이 모차르트와 비슷하다”며 “모차르트가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제네바의 마노르백화점. 루소가 살았던 곳으로 백화점 외벽에 루소와 당시 사람들의 그림이 걸려 있다.
제네바의 마노르백화점. 루소가 살았던 곳으로 백화점 외벽에 루소와 당시 사람들의 그림이 걸려 있다.

그런데 루소의 오페라를 좋아한 왕이 루소를 만나고 싶다고 했을 때 그는 가지 않았다. 루소는 “수줍어하는 성격 때문에 왕이 자신을 만나면 작품의 성공으로 좋아진 기분을 잃게 될 것이 두려웠다”고 한다. 디드로를 비롯한 그의 친구들은 “왕으로부터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박차 버렸다”고 그를 비난했다. 사실 그때 이미 루소는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고 청렴하게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기 위해서 귀족의 옷을 벗어 버리고 평민의 옷을 입고 검소하게 살고 있었다. 그때 만약 루소가 왕의 연금을 받고 안락한 생활을 했다면 ‘사회계약론’도 ‘고백록’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신의 계획이 아니었다. 신은 루소를 다른 목적에 쓰기 위해 그 친구들과 거리를 두게 하였다. 파리의 살롱에서 명성과 여자를 추구하고 있던 루소의 친구들은 루소를 미워했다.

루소의 이러한 변화는 1749년 디종 아카데미가 ‘과학과 예술의 진보가 인간의 도덕심을 타락시켰는가 발전시켰는가’란 주제로 공개 논문 경쟁을 하게 했고, 루소가 ‘과학과 예술은 인간의 도덕심을 타락시켰다’는 결론의 논문을 응모한 데서 시작한다. 루소는 그가 어렸을 때 읽고 평생 가장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 ‘플루타크 영웅전’에 나오는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도덕적으로 강건했던 사회가 문명의 발전으로 타락하게 되었다고 주장했고, 결국 이 논문이 일등을 차지함으로써 일약 문명(文名)을 떨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귀족의 삶을 버리고 평민의 삶을 선택했다.

유럽 뒤흔든 당대 최대 작가

그후 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1755), ‘볼테르에게 보낸 편지’(1756), ‘달랑베르에게 보낸 편지’(1758), ‘줄리 혹은 새 엘로이즈’(1760), ‘사회계약론’(1962), ‘에밀’(1962) 등을 출간하면서 유럽을 뒤흔든 최대의 작가로 명성을 얻는다.

그러나 ‘에밀’이 소르본에서 금서로 낙인 찍히고 체포명령이 떨어지자 루소는 프랑스를 떠나 고향인 스위스로 돌아간다. 칼빈의 전통이 살아있는 제네바공화국에서도 “에밀을 쓴 루소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고, 베른공화국도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여 그는 친구들의 주선으로 프로이센의 영토인 뉴샤텔 지역 ‘모티에’란 조그만 산골 마을에서 3년간 살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산에서 쓴 편지’를 출간하고 영국(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방문을 받는다.

루소가 모티에에서 살던 집은 큰길에서 약간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마을 중심에 있는 비교적 큰집이다. 그 집을 찾기는 쉽다. 루소가 그곳에서 살았다는 것은 그 마을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루소가 살던 침실과 응접실은 그대로 보존돼 돈을 받고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어느 날 모티에의 주민들이 루소가 기독교를 비난하는 논문을 썼다고 오해해 한밤중에 루소의 집에 돌을 던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위험을 느낀 루소는 비엔호수의 피터섬에 가서 두 달간 살게 된다. 그 두 달간의 행복했던 생활은 ‘고백록’과 ‘고독한 산책자의 사색’에 나온다. 두 권의 책을 비교해 보면 루소가 죽기 직전에 썼던 ‘고독한 산책자의 사색’은 실존철학을 이미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생각의 깊이와 스타일은 니체, 사르트르, 카뮈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다.

피터섬은 섬이라고 하지만 육지와 연결돼 있다. 자동차는 못 들어가고 걸어가거나 자전거로 갈 수 있다. 섬 입구에 캠핑장이 있어서 루소를 이야기하며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좋다. 루소가 살던 집은 지금 레스토랑으로 변해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루소가 있었다’는 표시가 없어 그냥 나오려고 하다가 “여기에 혹시 ‘후소(루소의 프랑스식 발음)’가 살았느냐”고 물어봤더니 2층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루소가 살던 방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조그만 유리창이 호수 쪽으로 나 있어 그가 창을 통해 호수를 바라보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그는 두 달 동안 책이 든 이삿짐은 풀지도 않고 농사꾼들의 일을 거들기도 하고 식물채집을 하기도 했다. 배를 저어 호수 한가운데 띄워 놓고 물결 흐르는 대로 맡겨 놓은 채 누워서 물소리를 듣고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니체의 ‘영원히 되풀이되는 존재’의 개념이 이미 여기에서 발견되고 ‘나는 존재한다, 나는 존재한다’고 외치는 사르트르의 외침이 ‘존재의 느낌’이란 개념으로 루소의 글 속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

볼테르와 함께 안장

베른공화국은 루소에게 자기 영토를 떠나라고 명령한다. 갈 곳이 없는 루소는 ‘이것은 자기 적들의 음모’라고 생각하면서도 흄의 초대를 받아 영국으로 간다. 일년 반 동안의 영국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흄이 자기를 이용하고 있고 사람들이 자기를 모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후 루소는 프랑스로 돌아와 노르망디, 그레노블, 보르고안 등에서 살다가 1770년 파리로 돌아왔다. 1778년 7월 2일 아침 그는 심장마비를 일으켜 침대에서 떨어지면서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다. 그는 죽었다. 테레사는 “내 남편이 성인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성인이란 말인가”라고 했다.

루소의 데드 마스크는 제네바대학 인문학과 도서관의 루소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1794년 프랑스 혁명정부는 루소를 판테온에 모셨다. 소르본대학과 파리 법률대학 근처의 아카데믹한 분위기 속에 있는 판테온은 프랑스를 지키는 신(神)을 모신 곳이다. 볼테르의 관이 가장 화려하게 치장돼 있고 바로 건너편에 있는 루소의 관은 다소 평범하게 만들어져 있다. 태어나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던 루소는 볼테르, 빅토르 위고 등과 함께 프랑스의 신이 되었다.

김의기

WTO 선임참사관

김의기 WTO 선임참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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