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돔의 120일’을 번역 출간한 동서문화사 고정일 대표. ⓒphoto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소돔의 120일’을 번역 출간한 동서문화사 고정일 대표. ⓒphoto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사드는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인간성’의 한계이자, 자유의 심연을 발견한 용기있는 고귀한 사람이다.”

“사드의 작품에 묘사된 퇴폐 성행위는 지나치게 가학적이어서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가학적 성행위 ‘사디즘’이란 용어를 낳게 한 프랑스 작가 마르키 드 사드(Marquis de Sade·1740~1814)에 내려진 극과 극의 평가다. 지난 8월 15일 동서문화사(대표 고정일)가 사드의 ‘소돔의 120일’을 번역 출간하면서 한국 사회는 두 개의 극단적인 평가로 갈라졌다. 간행물윤리위원회(위원장 양성우)가 9월 18일 이 책에 대해 음란성 유해물 판정을 내렸다. 간행물윤리위는 “출간 하루 만인 지난 8월 16일 ‘내용이 심하다’는 민원이 제기돼 관련 심의기준에 따라 유해간행물 결정을 내렸다”고 이유를 밝혔다. 이 책은 현재 서점에서 판매 보류 상태다.

간행물윤리위의 결정에 문학계 일각은 발끈했다. 사드의 작품이 단순한 선정물을 넘어 세계적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만큼 간행물윤리위의 결정에는 사드에 대한 철학적 이해가 부족했다는 주장이다.

신상웅 전 중앙대 예술대학원장은 동서문화사가 간행물윤리위에 대해 9월 24일 청구한 도서재심의 신청서에서 “세계 어느 나라도 세계문학사에서 고전으로 평가받는 예술작품을 최고극형에 처하지는 않는다. 이는 세계 문명국가에서 일어날 수 없는 문화독재 현상”이라고 비판했다.

간행물윤리위의 이번 결정은 단순한 도서심의 기준에 대한 논쟁을 넘어 출판의 자유에 대한 문제 제기로 확산되고 있는 양상이다. 사드의 작품에 대한 국내의 논쟁이 확산되자 저자의 국가인 프랑스 정부 역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주한 프랑스대사관 자크 술릴르 문정관은 지난 9월 24일 동서문화사 고정일 대표를 만나 자국의 정신유산을 둘러싼 이번 논란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고 고 대표는 말했다.

사드 작품 번역 학계 요구 꾸준히 있어와

“분서갱유도 아니고 자유민주 국가에 도서 심의가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사드의 작품은 세계적으로 대중서보단 전문 철학서에 가깝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런데 유해 판정을 내렸다는 것은 이 작품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없이 선입견만으로 심의한 것이다.”

고정일 동서문화사 대표는 지난 10월 4일 주간조선과 만나 간행물윤리위의 결정에 납득할 수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소돔의 120일’ 번역은 이미 20여년 전에 되어 있었다”며, 번역이 일찍이 돼 있었던 이유에 대해 “사드의 작품 번역 출간에 대한 학계와 전문 독자들의 요구가 꾸준히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 대표는 “사회적 거부감을 고려해 시기를 조율하고 있었다. 이제는 우리 문학계가 사드 작품의 문학사적 가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성숙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나 보다”고 말했다. ‘소돔의 120일’은 동서문화사의 동서양 고전문학 시리즈 ‘월드북스’의 201번째 책으로 나왔다. 월드북스는 1970년대부터 국내 문학계 권위자들의 추천으로 선정, 발행해 오고 있다.

사드의 작품은 기괴한 성행위, 남색, 배설과 가학에 대한 상세한 묘사로 가득하다.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잔혹하고 변태적이어서 웬만한 마음가짐 없이는 볼 수 없는 수준인 경우도 있다. 기자가 사드의 책을 읽으며 받은 느낌은 단순 성적 쾌감을 즐기기 위한 포르노물이 아니었다. ‘반드시 이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되는 목적의식 없이는 쉽사리 페이지가 넘어갈 책이 아니다’는 게 더 강한 느낌이었다.

4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소돔의 120일’ 역시 책 어디를 펼쳐 보아도 구역질 나는 변태 성행위 묘사가 등장했다. 이 작품 속에는 사드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네 명의 권력자가 등장한다. 공작, 공작의 동생이자 주교, 법원장, 그리고 징세청 부인이다. 이들은 젊은 남녀 수십 명을 이끌고 120일 동안 엽색 행각을 벌인다.

명문가 귀족 출신

이 작품은 사드가 1784년 프랑스 파리의 바스티유감옥에서 쓴 것이다. 약 12m 길이의 종이 두루마리에 기득권층의 악행을 그림 그리듯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의 작품 속 주인공은 대부분 지배계층으로 모두 성(性)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고 있다. 사드는 왜 자신이 속한 지배계급을 향해 펜 끝을 세웠을까.

사드 작품의 문학성은 그것이 당시 시대상을 철저히 드러낸 픽션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완전한 허구가 아닌 현실을 기반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엽기적 성행위는 단순히 쾌락을 위한 물리적 행위라기보다는 당시 기득권층이 자신의 권력으로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행위로 봐야 한다는 게 평론가들의 말이다. 인간의 욕망의 끝에서 가장 원시적인 것을 자의적으로 행하며 궁극의 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고정일 대표는 “사드 문학 속 적나라한 성행위 묘사는 그저 상상으로 그려낸 허구가 아니라 당대 상류층의 위선 행위를 폭로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드는 프랑스 명문 귀족 출신이다. ‘소돔의 120일’이 나온 1784년은 사상적으로 계몽주의를 비롯해 자유주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던 무렵이다. 사드는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전 타락할 대로 타락한 프랑스 기득권층의 부패와 자유주의의 사조를 온몸으로 경험한 지식인이었다.

제한적이나마 남아 있는 사드에 관한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생애의 3분의 1이 넘는 시간을 감옥과 정신병원을 오갔다. 고 대표는 이를 두고 “사드에게 문제가 있었다고 곧이곧대로 믿기보다는 내적 부패와 비리를 폭로하려 드는 그를 두려워한 권력자들이 그를 사회에서 매장하려 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가학적 엽기 행각을 담은 문학작품에 가려져 있지만 사드는 수많은 희극과 장편소설 등을 창작한 문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고 대표는 “그의 희극들은 코미디 프랑세즈 극장을 비롯한 대극장에서 인기 속에 공연될 정도로 대중적이었다”고 말했다.

사드가 근대 서양 지성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독일의 정신의학자 크라프트 에빙에 의해 명명된 정신분석학 용어 사디즘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20세기 중반 유럽 실존주의 역시 사드를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보부아르·보들레르·푸코… 찬사

사드의 초상화 ⓒphoto 조선일보 DB
사드의 초상화 ⓒphoto 조선일보 DB

“사드는 자신의 정신생리학적인 숙명을 하나의 윤리적 선택으로 바꿔 놓으려고 했다. 자신의 분열을 각오한 이 행위를 통해 하나의 예증과 하나의 신호를 만들고자 했다. 그의 모험이 광대한 인간적 의미를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는 ‘사드를 화형(火刑)시켜야 하는가’라는 논문을 통해 사드 문학의 자유주의적 사고를 높게 평가했다. ‘마담 보바리’의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스스로를 “사드 유령에 사로잡힌 지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초현실주의자 폴 엘뤼아르와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 철학자 미셸 푸코 역시 사드의 팬이었다.

고 대표는 “도스토옙스키가 인간의 지성적 고뇌의 밑바닥을 그렸다면, 사드는 교양 지성인으로서 건드리기 싫어하는 욕망의 밑바닥을 그렸다. ‘성직자든 창녀든 인간이라면 누구든 화장실엔 간다. 허례허식 다 치우고 다 까고 인간 본질을 바라보자’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드 전기작가 닐 섀퍼는 사드의 문학에 대해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인간문학 밑바닥의 한계를 보여줬다. 적을 아는 건 승리의 지름길인 법,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파악하는 것은 이 폭력적 시대에 우리의 정신건강을 위해 매우 유익하고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고 대표는 “인간의 포악성을 경계하고 인간 심리를 파헤치는 게 사드 문학의 정수”라며 “최근 부끄럽고 혐오스러운 흉악한 사건이 우리 사회에 많이 일어났는데, 사드의 작품이 일련의 사건들에 어떤 성찰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서’ 루머 돌아 고가 암거래도

‘소돔의 120일’이 음해물 판정을 받자 출판시장에선 기현상마저 등장했다. ‘금서(禁書)’가 될 것이라는 루머가 돌며 누군가는 이 책을 사재기해 인터넷상에서 10배가 넘는 가격으로 경매에 부치기도 했다. 판매 보류 관련 언론 보도가 잇따르며 초판 1000만부 주문이 폭증했다.

“대중 도서가 아니다 보니 주문이 별로 안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간행물윤리위 결정 이후 오히려 싹 팔렸죠. 주변에선 ‘장사도 잘되고 얼마나 좋으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이 현상이 하나도 반갑지 않습니다.”

고 대표는 “판매 재미 보려는 포르노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선정성이 부각돼 유명세를 타는 게 씁쓸하다”고 말했다. 사드를 둘러싼 차분한 사회적 논의가 아닌 쏠림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하는 듯했다.

고 대표는 9월 24일 도서재심의를 신청했다. 10월 10일 첫 재심회의가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심의위에서 금지 결정이 나면 법정까지 가져가 한국 출판의 자유를 물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재심을 앞두고 오히려 담담해 보였다. “우리나라도 한때 영화에서 뽀뽀도 못했던 때가 있었죠.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퇴폐 연애를 조장한다는 명목으로 판매 금지가 되던 시절도 있었고요. 이참에 한번 판결을 받아봐 우리나라 출판 수준에 대한 바로미터를 세워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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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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