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오시기 전에 간단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북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말씀드린 후에 인터뷰를 진행해야 할 것 같아서요.” 지난 11월 8일 오후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시민대로의 유진벨재단 사무실. 인세반(62·미국명 스티븐 린튼) 유진벨재단 회장이 주간조선만을 위한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프로젝터 스크린 앞에 섰다. 그는 기자에게 “지금 북한 내 다제내성결핵환자들을 치료하지 않으면 통일 이후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 것”이라고 말했다. 프레젠테이션은 다제내성결핵의 개념부터 북한 환자 수, 통일이 된 이후 소요될 결핵 치료 비용까지 다양한 것을 포괄하는 내용이었다.

다제내성결핵이란 결핵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약제인 아이소니아지드(Isoniazid)와 리팜피신(Rifampicin)에 모두 내성을 보이는 결핵을 말한다. 인 회장은 “북한에서 일차적으로 쓰는 약이 아이소니아지드이고 그 다음 단계에 쓰는 약이 리팜피신이기 때문에, 리팜피신에 내성을 보이는 경우 다제내성결핵 환자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일반 결핵의 치료 기간이 6개월 내외인 것에 반해 다제내성결핵의 치료 기간은 평균 2년을 상회한다고 한다. 타인의 다제내성결핵균에 감염되거나, 일반 결핵 환자들이 약을 제때 복용하지 않을 때 다제내성결핵에 걸릴 수 있다.

북한 보건성에서 도움 요청

유진벨재단은 2007년부터 다제내성결핵 치료에 전념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 북한 평안남·북도와 평양시에 소재한 8곳의 다제내성결핵센터 환자들을 관리한다. 수많은 질병 중 결핵에 집중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인 회장은 “북한 내 보건 문제 1·2·3위를 모두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결핵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결핵은 호흡을 통해 옮기 때문에 다른 질병보다 위험하다”는 것이다. 특히 다제내성결핵의 경우는 완치가 쉽지 않은 데다 전염성이 강해 더욱 치명적이다.

유진벨재단이 북한 내 결핵 환자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97년의 일이다. 1995년 북한에 식량지원을 시작했는데 그로부터 2년 뒤 보건성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정말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다면 북한 내 결핵 환자를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인 회장은 “부모님께서 1960년대 전남 순천에 결핵진료소와 요양원을 세웠던 경험이 있어서 북한 측이 유진벨재단에 도움을 요청한 것 같다. 북한은 한국 정부나 국제 사회에 공식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원치 않는 듯하다”고 말했다.

프레젠테이션이 중반으로 접어들자 인 회장은 “이쯤되면 대부분 북한 내 환자 수를 궁금해하는데, 중요한 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결핵 환자 중 다제내성결핵 환자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그들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해마다 10만여명의 결핵환자가 생겨나고 있다. 이 중 최소 3720명 정도(인도의 발생률 기준)는 병을 쉽사리 고칠 수 없는 다제내성결핵 환자다. 유진벨에서 치료하고 있는 환자는 전체 다제내성결핵 환자의 10% 정도다. 비용 문제 때문이다.

인 회장에 따르면 다제내성결핵 환자 치료에 1인당 연간 240만원이 든다고 한다. 치료 기간이 보통 2년에서 2년 반 정도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환자 1인당 치료비용은 500만원에 달한다. “한국이나 미국에서 다제내성결핵을 치료하는 것보다 북한에서 하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죠. 한국에서 치료하면 입원비, 식비 등 부가비용이 많이 들어갈 것이고, 미국의 경우라면 거기에 각종 상담비용까지 추가될 테니까요. 선진국은 ‘약값’ 그 자체보다 ‘관리 비용’이 더 비싸지 않습니까. 현재 북한 내에서 다제내성결핵을 치료하는 비용은 한국의 10분의 1 수준입니다. 지금이 치료에 있어 골든타임인 셈이죠. 그런데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없어 개인 후원금으로 치료비를 충당해야 하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요.”

북한 주민들이 유진벨재단에서 제공한 치료약을 들고 있다. ⓒphoto 유진벨재단
북한 주민들이 유진벨재단에서 제공한 치료약을 들고 있다. ⓒphoto 유진벨재단

“비용 때문에 환자 돌려보낼 때도”

인 회장은 “지금은 정부의 통 큰 지원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재정적 지원은 물론 보안 문제도 중요한 화두 중 하나다. 현재는 유진벨재단이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결핵 검사 기계와 현미경 등의 반출을 허가받아야 한다. “1년에 두 번씩 규칙적으로 북한에 가는데도 때마다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게 힘들더라고요. 심지어는 유진벨재단 직원들이 착용하는 마스크 하나까지도 모두 반출 승인을 받아야 해요.” 리팜피신 내성을 잡아내는 기계인 ‘진 엑스퍼트’ 역시 입출국 때마다 들고 다녀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북한이 다제내성결핵 치료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 보건성에서 다제내성결핵 관리 부서를 만들었습니다. 북한 내 다제내성결핵 전문가들을 모은 거죠. 결핵국, 대외사업부 등에서 인재를 모아 총 8~9명 규모의 팀을 결성했어요.” 올 초까지 환자 관리에 있어서의 각종 기술적 책임은 모두 유진벨재단에 있었다. 결핵환자들의 가래를 수거하고, 기계를 돌리는 일련의 과정이 모두 유진벨재단의 몫이었다. 그러나 북한 보건성이 다제내성결핵 치료의 절박성을 인식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유진벨재단이 없을 때는 이 팀에 소속된 전문가들이 현장을 돌면서 교육을 하기도 합니다.”

인 회장은 북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인상을 받은 듯했다. 그들은 약을 주면 꼬박꼬박 챙겨 먹고,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담담히 현실을 받아들였다. “만약 다른 나라 사람들이었다면 가능성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 즉시 절망했을 거예요. 난동을 피우는 사람들 때문에 크고 작은 사고도 일어났겠죠. 그런데 북한 사람들은 다릅니다. 자기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에게 점잖게 인사를 해요.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다 나았다. 고맙다’고 이야기하기도 해요.” 그는 스크린으로 북한에서 찍은 사진을 여러 장 보여주었다. 북한 사람들은 유진벨재단이 준 약상자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번은 부부가 다제내성결핵약을 나눠 먹은 사례도 있었다. “남편이 치료약을 복용하는 중에 부인이 기침을 한 거죠. 그래서 자기가 먹던 약을 부인에게 나눠줬어요. 두 사람 다 치료 효과를 보지 못하게 되는 위험한 상황이었죠. 모두 약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인 회장은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다제내성결핵 치료에 실패하는 사람에게 또 다른 약을 주고 싶어도 비용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20~30대 젊은 환자를 포기하고 집으로 되돌려 보내는 심정을 생각해 보세요. 안 되는 일이라면 욕심도 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결핵은 얼마든지 치료가 가능한 질병이잖아요. 그 가능성이, 역설적으로 저희를 가장 힘들게 합니다.”

키워드

#북한
박소영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