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유재일
일러스트 유재일

기자의 친구인 시중은행 이모(48) 부장은 얼마 전 친구들과의 저녁 모임에서 요즘 ‘60세 정년’이 자주 화제에 오른다고 했다. 18대 대선 투표일이 다가오면서 대선 후보들이 앞다퉈 약속한 60세 정년 공약이 진짜 지켜질지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장은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들 대부분이 사실상 정년이 몇 년 남지 않다 보니 60세 정년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인 게 사실”이라며 “기업들의 부담이 클 텐데 정년을 법으로 강제할 수 있는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은행권의 경우 서류상 정년은 60세지만 대부분 55세를 ‘데드라인(deadline)’으로 여긴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 나이를 기점으로 극소수는 ‘하늘의 별따기’라는 임원 승진의 꿈을 이루는 반면 대다수는 희망퇴직이나 명예퇴직을 선택하거나 임금피크제를 신청한 뒤 고객 민원 처리, 채권 추심 같은 한직으로 물러나곤 한다.

실제 퇴직연령 53세

이 부장 같은 베이비붐세대(1955~1963년생)의 귀를 사로잡은 60세 정년 공약은 대통령선거 후보들의 말만 들어보면 누가 정권을 잡든 분명히 지켜질 것 같은 분위기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60세 정년을 법적으로 의무화하는 대신 이에 따른 기업의 인건비 증가를 막기 위해 임금피크제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임금피크제는 일정 연령이 넘으면 급여를 깎는 대신 고용을 보장하는 제도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역시 법적 정년을 60세로 올리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특히 문 후보는 국민연금 수령 연령이 점차 늦어지는 점을 반영해 2033년까지 65세로 정년을 연장하겠다는 구상도 밝혔다. 현재 국민연금의 개시 연령은 60세로 돼 있지만 2013년부터 61세를 시작으로 매 5년마다 1년씩 연금 개시연령을 뒤로 늦춰 2033년부터는 65세부터 연금을 받도록 하고 있다. 무소속 안철수 후보도 다른 두 후보와 마찬가지로 법적 정년을 60세로 의무화할 계획이다. 안 후보는 장기적으로 임금피크제와 연계해 연령에 따른 취업 제한을 폐지하겠다는 공약도 제시했다.

이들 후보의 정년 60세 공약은 700만명에 가까운 베이비부머 유권자들을 향한 ‘구애’라고 볼 수 있지만 정년 연장은 이전부터 적지 않은 전문가들도 필요성을 지적해 온 사안이다. 우리나라의 정년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내에서도 짧은 편이며, 이로 인한 사회적 비용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임금 근로자의 평균 정년은 57.4세이나 실제 퇴직연령은 53~54세에 불과하다. 2010년 고용노동부 조사에 따르더라도 300명 이상 사업장의 평균 정년은 57.4세였지만 조기퇴직이나 명예퇴직으로 일찍 그만두는 사람들을 감안하면 실제 퇴직연령은 53세를 약간 넘는 수준으로 나타났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법정 정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에는 ‘사업주가 정년을 정하는 경우 그 정년이 60세 이상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노력 의무 조항만이 있어 기업이 자체적으로 정년을 결정하면 그만이다.

유럽 퇴직연령 65세 이상

반면 유럽의 경우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법정 퇴직연령이 보장돼 있고 실제 퇴직연령도 우리보다 높다. 또 법정 정년 이전에 퇴직을 할 경우 연금지급 시기를 앞당겨 퇴직과 함께 연금을 받도록 하고 있다. 유럽 국가들의 법정·실제 퇴직연령을 구체적으로 보면 스웨덴은 법정 65세 실제 63.1세, 영국은 법정 65세 실제 62.6세, 독일은 법정 65세 실제 61.3세, 프랑스는 법정 60세 실제 58.8세로 우리보다 높다. 현재 프랑스는 2018년까지 법정 정년을 60세에서 62세로 높이는 것을 논의 중에 있다. 아이슬란드(67세)·노르웨이(67세)·아일랜드(66세)처럼 법정연령이 65세가 넘는 나라들도 있다. 유럽의 높은 퇴직연령과 한국 남성 근로자의 군 의무 복무 기간까지를 감안하면 유럽 성인 남자들은 한국보다 직장에서 평균 11~12년을 더 일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미국의 경우는 아예 정년이란 개념이 없다.

상대적 조기퇴직이 낳는 부작용에 대해 전문가들은 퇴직자들 중 상당수가 ‘치킨집’을 여는 등 과도한 자영업 러시를 불러오고, 이것이 과열 경쟁과 사업 실패를 부추겨 부채 증가와 중산층 몰락으로 이어진다는 진단을 한다. 또 과거보다 수명이 늘어나는 현실에서 50대 조기 퇴직자들이 영세한 중소업체에 재취업하는 경우가 늘고 있고, 이것이 우리나라의 고용 안정성을 해치고 있다는 지적도 한다. 통계청에서 작년에 조사한 연령별 임금 근로자의 근무 사업체 규모를 보면 30인 이하 사업체에 근무하는 근로자의 비율이 20~40대는 50%대에 머물러 있지만 50대는 62.7%, 60대 이상은 80%로 높아졌다.

근로자 입장에서는 정년 연장을 모두 반기지만 고용주 입장에서는 엄청난 부담인 것이 사실이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지난 11월 1일 정치권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년 60세 의무화 법안’과 관련해 국회에 제출한 건의문에서 “정년 연장이 대기업과 공기업 등 좋은 일자리의 기존 근로자에게만 혜택이 돌아가 세대 간 일자리 갈등을 낳을 수 있다”며 법의 강제보다 기업의 자율에 맡길 것을 요청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도 성명서를 통해 “경영계 또한 고령자가 노동시장에 좀 더 오랫동안 남아 있도록 해야 한다는 황우여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발언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60세 정년 법제화에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연공서열형 임금체계로 인해 50대의 임금이 신입직원 급여의 2~3배에 달하는 상황에서 정년 연장 법제화는 일방적 정년 연장으로 이어져 기업의 인건비 부담을 가중시킨다는 것이다. 경총은 또 임금피크제 도입, 고용 형태 다각화 등 정년 부담 경감책도 현실적으로 노조의 반발 등으로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경총 관계자는 “정규직에 대한 과도한 고용 규제로 인해 기업 내 업무 부진자들에 대한 퇴출구가 막혀 있는 상황에서 정년마저 60세로 강제할 경우 기업들의 고용 의지가 꺾여 고용 규모가 크게 위축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년 연장의 핵심은 임금 유연화”

이러한 반발에서 보듯 정년을 연장하고 이를 법제화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적지 않다. 임금이 근무 연수에 따라 꼬박꼬박 올라가고 정규직 근로자를 해고하기도 쉽지 않은 현실에서 정년만 늘리면 그 부담을 기업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기업의 반박 논리다. 이와 관련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근무 연한에 따라 임금이 자동적으로 올라가는 경직된 연공서열형 임금 구조가 유연해지고 임금상승률이 완화돼야만 정년 연장 법제화가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지적을 한다. 한국노동연구원 금재호 박사는 주간조선에 “정년 연장의 핵심은 임금유연화로, 임금유연화가 없는 정년 연장은 기업 부담만 증대시키고 결국 청년 고용을 어렵게 할 것”이라며 “임금을 깎자는 게 아니라 과도한 임금 상승폭을 조정해 직장에서 임금을 오래 받을 수 있는 선진국 같은 임금 그래프가 나오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선진국에 비해 가파른 임금상승과 조기퇴직은 상호작용을 일으켜 우리나라 근로자들을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하는 요인이다. 직장 근속 기간이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기 때문에 직장에 다닐 때 가파른 임금상승을 원할 수밖에 없고, 이것이 기업에 압박을 가해 근로자를 더 빨리 내보낼 수밖에 없도록 악순환 고리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각국 간 임금연공성(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자동으로 올라가는 정도)을 비교해도 알 수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이병희 연구위원이 2008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관리사무기술직의 임금연공성은 한국이 218인 데 비해 스웨덴 112.9, 프랑스 131.0, 독일 126.9, 영국 101.9로 우리보다 훨씬 낮았다. 그만큼 근속연수에 따른 임금상승률이 낮고 그 때문에 우리보다 긴 정년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다. 유럽 국가들처럼 정년을 높이고 이를 법제화하기 위해서는 임금피크제의 확산 등 임금상승률이 생산성과 보조를 맞추도록 하는 다양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경총 류기정 사회정책본부장도 “우리나라의 34세와 55세 근로자를 비교해 봤을 때 55세가 34세에 비해 임금은 평균 3배가 높고 생산성은 60%밖에 안된다”며 “임금이 생산성보다 높은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60년 정년 일단 시작해라!”

일부 전문가들은 기업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60세 정년 법제화는 시작해볼 필요가 있다는 견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식의 논란이 일 수 있는 이슈지만 임금유연화 실시 후 60세 정년 연장 법제화를 도입하기보다는 60세 정년 법제화를 먼저 도입해 임금유연화를 자연스레 유도하는 게 낫다는 논리다. 금재호 박사는 “정년을 60세로 법제화하면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임금을 유연화할 것”이라며 “정년 연장이 결국 임금유연화, 더 나아가 고용시장 유연화라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고용주 입장에서 보면 임금이 너무 빨리 올라가는 상황에서 반발이 일 것이 뻔한 임금체계 개편보다는 40~50대의 고액연봉자들을 내보내는 게 훨씬 편했지만 법정 정년이 못 박아지면 고용주와 근로자들이 임금유연화에 합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논리다. 금 박사는 “기업이 임금유연화를 많이 이룰수록 강력한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며 “임금유연화가 이뤄질수록 생산성 증가가 이뤄지고 그것이 투자와 청년 일자리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 시스템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노동연구원 방하남 박사도 “임금유연화를 먼저 하고 정년 연장을 하겠다면 어느 기업이 먼저 유연화에 나서겠느냐”며 “먼저 정년을 연장해야 노사협상을 통해 임금유연화가 이뤄질 수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60세 정년 법제화로 또 다른 긍정적 효과들이 나타날 수 있다고 내다본다. 일단 중소기업에 미치는 효과다. 사실상 정년의 개념이 없고 상시 해고가 이뤄지는 중소기업 근로자들의 입장에서는 정년 보장이라는 법적 보호장치가 도입되는 것은 물론 고용주 입장에서도 임금유연화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기업이 10% 임금 인상을 하면 하청업체는 5%라도 올려줘야 하는 중소 하청업체 입장에서, 대기업의 임금유연화는 중소업체의 임금유연화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정년 연장은 근로행태의 변화도 이끌어낼 전망이다. 27~53세에 빠짝 벌어야 한다는 인식 때문에 야근을 밥 먹듯이 하던 근로자들에게 60세 정년 보장은 이른바 ‘저녁이 있는 삶’으로의 근로행태 변화를 가져올 것이란 전망이다.

경총 “법 강제화는 시기상조” 주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60세 정년 법제화가 다음 정권에서 실제로 추진된다고 하더라도 현실화에 이르기까지는 적지 않은 난관이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금재호 박사는 “법제화 할 것이냐 말 것이냐부터 어느 기업부터 할 것이냐 등 논란을 정리하는 데만 1년이 걸릴 것”이라며 “노동시장에 파급효과가 큰 대기업과 공공기관들이 먼저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대기업들 중에서는 최근 들어 자발적으로 정년 연장을 추진하는 기업들도 생겨나고 있다. 예컨대 현대중공업과 GS칼텍스는 올해 노사협상에서 58세인 정년을 60세로 연장하기로 합의했다. 이들 기업은 정년 연장 첫해부터 임금을 줄이는 임금피크제도 함께 시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대기업 입장에서는 여전히 정년 연장 법제화에 대한 우려와 비판이 강하고 도입 시기에 대해서도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경총 류기정 사회정책본부장은 “고용 연장에는 공감하지만 법 강제화는 시기상조”라며 “만약 지금 법제화가 되면 강력한 노조가 있는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은 정년 연장 혜택을 보겠지만 중소기업에서는 편법, 탈법으로 법적 정년 보장을 피해가면서 오히려 근로자들의 양극화만 심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류 본부장은 “법제화하더라도 정년 60세 도입 사업장이 최소 70~80%가 되고 난 후에 해야 한다”며 “일본은 60세 정년 도입 대기업이 93%일 때 법제화를 했는데 우리는 지금 그 비율이 22%밖에 안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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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차장 / 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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