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0일 한국전력이 경남 밀양 765㎸ 송전탑 공사를 전격 재개한 가운데 127번 송전탑 진입로에서 마을 주민들이 차도를 막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DB
지난 5월 20일 한국전력이 경남 밀양 765㎸ 송전탑 공사를 전격 재개한 가운데 127번 송전탑 진입로에서 마을 주민들이 차도를 막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DB

지난 5월 22일 한국전력이 아침부터 공사를 시작했지만 이를 막는 주민들과 또다시 대치했다. 이날 오전 8시쯤 경남 밀양시 단장면 바드리마을 뒷산의 88번 송전탑 건설 현장. 주민 손모(62)·박모(60)씨는 굴착기에 밧줄로 몸을 묶고 공사를 막으려다 경찰에 의해 제압됐고 이 과정에서 의식을 잃어 헬기로 후송됐다. 이날 오후 2시쯤 밀양시 부북면의 127번 철탑 공사현장. 한전이 헬기로 공사 자재를 실어나르려 하자 주민 3~4명이 자재에 몸을 묶고 공사를 막았다. 경찰이 이를 제지했고 몸싸움이 벌어졌다. 일부 할머니는 웃옷까지 벗어던지면서 맞섰다. 결국 권영길(76) 이장과 정모(73)·박모(78)·석모(86) 할머니 등 4명이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됐다. 이계삼 반대대책위 사무국장은 “송전탑 공사현장은 지옥 그 자체”라며 “이러다 큰일이 날 것만 같으니 빨리 공사를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만 6명이 다쳤고, 부상자 수는 한전이 공사를 재개한 지난 5월 20일 이후 이날까지만 12명이다.

한전이 공사 중단 8개월 만에 밀양 송전탑 공사를 재개하자 주민들이 현장 곳곳을 막아섰다. 주민들은 고압전류가 흐르는 송전탑이 들어서면 자신의 삶의 터전이 파괴되고 건강, 재산에 위협을 느낀다며 반발하고 있다. 한전은 송전탑 건설은 전력이라는 공공재를 공급하기 위한 공익적 목적이라고 강조하며 일부 주민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주민과 한전이 충돌하면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는 밀양 송전탑 공사란, 울산 울주군 신고리 원자력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경남 창녕군 북경남변전소까지 보내는 765㎸(킬로볼트)급 송전 선로의 설치를 목적으로 한다. 기장군과 양산시·밀양시 등 5개 시·군을 지나는 90.5㎞ 구간에 161기의 철탑을 세운다. 밀양시를 제외한 지역에선 이미 공사가 끝났다. 울주는 2011년, 양산은 2012년에 공사가 끝났고, 기장과 창녕도 지난 3, 4월에 마쳤다.

올 12월부터 상업 가동을 시작하는 신고리 3호기(설비 용량 140만㎾)의 정상 운영을 위해서는 공사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한전 측 설명이다. 밀양시에선 주민 반대로 지난해 9월 하순부터 공사가 중단, 52개가 지금껏 설치되지 못했다. 신고리 3호기가 정상 가동을 못하면 올 겨울 전력 수급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돼 왔다.

때문에 한전에서는 관련법 개정을 전제로 지역지원사업비를 매년 24억원 지원하고 지역특수보상사업비 165억원, 이주를 위한 주택 매입, 특산물 판로 지원, 마을기업 육성, 건강검진지원 등 13개의 보상안을 주민들에게 제시했다. 이에 대해 주민들은 “보상안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강제 수용 형태의 보상을 실시하려는 것 자체가 문제”라며 일축하고 있다. ‘밀양 765㎸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공동대표인 김준한 신부는 “높이 100m가 넘는 거대한 고압 철탑에서 전류가 흐르는 굉음을 듣고 살 수 없다”면서 “주민들은 그저 지금처럼 살던 곳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새로운 선로를 만들지 말고 기존 선로를 이용해 신고리 3호기와 4호기에서 생산되는 전기를 보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기존 선로에 용량을 높여서 보내면 된다는 주장이다. 또 장기적으로는 송전탑을 만들지 않고 땅속으로 전기를 보내는 지중화 계획을 수립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주민들에겐 한전에 대한 불신도 깊다. 대책위 측은 “지난 8년간 한전이 너무나 자주 말을 바꿨다. 우리는 한전의 설명을 믿을 수 없다”면서 “우리 측 전문가들이 한전의 자료를 검토할 수 있는 ‘전문가 협의체’를 구성할 수 있도록 동의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내용을 요구하고 한전의 보상안에 반대하는 서명도 최근 진행됐다.

이에 대해 한전 측은 밀양에 송전탑 설치가 지연될 경우 국가적 전력 수급과 경제 손실이라는 공익적 목적이 훼손된다고 보고 있다. 한전 이정복 홍보팀장은 “3조2500억원을 투입한 140만㎾(킬로와트)급 최신형 원자력발전소인 울산광역시 울주군 신고리원자력발전소 3호기가 9월 준공을 거쳐 12월 말 가동한다”면서 “여기서 생산되는 전기를 보낼 송전선로가 없으면 전력 수급에 큰 차질이 생긴다”고 말했다. 올해 4월부터 이미 예비 전력이 비상상황 직전인 ‘준비 단계’를 넘나들고 있는 데다 매년 전력 사용량이 증가하는 추세임을 감안하면 전기 사용량이 많은 올겨울에는 블랙아웃(대정전)이 발생할 우려가 크다고 보고 있다. 5월 들어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재개한 것도 5월 중 송전탑 공사를 시작하지 않으면 12월 말 전력 공급에 차질을 빚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전에 따르면 140만㎾급 원전을 가동하지 못해 하루에 더 드는 전력 생산 비용은 56억원, 한 달이면 1680억원이다. 한전 측은 “준공된 원자력발전소를 제때 활용하지 못하면 LNG, 가스, 중유 등 원료비가 더 비싼 발전 원료로 전력을 생산해야 하기 때문에 국가적 손실”이라고 말했다.

정부와 정치권도 해결책 모색에 나섰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지난 5월 22일 당정협의에서 밀양 송전탑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 송·변전시설 주변 지역 지원에 대한 입법을 6월 임시국회에서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기로 했다. 정부는 “지역 주민의 재산권 피해를 상당 부분 해결해 주는 쪽으로 입법이 이뤄질 것이며 이를 보증하겠다”고 밝혔다. 밀양 주민들이 요구하는 전문가협의체 구성에 대해서도 정부 측은 “국회 산업위 통상에너지소위에서 관련 문제를 협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당정협의 결과도 주민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밀양 765㎸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는 이날 긴급 논평에서 “주민들이 고작 보상금을 몇 푼 더 받기 위해 8년 동안 싸운 것이 아니라, 주민 건강권을 비롯한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며 “정부와 한전은 열린 마음으로 진정성을 갖고 주민과 반대대책위와 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행범 부산대 행정학과 교수는 “공익과 사익의 충돌이라 하더라도 좌파나 환경단체 등에 의해 정치적으로 부풀려지거나 선동되는 제3의 요소를 배제한 순수한 주민의 사익인지 여부를 분명히 해야 한다”면서 “그런 다음 충분한 보상이나 조정이 이뤄져야 하고, 공익의 실현에서는 과연 정당한 법 절차를 밟았는지 다시 한 번 검토, 설득력 있는 논의를 거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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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훈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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