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가운데)가 5월 27일 테헤란에서 열린 혁명수비대 소속 그룹의 졸업식에 참석해 있다. ⓒphoto AP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가운데)가 5월 27일 테헤란에서 열린 혁명수비대 소속 그룹의 졸업식에 참석해 있다. ⓒphoto AP

이란 중부도시 이스파한에서 지난 6월 4일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74)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대통령 선거를 불과 열흘 남겨둔 시점이었다. 종교지도자가 국가 최고지도자인 신정(神政)국가 이란에서 ‘신의 징표’라 여겨지는 최고지도자를 규탄하는 시위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스파한 도심 도로는 이날 오전부터 시민들로 가득 메워졌다. 시민 수만 명은 천천히 거리행진을 하며 “하메네이는 독재자”라는 구호를 외쳤다고 BBC방송이 보도했다. 검은 차도르를 쓴 여인들부터 젊은 남자, 백발 노인들까지 남녀노소할 것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일부는 하메네이를 독일 나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 북한 지도자 김정은에 비유했다. 시위 모습을 촬영한 이란대학통신(ISNA) 등의 동영상을 보면 시위대는 “하메네이는 1979년 이란혁명을 반역했다” “정치와 종교의 균형을 깨뜨리고 있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날 시위는 개혁파 종교 지도자인 아야톨라 잘랄루딘 타헤리의 장례식이 계기가 됐다. 지난 6월 2일 사망한 타헤리는 고위 성직자들의 권력 독점에 항의하다 지난 2002년 이스파한의 최고 종교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나 파장을 일으켰다. 타헤리는 당시 “공화국이란 끊임없는 관료의 교체를 의미하며, 시민사회는 정부에 대한 비판과 도전을 전제하고, 혁명은 국민의 요구에 대한 부응을 뜻한다”면서 “불행히도 오늘날 이란의 현실은 종교라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정치라는 낙타에 올라탄 사람밖에 없다”면서 하메네이 등 성직자 중심의 기득권층을 비판했다.

하메네이는 이슬람 신학교에서 교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이슬람 신학자였다. 세속주의를 표방하는 정권이었던 이 시기 그는 이란이 이슬람 국가로 거듭나야 한다며 이슬람 근본주의를 강조했다. 하메네이는 이슬람사원, 대학 학생 모임 등에서 근본주의를 설파했고, 이로 인해 경찰에 체포·구금되기도 했다. 하지만 훗날 친(親)서방 왕정이었던 이란을 현재의 이슬람공화국으로 바꾼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1902~1989)의 가르침을 받으며 정치적으로 성장한다. 아랍어도 구사했던 그는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 등의 사상적 기초를 마련한 이슬람학자 사이드 쿠틉(이집트인)의 저서를 페르시아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하메네이가 권력을 쥐게 된 것은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호메이니를 최고지도자로 한 이슬람공화국이 수립되면서부터다. 그는 바로 혁명수비대 차관이 됐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81년 10월 급히 치러진 선거에서 대통령이 됐다. 그해 선거는 8월 30일 당시 대통령이던 무함마드 알리 라자이가 대통령관저에서 열린 회의에서 한 비서관이 놓고 간 서류가방 속 폭탄이 터져 암살되면서 실시됐다. 하메네이는 대통령직보다 높은 지위인 최고지도자에 있던 호메이니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라 당시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 차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이때 하메네이의 나이가 42세였다.

하메네이는 그의 스승이자 국민으로부터 ‘혁명의 아버지’라 불린 호메이니가 1989년 죽자 제2대 최고지도자로 등극한다. 국정에 대한 의사결정권자들이 모인 전문가회의에서 투표로 선출됐다. 하지만 하메네이는 최고지도자로 활약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8년간 대통령을 역임했지만, 국민적 우상이던 호메이니만큼의 카리스마와 리더십은 부족했다. 이란 역사 전문가인 에르반드 아브라하미안 미국 뉴욕시립대 교수는 그의 저서 ‘누가 책임지고 있나(Who’s in Charge)’에서 “하메네이는 최고지도자가 되자 호메이니와는 다른 방식으로 통치해야 했다. 호메이니는 어느 한쪽에 권력이 쏠려선 안 된다며 상호 견제가 가능한 정치구조를 추구했으나, 하메네이는 그 반대였다. 측근을 중심으로 한 권력 독점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혁명의 주역 중 한 명이었던 그가 정작 혁명의 원칙을 깬 것이다. 그는 군(軍), 정보부, 각종 사회단체, 언론계에 가까운 성직자들을 심어 장악력을 키워나갔다.

카리스마가 부족했던 하메네이는 신비주의 전략을 썼다는 분석이다. 그는 매일 벌어지는 국내외 사안은 대통령이 도맡도록 하고, 자신은 한발 뒤로 물러나 국민에게 일종의 국가의 ‘수호자’와 같은 존재로 인식되도록 했다. 기자회견장같이 질문을 받아야 하거나 성격이 쉽게 드러나는 자리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금요기도 예배나 주요 인물의 추모식 같은 자리에 나타나 주로 1979년 혁명, 정의, 독립, 이란인으로서의 자존감 등 국민적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주제를 주로 꺼내놓았다. 민주주의, 정부의 투명성 등과 같은 치부가 되는 주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하메네이는 최근 대선 후보의 적격 심사 등을 하는 헌법수호위원회를 통해 자신의 권위에 위협이 되는 인사들에게 후보 자격을 주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헌법수호위원회는 특히 개혁·중도 성향의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을 “고령이라 체력이 부족해 (국정 운영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후보 명단에서 제외해 공정성 논란에 휩싸였다. 최종 대선 후보로 오른 8명은 대부분 하메네이의 측근이었다.

하메네이가 이번 선거에 무리하게 개입하는 이유는 권력 누수를 막기 위해서라고 많은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하메네이는 경제난·국제적 고립 등으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덩달아 타격을 입고 있다. 지난 2009년 대선 당시 부정선거 의혹에도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당선을 지지하며 책임진 이가 바로 하메네이였기 때문이다. 헌법수호위원회가 개혁파 주자들이 대선에 출마조차 못하도록 제한한 것은 이들이 당선 가능성이 높으며, 이를 하메네이가 우려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하메네이가 후계자를 준비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라는 관측도 있다. 최고지도자를 지탱하고 있는 권력기관 최고지도자 사무국이 2009년부터 건강 악화설에 휩싸여 있는 하메네이 이후의 상황을 대비하고자 대통령직에 우호적 인사를 앉히려 한다는 것이다. 1989년 6월 회의 중 옆에 있던 녹음기가 폭발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그는 지금까지 오른팔을 쓰지 못하며, 후유증을 겪고 있다. 차기 대통령뿐 아니라 하메네이에 이어 누가 ‘신의 징표’라는 이름을 거머쥘지 조심스러운관측들이 나오고 있다.

노석조 조선일보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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