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세계의 주요 언론은 독일 주간지 슈피겔(der Spiegel)의 ‘특종’을 그대로 받아썼다. 유럽과 미국 언론이 한 달 넘게 시리아의 화학무기 사용 의혹을 지속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가운데 슈피겔이 의혹의 핵심 인물인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Bashar al-Assad) 대통령을 단독 인터뷰한 것이다.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은 슈피겔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서구는 우리보다 알 카에다를 다룰 때 더욱 자신감을 느낀다” “(서구를 대표해) 독일이 시리아 사태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란 발언을 쏟아냈다. 세계 언론들은 슈피겔의 단독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받아쓰며 “슈피겔이 보도했다”는 문구를 기사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1947년 1월 4일 창간호를 발간한 슈피겔은 6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독일과 유럽은 물론 전 세계에서 가장 신뢰받는 언론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슈피겔은 창간 이후 비약적 성장을 거듭했다. 창간 당시 1만5000부에 불과했던 슈피겔의 발행 부수는 창간 10년 만에 30만부로 수직 상승했다. 1970년대 90만부의 발행부수를 기록한 슈피겔은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새로운 시장’인 동독의 독자들을 흡수해 발행 부수 100만부가 넘는 잡지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독일 함부르크에 본사를 두고 있는 슈피겔은 전 세계적으로 ‘종이 매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와중에도 현재 매주 100만부 이상을 발행하고 있다.

독일어로 ‘거울’을 뜻하는 슈피겔의 뒤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깊이있는’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언론이라는 수식어가 따라온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Economist)는 슈피겔에 대해 “유럽 대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잡지”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슈피겔이 ‘존경받는 언론’이라는 지위를 유지하게 된 이유는 언론 자유와 사회 정의를 위해 ‘한 우물’을 팠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데올로기 스펙트럼에서 ‘중도 좌파’로 분류되지만, 슈피겔은 60년 넘는 역사 동안 깊이 있는 탐사 보도와 권력에 대한 비판 기사를 끊임없이 쏟아내며 독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1962년 일어난 이른바 ‘슈피겔 스캔들’은 지금의 슈피겔을 있게 한 상징적 사건이다. 당시 슈피겔은 독일군의 방위 태세가 허점투성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다. 슈피겔 기사가 나온 뒤 독일 국방장관과 보수 정치인들은 슈피겔 발행사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 편집국은 경찰에 의해 압수수색됐고 발행인을 비롯해 슈피겔 에디터들은 반역 혐의로 구속되기까지 했다. 당시 기사를 작성한 뒤 스페인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던 기자까지도 휴가지에서 체포할 만큼 독일 정부는 ‘슈피겔 길들이기’에 적극적이었다.

독일 정부의 슈피겔 탄압은 역풍을 불러왔다.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는 모습을 지켜본 독일 시민들이 정부를 비난하는 대규모 시위를 시작했다. 정부는 여론의 비난에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슈피겔의 명성은 올라가고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와 국방장관이 인책 사임했다. 언론사(言論史)에서 슈피겔 스캔들은 “전후(戰後) 독일에 최초로 대규모 시위를 불러온 사건이자 독일 현대 민주주의의 시작점”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슈피겔 스캔들 이후 슈피겔은 ‘권력에 굴하지 않는 언론’이라는 정체성을 보유하게 됐다. 슈피겔이 지금의 권위를 얻게 된 배경에는 슈피겔을 창간한 루돌프 아우크슈타인(Rudolf Augstein)이 있다. 23세의 젊은 기자로 슈피겔을 창간한 아우크슈타인은 슈피겔 초판이 발행된 1947년 1월부터 세상을 떠난 2002년 11월까지 슈피겔의 발행인으로 슈피겔을 진두지휘했다. 국제언론인협회(International Press Institute)는 2000년 아우크슈타인을 ‘언론자유를 수호한 50인의 언론인’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아우크슈타인은 ‘어떤 권력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슈피겔의 철학으로 내세웠다.

슈피겔이 권력에 굴하지 않고 비판적 기사를 쏟아낼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슈피겔 기자 토비아스 랩(Rapp)은 “슈피겔 기자들이 회사의 실질적 주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우크슈타인 발행인은 1974년 사원들이 슈피겔의 실질적인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회사를 구조조정했다. 3년 이상 슈피겔에서 근무한 사원이라면 누구든 슈피겔의 지분을 가질 수 있게 한 것이다. 랩 기자는 “경영진을 제외한 직원들이 50.5%의 회사 지분을 갖고 있다”며 “우리가 회사의 주인이기 때문에 기자 한 명 한 명이 좀 더 깊이 있고 의미 있는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온라인 미디어의 열풍에 맞서기 위해 슈피겔은 일찌감치 온라인 서비스도 시작했다. 1994년 ‘슈피겔 온라인(Spiegel Online)’을 시작한 것이다. 언론 역사에서 슈피겔 온라인은 기존의 언론사가 시작한 최초의 온라인 서비스로 기록됐다. 타임(TIME) 매거진보다 하루 앞서 온라인 서비스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슈피겔 온라인은 지면으로 발행되는 슈피겔의 기사를 온라인에 그대로 게재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슈피겔 온라인 시작과 동시에 독립적인 편집국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슈피겔 온라인은 지면을 발행하는 슈피겔 편집국과 별도로 80여명의 기자를 채용해 독립적인 기사를 작성해서 온라인에 게재하고 있다. 2004년에는 슈피겔 인터내셔널(Spiegel International) 서비스를 시작하고 전 세계 독자들을 위해 영어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종이 언론의 침체라는 전 세계적 추세에 대해서도 슈피겔은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슈피겔에서 주로 문화 관련 기사를 쓰고 있는 랩 기자는 “고품격 기사에 대한 수요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게 슈피겔의 정신”이라며 “슈피겔 기자들은 심층 취재를 보장받고 보통 한 달에 1~2개의 기사만을 작성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종이 매체가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은 상식이 됐지만 슈피겔 내에서는 ‘고품질의 기사를 생산할 경우 슈피겔은 지금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고품격 기사를 생산하기 위해 슈피겔은 ‘사실 확인(fact checking)’ 작업에 사활을 걸고 있다.

기사를 작성하는 200여명의 기자와 별도로 사실 확인 작업을 하기 위해 80여명의 팩트 체커(fact checker)를 정규직으로 고용한 것이다. 콜럼비아 저널리즘 리뷰는 이같은 슈피겔의 노력에 대해 “슈피겔은 세계 언론 중 최대 규모의 팩트 체킹을 하는 언론”이라고 평가했다.

석남준 조선일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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