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7일 개관한 수원광교박물관은 인간의 집념이 어떻게 역사를 만들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를 아낌없이 보여준다. 이곳은 또한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평범한 진리를 증명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수원광교박물관은 이름에서 짐작하듯 광교신도시에 자리 잡고 있다. 수원월드컵경기장 동북쪽에 자리한 게 광교신도시다. 영동고속도로에서 동수원IC로 빠져나가면 바로 광교신도시와 연결된다. 수원광교박물관이 문을 열면서 수원시는 수원박물관, 수원화성박물관과 함께 3개의 박물관을 보유하는 자치단체가 되었다.

광교는 안동 김씨가 세거(世居)하던 곳이며 청송 심씨의 집성촌이기도 했다. 박물관이 위치한 곳은 광교역사공원 안. 세종대왕의 장인인 심온(沈溫)의 묘가 바로 박물관 이웃이다.

박물관은 1층과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은 광교역사문화실(室)이다. 264㎡(약 80평) 규모의 전시실에 선사시대부터 고려·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는 광교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1090㎡(약 330평)인 2층은 박물관의 메인 전시공간. 계단으로 올라가면 정면에 소강 민관식실이 보인다. 복도 맞은편에는 독도박물관장을 지낸 서지학자 사운 이종학실이다.

기자는 이종학실을 먼저 가보기로 했다. 솔직히 고백하면, 기자는 이 박물관에 오기 전까지 이종학(李鍾學·1927~2002)이라는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종학실로 먼저 발길이 끌렸다. 일본의 아베 정권이 세계를 상대로 역사 조작과 왜곡을 서슴지 않는 상황에서 이종학이 우리 역사를 지키기 위해 일생 동안 수집한 사료들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수원광교박물관은 왜 이종학 소장품을 전시하게 되었을까.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그 궁금증이 풀렸다. 사운(史芸) 이종학은 수원이 고향이다. 1927년 수원군 우정면 주곡리 244번지에 태를 묻었다. 어릴 적 부친을 여읜 이종학은 모친과 조부의 보살핌을 받았다.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익힌 것 외에는 정규학교를 마치지 못한 채 독학했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한 그는 공군 복무를 마친 뒤인 1955년 서울 종로5가에 연홍서림을 열었다. 그는 이어 1957년부터 연세대 앞에 고서점 연세서림을 운영했다.

평범한 고서점 주인이었던 이종학의 운명을 바꿔놓은 사건은 1970년대 초 이순신과의 만남이었다. 고서점을 운영하면서 그는 사료 수집가이자 교육자인 서인달을 알게 되었다. 어느날 서인달로부터 이순신이 쓴 ‘한산도가’를 전해받으면서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이종학은 속절없이 이순신에 빠져들었다. 이후 그는 ‘난중일기’를 수백 번도 더 읽어 거의 외우다시피했다.

그는 우리 역사와 영토를 지키려면 감정적 대응이 아닌 객관적 사료로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고 믿었다. 사실적 대응만이 역사전쟁의 승리자가 된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는 본격적인 사료수집을 시작했다. 조선일보 1976년 4월 29일자는 이종학이 발굴한 ‘명량대첩 장계 초록’을 문화면 한 면에 걸쳐 보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아호를 사운(史芸)이라고 지었다. 즉 역사의 김매기라는 뜻이다. 한 번뿐인 짧은 인생을 역사의 김매기에 바치겠노라고 결심했다. 그는 1996년 5월, 사운연구소를 설립했다.

첫 번째 전시실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사운연구소에서 펴낸 각종 사료집. ‘일본의 독도정책자료집’ ‘일본의 독도정책자료집(역)’ ‘한국강점자료집’ ‘한해통어지침(韓海通漁指針)’ ‘조선통어사정(朝鮮通漁事情)’ 등이 전시돼 있었다. 이 중 사운연구소에서 만든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는 30권에 달한다. 이종학은 사운연구소에서 출간한 자료집을 전 세계의 연구기관, 정부기관, 도서관 등에 기증했다. 전시실에는 국제사법재판소와 프라하국립대학교에서 보내온 자료 수령증이 전시되어 있다. 프라하 국립도서관장 나탈리 코니치코바가 보내온 서신 전문을 잠깐 읽어본다.

‘친애하는 이종학 선생님,

한국강점자료집을 잘 받았습니다. 국립도서관의 자료집을 한층 풍부하게 해주셔서 대단히 기쁩니다. 우리 도서관을 신뢰하셔서 이런 책을 보내주신 귀하의 배려에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는 수원의 원래 이름인 화성(華城) 되찾기 운동을 벌였다. 마침내 1997년 1월 수원성이 화성으로 다시 태어났다. 또 같은해 11월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데도 그의 사료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종학의 업적 중 최고는 뭐니 뭐니 해도 독도박물관 개관이다. 1997년 8월, 울릉도에 개관한 독도박물관에 이종학은 20여년간 수집한 자료를 기증했다. 이종학은 초대 박물관장을 맡으며 독도 관련 기획전시와 학술발표회를 열었다. 전시실에는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기공식 동판, 독도관 건립 계획, 독도박물관 개관식 초대장 등이 있다.

(왼쪽부터) 1785년 일본에서 나온 ‘삼국접양지도’.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과 같은 색으로 표시했다.<br></div>사운연구소에 발행한 사료집들.<br>이종학.
(왼쪽부터) 1785년 일본에서 나온 ‘삼국접양지도’.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과 같은 색으로 표시했다.
사운연구소에 발행한 사료집들.
이종학.

이종학은 일제에 의해 강제병합된 우리 강역을 지키기 위해 일본, 프랑스 등에서 발행한 지도를 수집했다. 전시품 중 일반의 눈길을 사로잡는 게 1785년에 나온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之圖). 일본의 대표적인 실학자 하야시 시헤이(1738~1793)가 제작한 지도다. 삼국을 색채를 달리하여 그렸다. 조선과 일본 사이의 바다 한가운데에 큰 섬 하나와 그 오른쪽에 작은 섬 하나를 붙여 그렸다. 이 섬들은 모두 조선과 같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분명히 밝혔다.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한 일본 지도 여러 점과 프랑스 지도도 보였다. 1778년 장비에가 제작한 지도에 따르면 조선과 일본 사이의 바다는 ‘Mer de Coree’, 즉 조선해라고 표기해 놓았다. 1854년 일본에서 목판으로 제작된 세계지도 ‘신정지구만국방도(新訂地球萬國方圖)’, 1871년 역시 일본에서 제작된 ‘동전지구만국방도(銅鐫地球萬國方圖)’ 등에도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해 놓았다.

간도(間島)는 우리 영토였다. 그런데 지금은 중국 영토가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종학은 우리 땅 간도와 관련된 지도를 수집했다. 일제는 한반도 강점을 위한 책략으로 백두산정계비에 대한 청나라의 해석을 수용했다. 일본은 1909년 이를 근거로 간도협약을 체결해 간도를 청의 영토로 만들어버렸다. 대한제국은 이를 지켜보면서도 아무런 주장도 하지 못했다. 전시실에는 간도 관련 지도, 책자 등이 여러 점 보인다. ‘간도지도’ ‘간도사정개요’ ‘간도산업조사서’ ‘간도소사’ ‘최근간도사정, 부로지이주선인 발달사(附露支移住鮮人發達史)’ ‘간도문제의 경위’ ‘간도지나 및 조선인 호칭 사명 약도’ 등이다.

이종학실을 30분만 둘러보아도 지금 아베 정권이 벌이는 역사왜곡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가 드러난다. 이런 엄청난 일을 이종학은 혼자 해냈다. 전시물을 보다 보면 관람객들은 이종학이 흘린 눈물과 땀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제는 민관식실 차례다. 대한체육회장·문교부장관·국회부의장·대한약사회장 등을 지낸 소강 민관식(閔寬植·1918~2006). 이 전시관은 민관식이 다채로운 활동을 하면서 그 과정에서 얻은 잡다한 물품을 전시해놓은 공간이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허접한 쓰레기로 취급했을 물품도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런 개인사가 무슨 박물관에 전시할 게 있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민관식실의 전시품들은 작은 실물을 통해 들여다보는 한국 현대사다. 수첩, 상장, 입장권 같은 일상사에서 얻어지는 그런 것들이다. 거시사(巨視史)가 아닌 미시사(微視史)의 표본이랄 만하다. 작은 물품을 통해 그 안에 나이테처럼 스며든 근·현대사를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일제강점기에 개성에서 태어나 혼돈의 해방공간, 6·25전쟁, 가난과 혼돈, 3공화국, 5공화국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가 고스란히 겹쳐진다.

개성에서 태어난 민관식은 원정보통학교,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 수원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 농대), 교토대 농림화학과를 졸업했다. 전시실에 들어가면 원정보통학교 단체 사진이 보인다. 한복 저고리를 입고 모자를 쓴 학생들. 지금까지 살았으면 96세가 넘었을 학생들이다.

경성제일고보 졸업증서와 졸업앨범도 있다. 7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흑백사진은 여전히 선명하다. 1937년 수원고등농림학교 정문 앞에서 찍은 입학기념 사진은 어떤가. 소장품들은 원래 자택인 서울 한남동 지하 전시관에 있었다. 부인 김영호 여사가 평생을 걸쳐 보관해온 덕분이었다. 그동안은 한남동 자택을 찾는 사람들만 이 컬렉션을 관람할 수 있었다. 수원광교박물관이 민관식의 수집품들을 기증받은 것은 바로 그가 청춘을 보낸 곳이 수원이었기 때문이다. 수원고농 시절 사진은 당시의 수원 풍경을 만나게 한다. 수원의 대표적 명소인 서호 벚꽃길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1930년대 수원고농 학생들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이가 공부를 하려면 일본 유학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민관식은 수원고농을 졸업한 뒤 교토제국대학 농림화학과에 들어가 과학도의 꿈을 키웠다. 1940년대 일본에 유학한 조선 학생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노트가 네 권 있다. 노트는 일본어, 영어, 한자로 빼곡하게 필기되어 있다. 유학생 민관식이 얼마나 성실하게 수업을 들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이 노트는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말을 쓰지 못했던 현실을 방증한다.

(왼쪽부터) 민관식.<br></div>역대 올림픽 공식 포스터와 각종 기념물.<br>1972년 청와대 오찬 메뉴표.
(왼쪽부터) 민관식.
역대 올림픽 공식 포스터와 각종 기념물.
1972년 청와대 오찬 메뉴표.

민관식은 5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정치인으로 보낸 시간이 가장 길다. 1960년 민관식은 5대 총선에 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했다. 선거벽보의 슬로건은 ‘독재와 싸운 정당 마음놓고 찍어주자!’ ‘독재와 싸운 사람 마음놓고 찍어주자!’ 그런데 기호 3번을 나타내는 기호가 특이하다. 아라비아 숫자 3이 아닌 막대기 3개다. 이런 선거기호 표기는 1964년에까지 지속되었다. 제6대 선거에 동대문갑구에 출마했을 때 역시 기호는 아라비아 숫자가 아니었다. 이것은 숫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을 배려한 것이었다. 그만큼 문맹자가 많았다는 뜻이다.

민관식은 이승만 정권 때부터 정치를 했다. 당연히 한국정치사의 거물들과 교유를 가졌다. 1960년 5대 국회의원 선거 때 유세장에서 대통령 윤보선과 나란히 앉은 사진도 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젊은 시절 사진도 눈길을 끈다. 3선 의원 시절이던 민관식은 국정감사장에서 초선의원이던 김대중과 만난다. 이후 두 사람은 정치적 입장은 달랐지만 교유는 지속되었다. 대통령 시절 김대중은 원로위원 민관식을 청와대로 초청하기도 했다. 역대 대통령이 명절 때마다 민관식에게 보내온 선물도 구경할 수 있다. 14대 김영삼 대통령은 찻잔 세트. 민관식과 김영삼은 제3대 민의원 동기로 각별한 유대를 맺어왔다. 15대 김대중 대통령은 녹차를, 16대 노무현 대통령은 전통주를 각각 보내왔다.

민관식은 메모광이자 수집광이었다. 중요한 만찬장에 가면 그날의 식단표가 있다. 민관식은 이런 자리에 참석할 때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의 서명을 받아놓는 버릇이 있었다. 특히 청와대 초청 식사 메뉴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통령은 서울대 졸업식에 참석했고 우수졸업생들을 초청해 식사하는 관행이 있었다. 1972년 2월 23일 민관식은 서울대 졸업생들과 청와대에서 식사를 했다. 그 시절 대통령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누구나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진지, 만두국, 냉채, 상추·배추 겉절이, 도라지볶음, 명란젓, 족편, 잡채묶음, 새우야채튀김, 닭볶음, 아이스크림, 생강차. 민관식이 수집한 청와대 식단표는 음식문화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다.

민관식은 한국 체육근대화의 아버지로 평가된다. 그는 최장수 대한체육회장(1964~1971)을 지냈다. 체육 불모지에서 그가 쌓아올린 업적은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한국은 은메달 2개와 동메달 1개를 획득하는 데 그쳤다. 최대 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하고도 초라한 성적을 거둔 것이다. 한국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불도저처럼 체육 근대화를 밀어붙였다. 1967년 태릉선수촌을 준공했고, 1970년에는 태릉국제수영장을 개관했다. 1971년에는 태릉국제스케이트장이 문을 열었다. 소치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금메달리스트 이상화, 밴쿠버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모태범과 이승훈이 바로 이곳에서 훈련했다. 태릉국제수영장, 태릉국제스케이트장 건설과 관련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받은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

1964년부터 2004년까지 올림픽과 관련된 포스터, 기념품, 앰블럼, 배지 등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시간여행을 떠나게 한다. 사진, 자료, 물품들에 얽힌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게 곧 한국 현대사와 겹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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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편집위원 /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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