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일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선진화시민행동 등의 주최로 열린 ‘공영방송 KBS 규탄 및 수신료 납부 거부선언 기자회견’. ⓒphoto 윤동진 조선일보 기자
지난 7월 1일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선진화시민행동 등의 주최로 열린 ‘공영방송 KBS 규탄 및 수신료 납부 거부선언 기자회견’. ⓒphoto 윤동진 조선일보 기자

길환영 KBS 사장이 논란 끝에 지난 6월 10일 불명예 퇴진했다. 세월호 사고 이후 김시곤 당시 보도국장 등의 폭로로 청와대의 보도 통제 및 외압 논란이 불거졌고 이로 인해 취임 1년7개월 만에 해임됐다. 길환영씨의 해임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는 공영방송 KBS가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드러냈다. 동시에 KBS의 정치적 독립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확인시켰다.

길씨의 해임 이후 새 사장 선출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KBS 사장 선출 방식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언론계와 학계 일각에서 터져나왔다. 지금의 ‘사장후보자 공모 후 이사회 과반 의결’ 방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현행대로 간다면 새 사장도 언제든 ‘제2의 길환영 사장’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현재 KBS 이사회는 여당 추천인사 7명, 야당 추천인사 4명으로 구성돼 있다.

문제는 이런 이사회 구성 속에서 과반 의결이 KBS에 정치적 독립성을 보장해줄 수 있느냐다. 애초에 여대야소로 구성된 이사회에서 사장이 선출되기 때문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청와대의 입맛에 맞춘 인사가 KBS 사장으로 선임되고, 이후 KBS의 운영에 정부의 입김이 작용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다. KBS 이사회 구조 속에선 여야가 합의할 수 있는 인물을 뽑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같은 방송 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방송법도 개정됐다. 개정된 방송법에는 ‘KBS 낙하산 사장 방지’를 위해 사장의 자격요건을 강화했고 인사청문회도 열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오는 8월 29일부터 시행되는 개정 방송법은 이번에 선임되는 사장 선출 과정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신임 사장 인선이 이뤄지는 것이다.

일각에선 개정 방송법 시행을 겨우 두 달여 앞둔 채 신임 사장을 뽑는 것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연세대 강상현 교수(58·언론홍보영상학)는 “당분간 사장 인선을 직무 대행 체제로 유지하다가 새로운 방송법의 적용을 통해 새 사장을 뽑으면 명분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며 “개정된 방송법도 다소 미흡하지만 적어도 이를 적용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현재 KBS 이사회에선 그런 노력조차 보이지 않아 아쉽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 공약사항이기도 했던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문제에 대한 의지를 보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KBS 사장 선임을 둘러싼 갈등은 매 정권 때마다 마치 ‘복사하기+붙여넣기’를 한 것처럼 되풀이되고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정연주씨와 이명박 정부 시절 김인규씨의 사장 선임 당시에도 있었다. 앞선 두 번의 사장 인선 과정에는 제도 개선안이 일부 수용돼 사장추천위원회(사추위)가 별도로 구성되기도 했다. KBS 이사회가 사장을 공모해 3배수로 압축하고 최종 1인을 가리는 일방적이고 불투명한 방식에서 탈피해, 외부 인사의 참여를 확대함으로써 부적격 후보자를 철저히 걸러내자는 취지였다.

이조차도 기존의 사장 선출 구조 자체를 바꾸진 못했다. 6월 30일 KBS 이사회는 임시 이사회를 열고 특별다수제 및 사회 각계각층 인사로 꾸려질 사장추진위원회(사추위) 등 현재 사장 선출 방식 개선 방안으로 제시된 대안들을 받아들일지에 대해 논의했다. 야당 추천 이사와 여당 추천 이사 간의 격론 끝에 결국 특별다수제 도입과 사추위 구성은 부결되며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KBS 안팎에서는 기존 선출 방식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제도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핵심은 KBS의 정치적 독립성과 자율성 강화다. KBS 양대 노조와 기자·PD·기술인 등 16개 사내 직능단체는 이사회가 대통령에게 임명제청할 사장 후보를 뽑을 때 단순다수결이 아닌 특별다수결로 정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법률상 단순다수결은 이사회의 절반을 확보해야 하지만, 특별다수결은 재적이사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임명제청한다. 정족수를 과반수보다 강화하는 것이다. 특별다수제는 영국 BBC, 일본 NHK, 독일 ZDF 등 세계 유수 공영방송에서 도입해 시행 중인 방식이다.

서울대 이준웅 교수(49·언론정보학) 역시 “과반수 의결은 합의제를 존중하는 최소한의 장치”라며 “특별다수제는 최소 다양성 보장을 넘어서 합의제 정신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 7 야 4로 여당이 사실상 이사회 의결권을 좌지우지하게 되는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대안이 된다는 설명이다.

사추위 역시 외국의 공영방송에서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시행하고 있는 제도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기존 경영위원회를 대신해 각 지역을 대표하고 전문성 검증을 거친 12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감독위원회에서 사장을 선출하고, 독일 ZDF는 노동·지역·종교 등을 대표하는 77명으로 이뤄진 방송위원회에서 사장을 뽑는다. 일본 NHK의 경우 실제 경영을 하는 이사회가 아닌 별도의 경영위원회에서 사장을 뽑는데 위원회의 절반 이상이 탈정치적 배경의 인사들로 구성돼 있다.

제도의 도입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순 없다. 다수의 언론학자들은 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보단 현행 이사회 체제 내 부분적 변화를 도입할 것을 권한다. 특별다수제 및 사추위의 사안별 도입 등을 통해 이사회의 정파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시각이다. 영산대 이진로 교수(52·신문방송학)는 “당장 제도 자체를 고치기보단 일정수 이상의 찬성으로 의사를 가결할 수 있는 특별다수제를 사례별로 도입한다면 방송사의 자율적 운영을 어느 정도 보장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연세대 강상현 교수 역시 “사장 인선 시 특별다수제를 도입하면 야당 추천 이사의 동의를 구해야 하므로 함부로 인사를 못하게 된다”며 “방송의 독립성·보도의 공정성을 보호할 최소한의 장치로 사장 인선 등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만이라도 추천위원회 및 특별다수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간도 걸리고 절차상으로도 복잡한 제도 개선 이전에 언론을 정권의 방패막이로 삼으려는 정치문화가 개선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진로 교수는 “단순히 ‘독일처럼’ ‘영국처럼’ 제도를 뜯어고친다고 되풀이되는 언론과 정치의 유착 고리를 끊어낼 순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사회 내에서만큼은 여·야를 잊고 서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의지를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별도로 인사위원회를 구성한다 해도 지금처럼 정파적으로 접근한다면 그 역시도 편파 시비에 휘말리게 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배재대 장성호 교수(정치학)는 “제왕주의적 정치문화가 시민사회의 역동성과 충돌한 것”이라며 “권위주의·유교주의적 정치문화가 해결되기 전엔 갈등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권력구조의 개선이 필요한데 일단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다. 법적 개선을 통해 우리 사회가 거버넌스의 시대로 이행돼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대통령이 사장을 임명하는 구조인데 대통령의 권한이 지나치게 큰 것이 문제라는 지적으로, 궁극적으로 권력구조의 개선을 통한 거버넌스 시대로의 이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난 7월 2일 KBS 이사회는 사장 후보자를 6명으로 압축했다. 이 후보자들은 지난 6월 30일 마감된 KBS 신임 사장 후보자 공모에 지원한 30명 가운데 서류심사를 통과한 이들이다. 이사회는 7월 9일 진행될 면접을 통해 신임 사장을 선출한다. KBS 새 사장은 개정 전 방송법하에 선출될 마지막 사장이 될 것이다.

키워드

#포커스
김경민 자유기고가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