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새바위성지에서 아시아주교단 정찬을 마련한 최상순 신부(가운데 서있는 신부)가 참석한 주교단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황새바위성지에서 아시아주교단 정찬을 마련한 최상순 신부(가운데 서있는 신부)가 참석한 주교단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한 달 전쯤,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 개최 준비로 한창이던 천주교대전교구청(교구장 유흥식 주교)은 비상이 걸렸다. 8월 15일 오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참석한 가운데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성모승천대축일 미사’를 지내고 교황은 대전가톨릭대학으로 이동해 오후 1시부터 아시아 각국 청년대표들과 오찬을 하기로 돼 있었다. 문제는 아시아 주교단 일행 100여명의 오찬이었다. 아시아주교단(FABC) 의장인 그라시아스 오스왈드 안토니 아그넬로 추기경을 비롯해 주교단 50여명과 수행단은 교황과 따로 점심식사를 한 후 솔뫼성지에서 다시 합류하는 일정이었다. 유흥식 주교는 대전 교구 내에 있는 본당들에 주교단 식사를 부탁했지만 본당들은 모두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누군가 불쑥 나섰다.

“그럼 내가 하죠, 뭐.”

한국 천주교회의 심장이라 불리는 충남 공주 황새바위성지의 전담 신부인 최상순(42) 비오 신부였다. “NO”를 모르는 낙천적 성격의 최 신부가 덜컥 주교단 일행의 식사를 맡고 나선 것이다. 황새바위성지는 조리시설은커녕 식사를 준비할 수 있는 여건이 전혀 안 갖춰진 곳이다. 아무 대책 없이 일을 맡아 놓고도 최 신부는 천하태평이었다.

337명이 순교한 충남 공주 황새바위성지.
337명이 순교한 충남 공주 황새바위성지.

최 신부는 며칠 후 황새바위성지에 추진 중인 경당(chapel) 건립 문제로 경기도 이천에 있는 조상권도자문화재단에 갈 일이 있었다. 황새바위성지는 공주 감형의 처형 장소로 충청도에 천주교를 전파한 이존창 사도 등 337명이 순교한 곳이다. 천주교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이다.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178호로 지정되면서 정비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최 신부는 정비사업 중 하나인 경당 건립에 또 하나 ‘큰일’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경당 내부를 성경 내용을 형상화한 도자 벽화로 장식한다는 것. 경당에 들어가는 도자 벽화는 20×20㎝ 크기의 정사각형 도자 그림 6000장이 들어간다. ‘큰일’의 공모자로 도자 그림을 맡은 곳이 조상권도자문화재단과 조부수(71) 화백이다. 1년 전부터 작업을 시작해 조부수 화백의 그림으로 현재 2000장을 완성해 놓은 상태이다.

최 신부는 조상권 이사장, 김현 도자문화재단 이사, 조부수 화백 부부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 주교단 식사를 맡게 됐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김현 이사가 “조리시설도 없는 곳에서 도대체 어떻게 하실 작정이냐”고 물었다. 최 신부는 태평하게 대답했다.

“공주에서 뷔페 부르죠, 뭐.”

아시아주교단을 위해 준비한 한식 정찬 테이블.
아시아주교단을 위해 준비한 한식 정찬 테이블.

왼쪽부터 서리태 콩으로 만든 콩주스, 수삼·셀러리·래디시 샐러드,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인 채끝등심구이, 삼색전, 녹두닭죽 등 7개 코스로 구성됐다.
왼쪽부터 서리태 콩으로 만든 콩주스, 수삼·셀러리·래디시 샐러드,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인 채끝등심구이, 삼색전, 녹두닭죽 등 7개 코스로 구성됐다.

황당해 하는 조 이사장과 김현 이사의 눈이 부딪쳤다. 연로한 주교들이 접시 들고 줄지어 서서 국적불명의 음식을 들고 어수선하게 식사할 광경을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김현 이사는 순간 발목을 붙잡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난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신부님 알아서 하세요.”

김 이사는 말을 끊기 위해 자리를 피했다. 그런데 차를 준비해서 돌아오니 이미 이야기는 끝나 있었다. 황새바위성지의 주교단 점심은 조상권도자문화재단의 몫이 돼 있었다. 소탈한 교황에 맞추다 보니 주교단도 정찬 일정이 없었다. 자진해서 일을 떠맡은 조 이사장은 “한국의 음식문화를 알릴 수 있는 기회인데 아시아 각국에서 온 주교단에 제대로 된 한식 한 끼는 대접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황재바위성지 한편에 만들어진 임시 주방.
황재바위성지 한편에 만들어진 임시 주방.

조상권(78) 이사장은 고(故) 조소수 광주요 초대 이사장의 장남이다. 광주요그룹 조태권 회장이 동생이다. 1960년 프랑스로 건너가 국립 보자르 건축학교를 다녔다. 1967년 유럽 유학생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북한으로 도피한 이후 30년 동안 해외를 떠돌다 1997년 한국으로 귀순했다. 도예가로 활동하면서 조상권도자문화재단(옛 광주요도자문화재단)을 맡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귀국 선물 목록에 조 이사장의 작품도 들어있다. 이번 교황 방한에 결정적 역할을 한 유흥식 주교의 요청으로 만든 작품은 백자로 만든 합 속에 청자로 만든 책이 들어있다. 청자 책에는 교황에게 바치는 유 주교의 기도문이 새겨져 있다. 청자 책을 넣은 백자합은 교황의 책상에 놓여질 예정이라고 한다. 유 주교는 조 이사장에게 작품을 의뢰하면서 “교황이 워낙 소탈해 너무 화려하게 만들면 교황청 박물관으로 들어가니 안 들어갈 만큼 소박하면서 충분히 품위 있게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느닷없이 주교단 식사를 맡게 된 조상권도자문화재단은 비상이 걸렸다. 조 이사장의 여동생인 조광자·조정희(광주요 분당점 사장)씨가 동원됐다. 조소수 광주요 초대 이사장의 자녀인 3남3녀는 모두 손님접대에는 베테랑들이다. 1970년대 ‘광주요의 디너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은 상류층이 아니다’라는 말이 돌 정도로 광주요의 손님접대는 유명했다. 조 이사장을 비롯한 3남3녀도 어려서부터 식문화와 관련해서 엄격한 훈련을 받았다. 손님을 초대한 날엔 모두 집안 청소에 동원됐다. 하나부터 열까지 대충은 없었다. 일례로 현관 앞 돌계단은 ‘방금 청소를 한 듯 살짝 물기가 있는 정도’를 유지해야 했다고 한다.

김현 이사와 손님접대의 달인들인 조씨 집안 자매들이 머리를 맞대고 식기부터 메뉴까지 준비를 시작했다. 주교단의 연령대가 높고 인도, 필리핀, 네팔, 브루나이 등 국적도 다양하다 보니 메뉴 구성은 소화 잘되고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기품 있는 한식이어야 했다. 식기도 100명분을 준비하려면 디저트접시, 커피잔까지 총 1000여개는 필요했다. 도자 식기를 새로 만들고 굽느라 도자문화재단 직원들 모두 비상근무를 했다. 그릇 바닥에는 ‘교황님 방문을 환영합니다 Benvenuto! Papa Francesco’라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아시아주교단 식사를 준비한 조상권도자문화재단의 조상권 이사장(사진 위)과 그가 프란치스코 교황 선물로 제작한 작품. 백자합 속 청자로 만든 책에 교황 방한을 성사시킨 유흥식 주교의 기도문이 새겨 있다.
아시아주교단 식사를 준비한 조상권도자문화재단의 조상권 이사장(사진 위)과 그가 프란치스코 교황 선물로 제작한 작품. 백자합 속 청자로 만든 책에 교황 방한을 성사시킨 유흥식 주교의 기도문이 새겨 있다.

요리모임인 ‘아우회’를 비롯해 서빙팀까지 자원봉사자들로 팀이 꾸려졌다. 가스버너 하나 없는 곳에서 어떻게 100명분 요리를 하나? 그렇다고 미리 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대로 된 음식을 대접하려면 현장에서 바로 요리를 해서 내놓아야 했다. 행사 하루 전 며칠 밤을 새며 구워낸 1000여개의 식기를 트럭에 싣고 내려가 공주 한옥마을에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현장에는 천막을 쳐서 수도를 끌어오고 휴대용 가스버너를 동원해 임시 조리실을 설치했다. 숙소에서는 요리팀들이 밤을 새 재료를 준비했다. 다행히 날씨가 도왔다. 우려와는 달리 비도 피해갔다. 마치 시골장터에서 음식축제가 열린듯했다. 고요한 성지가 때아닌 음식 냄새와 사람들의 활기로 넘쳐났다.

이날 정찬의 메뉴는 ‘콩주스’ ‘수삼과 셀러리, 래디시를 잘게 채썬 샐러드’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인 채끝등심구이’ ‘삼색전’ ‘녹두닭죽’ ‘과일’ ‘커피·빵’. 7가지 코스메뉴가 순서대로 도자 그릇에 담겨 차려졌다. 식탁 테이블에는 교황 방한을 축하하기 위해 ‘장미의 나라’ 에콰도르에서 선물한 장미꽃 6000송이 중 100송이가 장식됐다. 와인은 디아지오코리아에서 기부했다. 행사를 처음부터 준비한 김현 이사는 “처음엔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겁이 났는데 신기할 정도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손님을 배려하는 마음이 한식 세계화의 기본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고 말했다.

이날 황새바위성지의 특별한 정찬은 대성공이었다. 식사를 마친 주교단은 “수많은 나라를 다니고 특급호텔을 다녀봤지만 이렇게 품격 있는 서비스를 받아본 것은 처음이다”라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특히 실처럼 찢어놓은 닭고기와 녹두가 들어간 닭죽에는 감탄사를 쏟아냈다. 지난 8월 19일 오후 광화문 한 카페에서 만난 김 이사는 “환경도 열악하고 몸은 힘들었지만 행사를 준비한 사람들 모두 너무 행복해 했다”고 말했다. 김 이사에게 식기 제작비며 행사에 들어간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누가 부담하느냐고 물었다. 김 이사는 “비용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면서 덧붙였다. “어떻게 되겠죠, 뭐.”

황은순 차장 / 강진주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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