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5월 7일 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서 열린 ‘한·미동맹 60주년 기념만찬’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photo 청와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5월 7일 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서 열린 ‘한·미동맹 60주년 기념만찬’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photo 청와대

한 달 전 유럽 여행을 마치고 워싱턴에 돌아올 때 공항에서 한국 초등학교 어린이 100여명을 만났다. 서울발 대한항공 비행기에서 막 내렸다. 여름 영어캠프에 참가하기 위해 왔다고 한다. 뒤에 서야 할 어린이들이 앞으로 몰려와 박차고 들어왔다. 어린이니까 입국심사를 빨리 해달라는 요구를 했다. 세계 각국 방문객들이 찾는 워싱턴 입국심사대는 동대문시장처럼 복잡하다. 한국 어린이들로 인해 외국인의 입국심사가 지체된 것은 물론이다. 말은 안 했지만, 기다리던 사람 모두가 불평을 했다. 어린이라고 하지만 갓난아기가 아닌 초등학교 5학년이고, 어린이를 내세우며 중간에 끼어드는 수십 명의 한국인 가족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있는 가족을 입국심사에서 우선한다는 관행을 악용한 ‘지능형 새치기’이다. OECD 가운데서도 중간 정도 수준인 한국이지만, 사고능력은 한 세대 이전과 다르지 않다. ‘발 빠른(?)’ 행동 덕분에 20분 정도의 시간을 번 어린이들은 이후 어른이 되어서도 그 ‘짜릿한 쾌감’을 잊지 못할 것이다. 빨리 앞서고 보자는 식의 개발독재형 사고는 21세기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어른만이 아니라 어린이도 동참하고, 무대를 워싱턴으로 넓힌, 한층 더 진화된 수법이다.

‘아! 대한민국’은 30여년 전 필자의 대학 재학 당시 매일 들었던 노래이다. 가수 정수라가 발표한 일종의 국민건전가요이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어.” 한 세대가 지난 2014년, 정수라의 생각은 현실로 나타난 듯하다. 세계 10위권을 오르내리는 무역대국, 전 세계 최강의 IT대국, 글로벌 브랜드로 등장한 한류붐, 한국어를 배우려는 세계인들….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무엇이건 될 수 있다’는 여가수의 생각은 1960년대 이후부터 나타난 대한민국의 눈부신 성적표를 통해 증명될 수 있다. 열심히 모두 힘을 합쳐 세계 속의 한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 심각하게 생략된 것이 있다. 대한민국이 궁극적 목표로 하는 ‘빅 픽처(big picture)’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빅 픽처의 예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를 통해 상상할 수 있다.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고, 우리의 부력은 배불리 먹을 만하면 족하다. 다만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높은 문화의 힘이다.” 김구 선생이 말한 한국의 빅 픽처는 문화대국이다. 광복 후 한국인은 1등 한국을 향해 각 분야에서 열심히 뛰었다. 그러나 1등 한국이 가져다 줄 대한민국의 큰 그림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궁색해진다.

“화장실이 다섯 개나 된다”고 자랑하는 탤런트의 머릿속은 넓은 집, 큰 집에 대한 경쟁의식으로 채워져 있다. 효율적으로 잘 활용할 경우 화장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1등 한국의 논리에 익숙한 사람은 큰 집과 큰 차, 큰 냉장고에 눈이 간다. 크고 많은 것은 비싼 것이고, 남들의 우위에 서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수심 1500m에서도 정확하게 움직이는 시계, 시속 300㎞의 스포츠카에 대한 집착과 똑같은 논리이다. 바닷속 1500m까지 내려가는 사람이 70억 세계인구 가운데 과연 몇 명이 있을지, 시속 300㎞ 속도를 보장해 줄 도로를 가진 곳이 세계 어디에 있을지에 대한 생각은 애초부터 없다.

빅 픽처의 부재는 21세기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모순의 원인 중 하나에 해당한다. 나무를 열심히 심고 과일도 많이 수확했지만 심신이 피곤하다. 누구보다도 빨리 정상에 올랐지만 결과는 전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 온수도 나오고, 자동차도 있고, 여름휴가도 갈 수 있게 됐지만, 옆집에 비하면 뭔가 뒤지는 느낌이 든다. 100억달러 수출, 1000달러 소득은 한 세대 전에 끝냈고 1만달러 소득, 1000억달러 수출도 어제의 일이다. 3만달러 소득, 수출 1조원 시대란 말이 나오지만 감동이 예전만 못하다. 한국이 지향하는 근본적이고도 궁극적인 목표로서의 큰 그림이 없기 때문이다. 목표를 잃어버린 방황하는 모습이 바로 2014년 한국인의 자화상일지 모르겠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화장실 다섯 개와 소득 3만달러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대한민국이 목표로 하는 빅 픽처가 아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인간, 품격 있는 사회, 아름다운 문화를 위한 부속품으로서의 화장실과 돈이다. 늦었지만, 최근 목적이자 목표로서의 빅 픽처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달아오르고 있다. 최근 한국 신문·방송에 고정 뉴스로 등장한 ‘국가개조’란 말은 그 단초(端初)이다.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눈물을 흘린 끝에 탄생한 말이다. 세월호와 관련된 한국인의 새로운 다짐이 국가개조란 키워드로 집약된다. 그러나 외람된 얘기지만, 국가개조란 말은 시대에 맞지 않는 20세기 논리처럼 느껴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개조의 대상을 ‘국가’로 잡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개조의 내용을 보면 정부의 효율화 투명성 책임 같은 것이 또 열거된다. 정부를 시작으로, 사회 각 분야에서의 개조도 동시에 병행된다. ‘일신 또 일신(一新又一新)’하는 정부를 원치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바람은 시대와 상황을 고려해 진행해야 한다. 간단히 말하자. 지금 한국이 필요로 하는 미래의 빅 픽처는 국가라는 범주를 벗어나 있다. 국가를 받쳐주는 국민도 21세기 대한민국 빅 픽처의 영역 밖이다.

국가·국민이라는 개념은 뭔가 하나로 결속된 집단으로서의 성격을 전제로 한다. 부자(父子)간, 가족 간의 변화도 어려운 것이 현재의 한국이다. 대학생이 지도교수를 고소하고, 공직자로 나선 아버지를 자식이 인터넷으로 고발하는 판국이다. 이유야 있겠지만, 법 이전의 차원에서 해결될 수 없는 ‘날이 선’ 상황이 현재의 한국이다. 상식적이지만, 법은 도덕과 인륜이 듣지 않을 때 등장하는 최후의 보루이다. 법이 사람들 사이에 끼어든다는 말은 서로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한다는 의미이다. 신문·방송에 거의 매일 등장하는 막장 스토리는 바로 법 이전의 해결수단인 도덕과 인륜이 사라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윤활유로서의 도덕·인륜이 사라지면서 엔진을 통째로 바꾸는 일들이 일상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국민을 앞세운 개조가 과연 가능할까. 제도적·표면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들 것이다.

대한민국이 필요로 하는 변화의 주역은 국가·국민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와 국민의 21세기판 개념인 ‘공동체’와 ‘시민’이 대한민국의 빅 픽처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다. 서방 선진국에서 보듯 내셔널리즘과 피를 기초로 한 19세기식 국가·국민 개념은 이미 한물간 구시대적 사고에 불과하다. 유럽 선진국의 경우 외국인 이민자 수가 총인구의 20%를 넘어서고 있다. 미국은 멕시코 불법이민자를 자국민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이다. 국가·국민·국경을 넘어서, 공동체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지혜와 의지가 21세기의 보편타당한 상식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공동체와 시민은 수동적 개체가 아니라 능동적이자 쌍방향인 ‘의식’을 기반으로 한다.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존재로 서로 일맥상통한다. 공동체·시민의식은 대한민국의 빅 픽처를 창조해 내는 기본요소이자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21세기 들어서도 한국은 공동체·시민의식과 무관한, 국가의식·국민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서울 강남과 강북 사이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벽도 뚫지 못한 상태에서 20세기 논리인 국가·국민 이데올로기에 집착한다.

대한민국이 그리는 미래의 빅 픽처는 책임지고 성숙된 개개인의 의식을 필요로 한다. 국가·국민을 아무리 앞세워도 더 이상 ‘약발’이 안 듣는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현대경제연구원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4명 중 1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함께 나아가자”고 할 때 4명 중 3명은 이미 포기한 상태이다. 대통령, 청와대가 직접 나서도 해결할 수 없는 곳이 한국이다. 현장을 지키는 시민만이 문제를 풀 수 있다.

공동체·시민의식과 관련된 한국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너무도 초라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한강의 신화로 표현되는 압축성장의 결과, 의식이 현재를 못 따라가는 형세이다. 1인당 GDP 2만5000달러 선에 달하는 준(準)선진국이지만, 나라의 의식수준은 개발도상국을 약간 넘어서 듯 느껴진다. 2012년 기준으로 34개의 OECD 국가가 있다. 이 가운데 한국의 소득수준은 23위이다. 한때 세계를 호령한 포르투갈·체코·폴란드·헝가리 같은 동유럽 국가는 한국의 아래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그 같은 소득 격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공동체·시민의식은 동유럽 국가에 한참 뒤져있다.

공동체·시민의식은 스스로를 규제하는 내면의 기준과 가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상대의 입장에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객관적 시각을 근간으로 한다. 내가, 우리가 옳다고 강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볼 때 바르게 행동하는지 자문(自問)하는 것이 공동체·시민의식의 출발이다. 거리에 휴지를 버리는 것이 나쁜 것은 다른 사람이 휴지를 버리는 것이 나쁘다고 믿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한국은 그 같은 객관적 시각을 내팽개치고 있다. 국내에서나 통하는 논리가 대세로 잡아가고 있다. ‘갇힌 세계관’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우물 안 개구리 식 사고이다. 한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는 세계관이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사고를 지배했던 소중화(小中華)로서의 주자학적 세계관이 한국 사회 전체에 넘실거린다. 상승세에 들어선, 한국에 대한 과장된 해석은 갇힌 세계관에 기여하는 일등공신일 듯하다.

한국산 모바일 기기나 전자제품, 나아가 한류에 관한 자랑스러운 기사는 한국 신문의 고정뉴스가 돼버렸다. 전 세계가 한국 IT 제품에 환호하고 한국 드라마와 노래에 열광하는 식으로 그려진다. 한국 관련 상품과 소프트파워가 세계적 선풍을 일으키고 인기를 끄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만이 전부는 아니다. 일본도 있고 중국, 남미 심지어 에티오피아 같은 나라도 세계인의 관심사 중 하나이다. 자화자찬에 빠지면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벌거숭이 임금님으로 전락해 가고 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할 당시 미국과의 국력 차이는 무려 720여배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습공격에 나선 것은 ‘천상천하 유아독존’ 식의 우물 안 세계관에서 비롯됐다. 출발점은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이다. 발틱함대를 궤멸시키면서 ‘일본=백전백승’이란 신화에 도취된다. 유럽의 열강을 무너뜨리면서 스스로에 도취된다.

도쿄 제국대학에서 가르치던, 독일·네덜란드·영국 학자들은 전부 일본인으로 대치된다. 유럽인보다 일본인들이 더 빠르고 정확하게 일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불과 50여년 만에 서방 선진국을 눈 아래로 내려다본다. 엄청난 속도로 국력을 키웠다고 볼 수 있지만, 객관적 검증이 없는 브레이크 부재(不在)의 자동차에 불과했다. 결국 720배 큰 거인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 돌입한다. 무적함대 발틱군단을 눌렀듯이 정신력 하나만으로도 미국을 꺾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현재의 한국의 상태는 20세기 초 일본에 비견될 수 있다. 한국이 롤모델로 여겼던 일본 대기업들이 한국 IT 기업에 무릎을 꿇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을 경시하는 것은 물론 아예 일본을 없다고 믿는 한국인이 급증하고 있다. 9회 초 8 대 0으로 이기고 있는 팀이 도루에 나선다. 2사(死)이지만, 안타로 1루에 나간 뒤 도루로 2루에 진출한다. 8월 초부터 시작된 일본 고시엔(甲子園) 고교 야구의 얘기이다. 8 대 0으로 그냥 끝내도 될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한 점이라도 더 보태겠다는 것이 일본 고교생의 자세이다. 과연 한국이 이런 나라를 눌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화자찬에 비례해서 세계에 대한 무관심과 무시가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은 대표적 예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비난하는 데 열중했지, 국가적 전략이 전무하다. ‘진정성(眞正性)’이란 요상한 단어는 일본을 얘기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단골메뉴이다. ‘진정성에 기초한 뼈저린 반성’이란 식이다. 진정성이 어디까지를 범주로 하는 말인지 궁금하다. 지극히 주관적인 개념의 단어가 외교 현안의 키워드로 자리 잡고 있다. 진정성을 얘기하는 동안 미국은 일본의 등을 앞으로 떠밀고 있다. 최근 미국 국무부 관료가 한국을 방문해 집단적 자위권을 찬성해 줄 것을 공식요청하자 그제서야 난리가 났다. 중국과 함께 일본을 공격하는 공동전선을 구축했지만 어느 틈엔가 중·일 양국의 밀사가 오가고 있다. 한반도 머리 위에서 벌어지는 대국 간의 딜(Deal)에는 눈과 귀를 막고 코 앞의 현상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가쓰라태프트밀약은 비극적 한국 근대사의 출발점에 해당한다. 미·일 간의 빅 딜에 의해 나라 전체가 넘어갔다. 다시는 그 같은 실수와 실패를 재발하지 않겠다고 한국인 대부분은 다짐한다. 그러나 ‘21세기판 가쓰라태프트’는 이미 시작됐다. 일본을 상수로 적극 밀고, 한국을 종속변수로 여기는 미국의 대외정책이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현재와 같은 한국 외교가 지속될 경우 한국에 대한 미국의 기대와 희망은 한층 더 약화될 것이다. 반대로 일본은 시간이 갈수록 미국과 가까워질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점령한 태평양의 섬 하나를 탈환하기 위해 수천 명의 전사자를 낸 나라가 미국이다. 중국이 커가면서 어제의 적 가미카제(神風)를 친구로, 그것도 가장 믿음직한 파트너로 받아들이는 나라가 미국이다. 곧 나타나겠지만, 일본이 해병대를 창설하는 순간 21세기판 가쓰라태프트의 내용과 힘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것에 무심하고 아예 눈을 가린 한국은 뜬금없이 중국에 한반도의 미래를 달고 있을 뿐이다.

1인당 GDP 5만달러, 아니 10만달러를 달성한다고 해서 성숙한 대한민국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개개인이 스스로 깨우치면서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업그레이드된 시민과 대한민국이 탄생할 수 있다. 한국에서나 통하는 ‘통일대박’이나 ‘올라운드형 배수진’이 아니다. 사고가 났다고 중앙부처 기관을 한순간에 해체하고, 군기문란이 있다고 부대 자체를 없애는 식의 리셋형 전부전무(All or Nothing)는 더더욱 아니다.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면서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가면서 재미를 붙이는 식의 업그레이드형 세계관이 한국의 빅 픽처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이 갈 길은 멀고도 멀다. 남에게 자랑하고 가르치기보다 아직은 배워야 할 수준에 머문 나라가 한국이다. 사실 배우고 익히는 것은 부끄럽지도 비굴하지도 않다. 문화대국이나 미식대국, 아니면 품격을 갖춘 우아한 나라 가운데, 과연 어떤 것이 한국의 미래가 될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자만하지 말고 시야를 세계에 맞춰 이성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자세만이 대한민국의 빅 픽처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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