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나가노현의 다이호지(大寶寺)에 안치된 마리아 지장보살(マリヤ地藏). 아이를 많이 낳게 해준다고 소문난 이 지장보살은 실제로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형상으로, 예수는 손에 십자가와 비슷한 것을 들고 있다. 기독교도의 신앙 대상임을 확인한 사람들이 지장보살의 목을 잘라버렸다. ⓒphoto 다케나카 히데타카
일본 나가노현의 다이호지(大寶寺)에 안치된 마리아 지장보살(マリヤ地藏). 아이를 많이 낳게 해준다고 소문난 이 지장보살은 실제로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형상으로, 예수는 손에 십자가와 비슷한 것을 들고 있다. 기독교도의 신앙 대상임을 확인한 사람들이 지장보살의 목을 잘라버렸다. ⓒphoto 다케나카 히데타카

16세기에 유라시아 동부에 도달한 기독교는, 한편으로는 유럽 열강이 이 지역을 침략하기 위한 선봉대로 간주되고 또 한편으로는 이 지역의 종교적 균형과 계급질서를 위협하는 외래 사상으로서 탄압받았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 가이오(Caius)가 일본의 저명한 가톨릭 영주인 주스토 다카야마 우콘(Justo 高山右近)과 진정한 우정을 나누고, 빈궁했던 일본인 기독교도 야고보와 함께 순교한 것은, 유라시아 동부의 주민들이 기독교에서 국가와 계급을 초월하는 평등사상을 발견하였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기독교가 단순한 신앙이 아니라 유라시아 동부의 기존 질서를 흔들 수 있는 민감한 정치·군사적 위협임을 간파한 각국의 지배계급은 철저하게 기독교도들을 탄압하였다. 그 결과 한때 금방이라도 기독교 국가가 될 것처럼 보였던 일본에서는 기독교도가 표면상 완전히 사라졌고, 조선 역시 일본과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며 기독교가 처음부터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18세기 말이 되자 이러한 철통 방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중국어로 집필된 기독교 서적들이 청나라에서 흘러들어오자 이승훈 베드로 등 남인(南人) 계열의 학자들이 이들 책을 통해 기독교를 학문으로서 연구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기독교도가 자생적으로 발생했다. 전 세계 역사에서 선교사가 파견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기독교도가 탄생한 것은 한반도가 유일하다.

흔히 한민족을 ‘책의 민족’ ‘기록의 민족’이라고 하지만, 한반도보다 더 많은 수의 옛 문헌이 더욱 소중히 보존되어 온 지역은 전 세계에 결코 적지 않다. 당장 현대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한반도 내에 보존된 자료가 너무 적기 때문에 미국·일본· 러시아 등 주변 국가에 보존된 문헌을 중요하게 참고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이 ‘책의 민족’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책에만 의지해서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세계 역사상 초유의 사건을 벌인 한반도 주민의, 책에 대한 절대적 신뢰로 인해서일 것이다. 한반도 기독교의 이러한 특성에 대해서는 조선의 기독교도들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선의 기독교도들이 선교사를 파견해 줄 것을 로마의 교황에게 요청하고자 보낸 편지에서는 그러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성교(聖敎)는 온 세계에 설교되었사오며, 오직 저희 동방 나라에만 선교사에 의하지 않고 다만 책으로 전하여졌나이다. 그러하온데도 선교사가 오기 전후에 여러 백 명의 순교자가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사오며, 지금 있는 신입 교우의 수효도 1만명이 넘나이다.”(클로드 샤를 달레·‘한국천주교회사 2’ 31쪽)

1790년대가 되자 조선의 기독교도들에게 최초의 시련이 찾아왔다. 조상의 위패를 만들고 제사를 지내는 유교적 전통이 가톨릭의 종교관과 어긋난다는 명령이 베이징의 가톨릭 교구에서 전해진 것이다. 이로 인해 기독교도들 가운데 다수가 새로운 신앙에 회의를 느끼고 배교하던 중,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등이 어머니의 신주를 불태우고 기독교식으로 제사를 올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1791년에 이 두 사람은 현재의 전주 전동성당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이를 신해박해 또는 진산사건이라 부른다. 이 사건에 대해 한국 학계의 일각에서는 신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유교와 십자가를 숭앙하는 기독교 간의 신앙상의 충돌이라는 해석이 제기되어 있다. 그러나 18세기 말 조선의 기독교는 단순히 유교를 신앙으로서가 아닌, 조선이라는 국가의 기존 질서를 전복시키는 혁명사상으로서 기능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황일광의 사례이다.

1801년에 순교했고 지난 8월 16일에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황일광에 대해 1874년에 ‘한국천주교회사’를 집필한 클로드 샤를 달레(Claude Charles Dallet)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내포 지방의 홍주에서 난 황일광 알렉시스는 백정의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이 계급이 조선에서는 어떻게나 멸시를 당하는지, 거기 속하는 사람들은 종들보다도 더 낮게 다뤄지는 지경이다. 그들은 인류 밖에 있는 품위를 잃은 존재로 다뤄진다.…중략…교우들은 그의 신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를 나무라기는 고사하고 애덕(愛德)으로 형제 대우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디를 가나 양반 집에서까지도 그는 다른 교우들과 똑같이 집안에 받아들여졌는데, 그로 말미암아 그는 농담조로 자기에게는 자기 신분으로 보아, 사람들이 그를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기 때문에, 이 세상에 하나 또 후세에 하나, 이렇게 천당 두 개가 있다고 말하였다.”(달레·‘한국천주교회사 1’ 473~474쪽) 한반도 역사상 지배계급과 백정이 신분을 뛰어넘는 진정한 인간관계를 형성한 것은 아마도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해진 이후 이때가 처음이 아닐까? 그리하여 달레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그 비천한 출생과 그렇게도 감격적인 대조를 이루던 황일광 알렉시스의 희한한 덕행은 교우들 중에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하였고, 교우들은 지금까지도 그를 가장 훌륭한 증거자들 중의 하나로 경의와 감탄을 가지고 입에 올린다. 그러나 이 나라의 외교인(外敎人)들 특히 양반들은 이러한 신분의 사람이 천주교의 영광이라는 말을 듣고는 경멸하는 태도로 웃는다.”(같은 책 475쪽)

황일광보다 2년 앞서 1799년에 순교한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또 어떤가. 박취득은 문초받던 중 이렇게 말했다. “사또께서 오늘 당장 저를 죽이려고 하고, 또 우리 교를 헛된 미신으로 모시니, 저는 잠자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잘 알아 주십시오. 세상이 마칠 때 모든 나라가 없어진 다음에는 양반과 서민, 임금과 백성의 구별이 없이 모든 연령층의 모든 사람이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천주 성자 앞에 모일 것”(같은 책 413쪽)이라고. 또 1839년에 전주에서 순교한 신태보 베드로는 “너는 양반이냐”라고 묻는 심문관의 질문에 “한번 여기(기독교) 들어오면 양반과 상민의 차이란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답했다.(달레·‘한국천주교회사 2’ 127쪽) 이러한 평등정신은 피지배층만의 것이 아니었다. 양반 계급에 속한 이경언 바오로는 “너는 양반집 자식이니 저 무식한 백성하고는 다르지 않으냐. 거기다가 너같이 잘생긴 사람이 어찌 그 고약한 교를 믿겠다고 고집을 부릴 수가 있단 말이냐”라며 회유하는 심문자의 말에 “의리에 있어서는 상하의 구별도, 반상(班常·양반과 상민)도, 잘나고 못난 얼굴의 구별도 없고 다만 영혼만이 구별될 수 있다”고 답했다.(같은 책 147~148쪽) 이처럼 18~19세기 조선의 기독교도들은 지금도 ‘양반’ ‘명문가’를 늘상 입에 올리는 현대한국의 시민들보다도 더욱 더 인간의 평등함을 믿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평등주의가 조선의 지배계급에는 체제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정치적 사태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기독교 성지로 잘 알려진 해미읍성 바깥에서는 선 채로 파묻혀 죽은 사람들의 유골이 다수 발견된 바 있다. 심문관들은 양반 계급이 아닌 이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고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이름이 알려진 양반 계급 출신 기독교도 이외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채 죽은 자들은 중하층 출신 순교자가 훨씬 더 많다.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대가집 양반이나 고관들의 자손이나 혹은 현재 관직에 있는 분들 중에도 천주교에 대하여 호감을 가진 사람을 얼마간 만날 수 있나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승진하고자 하는 욕심이나, 남의 조소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선뜻 발을 내딛지 못하나이다. 부자들은 황금에 대한 목마름으로 양심의 소리가 눌리어 버리나이다. 천주교 쪽으로 돌아서서 정의를 찾는 사람들은 가난과 곤궁에 찍어 눌리고, 아무 재원이 없는 사람들 중에 있나이다.”(달레·‘한국천주교회사 2’ 24쪽) 이들이 단순히 제사에 대한 인식 차이로 죽었으리라 간주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한국 사회 일각에서 18~19세기 조선의 기독교 탄압을 ‘신주 vs 십자가’로 상징되는 문명 간 충돌로 해석하는 견해는 일견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당시 기독교가 서구 국가들의 제국주의 첨병으로 기능하고 있었고, 17세기 일본의 산 펠리페 사건이나 1801년의 황사영 백서 사건처럼 이러한 징후가 유라시아 동부에도 있었기에 양국 정부는 이들을 정치범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후 제시된 민족자결주의가 패전국만을 대상으로 하는 정치적 계산의 결과로 나온 편파적 사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주민들은 이 사상의 보편성을 믿고 봉기했다. 마찬가지로 서구 국가들의 현실과는 무관하게 18~19세기의 전환기에 기독교는 한반도에서 계급 타파와 개인의 발견이라는 새로운 사상으로서 기능했다. 한반도 주민은 기독교라는 신앙 체계를 자신들의 맥락에서 소화하여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유토피아를 구현하고자 했다. 그들이 꿈꾼 이상세계에서는 양반과 상놈이 평등하고, 국가나 집안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개개인이 자신의 신념을 자유롭게 따를 수 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보여준 것은 봉건제도에 대한 부정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18~19세기 한반도의 기독교 탄압을 ‘신주 vs 십자가’라는 식의 문명 충돌로 단순화시킬 수는 없다. 이러한 이해는 어떤 부족의 식인 습관이나 여성에 대한 명예살인도 문화 다양성이므로 침해하면 안 된다는 식의 극단적 문화상대주의일 뿐이다.

동시에 17~19세기 유라시아 동해안의 기독교 순교자들이 보여준 정신세계는 이른바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위를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 뿐더러 가톨릭만의 전유물은 더더욱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17~19세기 유라시아 동해안의 기독교도들은, 서구 국가들에서 국교로서 기독교도들이 자행한 마녀사냥이나 비서구권 지역의 주민들에 대한 학살과는 무관하게, 새로운 세계를 유라시아 동해안 일대에 구현하기 위해 기독교라는 외래 신앙을 이용한 것이다. 현세에서는 물론 내세의 구원에서도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세상 속으로 뛰어든 원효대사가 상징하듯이, 고대에 유라시아 동부 일대에서 불교라는 평등주의적 종교가 수행한 역할과 비교할 수 있다. 18~19세기의 전환기에 기독교는 한반도 주민들에게 기존 체제를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인간형’(정병설·‘죽음을 넘어서’ 서문)을 제시해주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로 미사가 집전된 성지입니다’라는 팻말이 서있는 진해 웅천왜성 정상. ⓒphoto 김시덕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로 미사가 집전된 성지입니다’라는 팻말이 서있는 진해 웅천왜성 정상. ⓒphoto 김시덕

이처럼 지배 체제에 노골적으로 저항하는 기독교에 대해, 현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조선 정부는 당연히 혹심한 탄압을 가했다. 그런 탄압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 1801년에 황사영 알렉시오가 중국 천주교회에 보내려다 압수된 편지였다. ‘황사영 백서(帛書)’라 불리는 이 편지에서 황사영은 조선 천주교의 초기 역사를 상세히 서술한 뒤, 청나라 황제로 하여금 선교사와 함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기독교도들을 구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전선 수백 척과 정병 5만~6만을 얻어 대포 등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싣고 겸하여 글 잘하고 사리에 밝은 중국 선비 서너 명을 데리고 바로 이 나라 해변에 이르러 국왕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우리는 서양의 전교하는 배요, 자녀나 재물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교황의 명령을 받아 이 지역의 생령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귀국에서 한 사람의 선교사를 용납하여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 이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한 방의 탄환이나 한 대의 화살도 쏘지 않고, 티끌 하나 풀 한 포기도 건드리지 않을 것이며 영원한 우호 조약만 맺고는 북 치고 춤추며 돌아갈 것이오. 그러나 만약 천주님의 사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마땅히 주님이 주시는 벌을 받들어 행하고 죽어도 발길을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한국교회사 연구자료 1’ 황사영 백서, 70~71쪽)

이처럼 황사영은 청나라 황제로 하여금 어디까지나 조선 정부가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군대를 보낸 것처럼 하라고 제언한다. 그러나 청나라 황제가 순수하게 기독교 보호를 위해서는 움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여 동시에 다음과 같이 위험한 제안을 한다. 즉 최근 청나라 내에서 난리가 많이 일어나고 있으니 결국은 원래의 발상지인 만주로 돌아올 수도 있는데, 만주 땅이 좁을 터이니 조선을 병합해서 배후를 확보하라는 것이다. “근년에 중국은 서쪽 지방에 도둑이 자꾸 일어나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관군이 여러 번 패하고 국토가 날로 줄어든다고 하니 중국 황제는 틀림없이 근심하고 고민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중략…조선은 영고탑에서 다만 강물 하나를 격해 있을 뿐으로 인가가 서로 바라보이고 부르면 서로 들리는데 그 땅이 사방 3000여리입니다. 동남쪽 지방은 땅이 기름지고 서북쪽은 군사와 말이 매우 굳세고 힘이 있으며, 산이 천리나 이어져 있어 목재는 다 쓸 수가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삼면을 바다가 둘러싸고 고기와 소금이 없어지지 아니합니다. 경상도에는 인삼이 지천으로 많이 나고 탐라도에는 좋은 말이 매우 많습니다. 이 또한 모든 생산물이 풍부한 나라이지만 이씨 왕조가 미약하여 겨우 실오라기같이 끊어지지 않을 뿐입니다. 대왕대비가 섭정을 하여 세력 있는 신하가 권력을 마음대로 하므로 정사가 뒤틀리고 혼란하여 백성들은 탄식하고 원망합니다. 진실로 이러한 때에 속국이 될 것을 명하여 그 옷을 같이 입게 하고 왕래를 터놓아 조선을 영고탑에 소속시켜 황조의 근본이 되는 땅을 넓히십시오.”(같은 책 67~68쪽) 이런 내용의 편지를 조선의 기독교도가 청나라에 보내려 했으니, 이를 방치하는 것은 조선 정부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미묘한 맥락에 놓여있기에 이번 124위 순교자 시복에서도 황사영은 제외되었을 터이다.

기독교도를 보호하기 위해 외국 군대를 끌어오고자 한 황사영 알렉시오,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원흉이라고 판단된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안중근 토마스, 임진왜란 당시 가톨릭 장군 고니시 유키나가 아고스티노를 따라 한반도에 온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가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미사를 집전한 진해의 웅천왜성을 둘러싸고 갈등하는 종교계와 지역사회, 종교적 신념상 살생을 금해야 하지만 국가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일본 병사들을 살해한 임진왜란 당시의 승병(僧兵)들. 국가의 경제 발전과 안보를 위해 밀양과 강정에서 행정을 집행하는 공무원과, 그 과정에서 밀려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종교인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고,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다. 필자는 특정 종교의 신자가 아니지만, 이 세상에는 세속의 세계관과 영원의 세계관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법이고 각자는 믿는 바에 따라 각자의 길을 갈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황사영 백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일찍이 듣건대 순교자의 피는 우리 성교의 씨앗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희 나라는 불행하게도 동쪽으로 일본과 가까이 있습니다. 섬나라 오랑캐가 잔인하고 혹독하여 스스로 천주님과의 관계를 끊어 버렸는데, 우리나라 조정에서는 그것을 논하기를 도리어 잘한 일이라고 하여 장차 본받으려고 하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같은 책 60쪽) 황사영은 일본이 천주와의 관계를 끊어 버렸다고 적고 있어서, 16~17세기에 일본열도를 휩쓴 기독교 세력이 절멸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6세기 말에 15만명에 이르던 일본의 기독교도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양대 정권하에서 철저히 탄압받고, 일본으로 잠입한 가톨릭 신부들이 모두 처형되거나 배교하였기 때문에, 이런 혹심한 상황에서 기독교도가 남아있을 리가 없다고들 믿었다.

하지만 일본열도에서 기독교도는 잔존해 있었다. 그들은 규슈 서해안에 흩뿌려진 작고 척박한 섬에 숨어 200년에 걸쳐 여러 차례의 탄압을 견뎠다. 이들을 잠복 기독교도(隱れキリシタン, 潛伏キリシタン)라고 한다. 그들은 당연히 공개적으로 신앙활동을 하지 못했기에 그 옛날 선교사들이 가르쳐준 성가(聖歌)를 뜻도 모른 채 주문처럼 읊고, 불상(佛像)에 아기 예수나 십자가를 그려 마리아상으로 간주하여 기도했다. 그들은 앞으로 7대가 지나고 나면 가톨릭 신부가 검은배(黑船)를 타고 일본에 올 것이며, 그때가 되면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믿을 수 있게 되리라는 ‘바스챤의 예언’을 의지 삼아 처절하게 신앙을 이어나갔다.(박양자·‘일본 키리시탄 순교사와 조선인’ 291~292쪽)

그리고 정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19세기 중기에 바다 건너 200여년 만에 다시 선교사가 일본으로 와서 나가사키에 성당을 세운 것이다. 1865년 3월 17일 오후 일본 거류 프랑스인을 위한 성당인 오우라 천주당을 지키던 베르나르-타데 프티장(Bernard-Thade Petitjean) 신부에게 한 명의 여성이 다가와 이렇게 속삭였다. “우리들의 마음은 당신과 같은 마음”이라고.(같은 책 304쪽) 그녀의 이름은 이자벨리나 스기모토 유리(イザベリナ杉本百合)였다. 이렇게 해서 일본열도에 기독교도가 잔존해 있었음이 확인되자 서구 세계는 흥분에 휩싸였고 일본 정부는 혼란에 빠졌다. 아직 기독교 금지령이 엄존하던 상황이었기에, 이때 정체가 드러난 기독교도 3394명이 유배되고 662명이 순교했다. 내년은 200여년 만에 일본열도에서 신도가 재발견된 지 150년 되는 해이다.

이처럼 한반도에서도 일본열도에서도 기독교도들은 바다 건너 신부가 올 것을 갈망했다. 일본에서는 250년간의 고립과 탄압 끝에 실제로 신부가 바다 건너 오는 기적이 일어났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 없이 기독교도가 탄생한 기적의 땅 한반도에서는 구원자가 바다 건너 오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한국은 세계 유수의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유라시아 동해안의 두 나라에서 기독교는 기적을 일으킨 종교였다. 그 기적은 기독교가 낮은 곳에 임했기에 일어날 수 있었을 터이다.

끝으로 이번 회의 집필에 도움을 주신 다케나카 히데타카(竹中英俊) 선생님, 서울대 국문과 정병설 선생님, 천주교 주교회의, 한님성서연구원 주원준 선생님, 배론성지의 여진천 신부님과 유충희 신부님께 감사드린다.

더 읽을 책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정병설 ‘죽음을 넘어서’

박양자 ‘일본 키리시탄 순교사와 조선인’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고문헌 연구를 통해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 중.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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