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5일 워싱턴 국제전략문제연구소에서 열린 자신의 신간 출판기념 강연에 참석한 키신저.
지난 9월 15일 워싱턴 국제전략문제연구소에서 열린 자신의 신간 출판기념 강연에 참석한 키신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출판기념 강연과 사인회가 지난 9월 15일 워싱턴에서 열렸다. 장소는 워싱턴의 싱크탱크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초대장을 받았을 때 두 가지가 머리에 떠올랐다. 먼저 10여년 전 일이다. 2003년 참가했던 중국 백인회(百人會·www.committee100.org) 모임이었다. 중국계 미국인 모임으로, 중국의 힘을 알 수 있는 최고의 클럽 중 하나다. 스티브 첸(유튜브 창설자), 미셀 콴(피겨스케이팅 스타), 요요마(첼리스트), 제리 양(야후 창설자) 등 100명의 정회원이 있고, 본부는 뉴욕이다. 당시 백인회는 키신저를 초대해 미·중관계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국제정치의 전설인 키신저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필자도 현장에 갔다. 리셉션 동안 엄청난 수의 중국인이 몰렸다. 중국인에게 키신저는 자국 대통령 이상의 존재이다. 눈을 맞추고 사진을 찍으려는 중국인 행렬로 인해 나는 키신저 근처에는 가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바라봐야만 했다. 키신저가 간단한 중국어를 사용한다는 사실도 당시 처음 알았다.

둘째는 키신저의 나이다. 키신저는 1923년 5월 27일생이다. 만 91세이니, 100세를 눈앞에 둔 사람이다. 어떻게 91살 먹은 노인이 강연을 하고 사인회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가 지난해 9월 은퇴한 것은 순전히 나이 탓이었다. 일을 감당할 만한 체력, 머리, 아이디어가 소진됐기에 현장을 떠난다고 말했다. 은퇴 당시 72살이다. 키신저보다 20살 어린 ‘젊은이’다. 국제정치의 살아있는 교과서와의 만남도 중요하지만, 91세 노인 키신저의 장수의 비밀이 무엇인지에 관한 의문을 갖고 CSIS에 갔다.

건물 안은 이미 많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다. 책을 구입하려는 행렬이 CSIS 1층 창문 쪽에 이어져 있다. 9월 9일 발간된 ‘세계질서(World Order)’다. 1957년에 발표된 ‘복구된 세계(A World Restored)’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모두 17권의 책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가 키신저이다. 17권 중 14권은 국제정치에 관한 문제, 3권은 공직자로 일할 때의 기억을 모은 자신의 회고록이다. 신문에 쓴 기고문은 수백 개에 달한다. 책은 위대한 인간 여부를 식별하는 최적의 기준 중 하나이다. 극히 예외는 있겠지만, 책을 많이 쓴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격(格)과 품(品)이 가슴속에 와닿는다. 키신저는 세계를 상대로 한 ‘큰 그림’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면서 변화무쌍한 세상에 대응하는 지혜를 인류에게 전해주고 있다.

필자와 CSIS와의 ‘돈독한(?)’ 인연 덕분에 키신저가 앉을 단상 바로 아래 좌석을 얻을 수 있었다. 출판기념식에 초대된 사람은 약 400명으로, 그중 절반 정도가 강연장에 들어와 앉았다. 단상의 키신저와 3m 거리인 제일 앞쪽 자리를 잡은 이유는 키신저의 표정과 숨소리를 직접 듣고 싶어서였다. 미신 정도로 취급되겠지만, 누군가에게 뭔가를 배우는 방법 중 하나로 ‘물리적 거리’를 빼놓을 수 없다. 인터넷이나 책도 좋지만, 실제 만나 가까이 가서 배우고 흉내 낼수록 상대방의 장점과 호기(好氣)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필자는 믿는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기억하는 키신저의 이미지는 1972년 2월의 이른바 ‘닉슨 쇼크’와 연관돼 있지 않을까 싶다. 키신저 당시 닉슨 행정부의 백악관 국가안전보좌관은 어느날 아침 갑자기 중국 베이징공항에 나타나 미·중 국교 정상화를 이뤄냈다.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毛澤東) 주석,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함께한 키신저의 모습이 세계 모든 이의 머릿속에 각인된다. 1972년 2월 21일 미·중 공동성명 발표 직전에 이뤄진 네 사람의 대화는 국제정치에 흥미를 가진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본 ‘외교술의 모델’에 해당한다. 이 자리에서 네 사람 간의 대화 화제에 오른 인물이 바로 키신저 자신이다.

마오 “키신저는 철학박사인가요.”

닉슨 “지식 전부를 가진 브레인 그 자체입니다.(Doctor of Brain.)”

저우 “미국 대통령 선거 때 ‘여성’을 잘못 다뤘다가는 큰일나지요.(키신저가 자기 딸과 함께 프랑스 파리에 가서 중국 측 인사와 비밀접촉을 한 사실과 관련한 조크로 모두가 웃음.) 키신저는 미국 대통령에 나서지 않을 겁니다.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키신저 “통역자인 탕웬생(唐聞生)은 (뉴욕에서 태어났기에) 미국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닉슨 “아마 그녀가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우리(공화당) 후보로….”

마오 “만약 탕을 후보로 내세우면 (공화당에) 안 좋을 듯합니다. 그렇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당신의 적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서는 괜찮을 듯합니다. 민주당이 정권을 잡을 경우, (그녀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기 위해) 우리는 결코 그들을 피하지 않을 겁니다.”

CSIS 강연석에 앉아 기다리자 키신저가 나타났다. 특유의 굵고 검은 안경테가 아니다. 젊어 보이려는 듯(?) 얇은 갈색의 안경테이다. 1972년 무관 자격으로 함께 베이징에 갔던, 브렌트 스코크로프트(Brent Scowcroft)도 함께 나타났다. 키신저보다 2살 아래인 스코크로프트는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과, 41대 아버지 부시 대통령 때 두 번이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일한 중국통이다. 43대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공격할 당시 워싱턴에서 최고 수임료를 자랑하는 안보컨설팅 회사를 운영했다. 키신저가 갖고 있는 키신저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과 비슷한 회사로, 특히 중국 관련 컨설팅에 남다른 수임실적을 갖고 있다. 중국에 관한 민간외교의 양대산맥으로, ‘뉴욕의 키신저, 워싱턴의 스코크로프트’라는 평가가 통한다. 스코크로프트와 함께 이목을 끈 인물은 워싱턴 중국대사관의 추이티안카이(崔天凱) 대사이다. 추이 대사는 10여명의 중국 외교관을 대동하고 현장에 나타났다. 키신저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중국인 사진사들이 달려들어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청중 맨 뒤쪽을 보니까 중국계 TV 방송국 카메라가 길게 늘어서 있다. 중국식 프로파간다의 냄새가 나는 표현이지만, 키신저야말로 중국인이 생각하는 미국인, 라오펑요우(老朋友)의 정상에 선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할 듯하다.

키신저 출판기념 강연에 몰린 인파.
키신저 출판기념 강연에 몰린 인파.

키신저는 허리가 약간 굽은 상태로 나무 지팡이를 짚었다. 얼굴 혈색은 60대라 해도 믿을 정도이다. 155㎝ 정도의 단신. 걸을 때 누군가의 부축을 받거나 못 걸을 정도는 아니다. 91세지만 혼자 계단을 걸어올라가 단상에 올라섰다. 앉은 즉시 대화가 시작됐다. 상대는 존 햄리(John Hamre) CSIS 회장이다. 첫 번째 질문은 왜 책을 쓰게 됐는지다. “예측불가능한 일들이 세상에 만연하고, 세계질서가 흔들린다는 생각이 들어서 책을 쓰게 됐다”고 답한다. “현재의 국제 상황은 전례가 없는 대혼란”이라고 진단한다. 이후 새책 ‘세계질서’에 관한 다양한 각도의 질문과 대답이 이뤄졌다.

‘세계질서’는 키신저가 3년 만에 내놓은 책이다. 2011년 중국 문제에 집중한 ‘중국론(On China)’ 이후 전 세계를 범주로 한 정치·외교 역사서가 ‘세계질서’이다. 420쪽의 두꺼운 책으로 9개 장과 결론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지금 당장 미국이 어떤 외교를 하는 것이 좋은가라는 정답을 구하는 책이 아니다. 역사를 통해 본 교훈, 그리고 외교 현황을 키신저 나름의 분석 프레임으로 설명해 놓았다.

책의 핵심은 제1장의 30년 전쟁에 관한 부분이다. 30년 전쟁은 1618~1648년에 유럽에서 벌어진, 최후의 종교전쟁이자 최초의 국제전쟁이라 불리는 역사적 사건이다. 레알폴리틱(Realpolitik), 데탕트(Detente), 라프로쉬망(Rapprochement)은 키신저를 상징하는 가장 중심적인 키워드이다. 현실정치, 화해, 친선이란 의미이다. 레알폴리틱은 독일어, 데당트와 라프로쉬망은 프랑스어다. 키신저는 유럽 외교를 ‘본격적’으로 미국 정치 무대에 소개하고 실천했다. 생존에 목을 매는 현실주의 국제정치를 소국만이 아닌 대국 미국에 처음으로 적용시킨 인물이다. 저우언라이도 갈파했듯이 키신저는 미국이 아닌 독일 출신 유대인이다. 현재의 독일 남부 뉴렘버그(Nuremberg) 근처에서 태어났다. 15살까지 살다가 유대인에 대한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떠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일등병으로 근무하던 1943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다. 20살 때이다. 키신저의 영어는 독일 남부 악센트가 강하다. 독일은 당시 미국의 적대국이다. 군대는 독일 출신자가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21세기 들어선 지금도 미군 입대는 미국 시민권 취득 영순위 통로에 해당한다.

키신저를 상징하는 3개 키워드의 어원(語源)이 독일과 프랑스에 있다는 것은 키신저의 배경에서 연유한다. 유대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유럽에서의 생존본능이 키신저의 DNA 속에 존재한다. 외교는 국가 차원의 생존본능이라 볼 수 있다. 독일과 프랑스의 지혜와 역사, 그리고 교훈이 키신저의 세계관에 배어 있다.

제1장의 30년전쟁은 레알폴리틱, 데탕트, 라프로쉬망으로 점철된 유럽의 외교사에 해당한다. 전쟁은 보헤미아 지방의 프로테스탄트, 즉 신교의 가톨릭에 대한 반란에서부터 시작된다. 곧이어 가톨릭을 지지하는 국가들이 신교 공격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덴마크·스웨덴·네덜란드·영국이 신교도 편에 선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합스부르크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폴란드는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가톨릭 연합동맹에 들어간다. 신교·구교 간의 알력 때문에 벌어진 것이 30년전쟁이지만, 키신저는 당시의 역사를 레알폴리틱이란 관점에서 분석한다. 종교를 배경으로 한 갈등이 초기 단계의 상황이지만, 전쟁이 오래될수록 각국 간의 레알폴리틱이 대세가 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나라는 프랑스이다. 가톨릭 국가이면서도 신성로마제국을 지지하기보다 신교의 편을 든다. 더불어 이슬람국가인 당시 오스만제국도 신교 프랑스와 같은 입장을 취한다.

종교·정치·인종과 같은 이념이나 가치가 아니라, 현실에 기초해 어떤 파워를 만들어나갈지를 보여준 것이 30년전쟁의 교훈이라는 것이다. 한번 적은 영원한 적이 아니다. 적이라 해도 언젠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키신저가 주장하는 레알폴리틱의 정의이다. 특정 이념이나 원칙론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목을 죄는 국제정치나 외교가 아니다. 원칙과 이념보다 장·단기적인 국가이익을 우선하라는 현대판 마키아벨리즘이 바로 키신저의 생각이자 주장이다. 프랑스가 당시 구교를 배신하고 신교를 지원한 이유는 신성로마제국이 너무 커지면서 자신의 번영을 위협하는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신교를 지원할 경우 작은 제후국 수준에 머물러 있던 독일계 연방들이 합스부르크계 신성로마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톨릭 세계의 힘이 빠지기도 하지만, 프랑스에 대한 강국의 위협이 감소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같은 프랑스의 생각은 이후 전쟁이 끝난 뒤 사실로 나타난다. 영국은 이 같은 유럽 대륙의 흐름을 지켜보면서 ‘강한 나라를 약하게 만드는 외교’에 주력한다. 상대가 이교도이든, 어제의 친구이든 상관없다. 강해지면 적이 될 수 있기에, 강한 상대를 약하게 만드는 일이라면 유럽 열강 모두가 발벗고 나선다. 그 같은 열강들의 외교 방침은 21세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자신의 신간 ‘세계 질서’에 사인하고 있는 키신저.
자신의 신간 ‘세계 질서’에 사인하고 있는 키신저.

30년 전쟁을 보는 키신저의 생각은 시리아·이라크에서 손을 떼라는 미국 진보 진영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무조건 고립정책으로 갈 경우 후에 더 큰 화를 만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미국식 가치를 최고라 믿으며 국제 카우보이 자격으로 전 세계 질서를 좌지우지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국제연맹을 창설한 우드로 윌슨 대통령처럼 스스로 만든 국제연맹을 내팽개친 고립주의도 문제라고 경고한다. 국제연맹이 무력화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이어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른 나라가 미국이다. 존 햄리 회장과의 대화에서, 키신저는 30년전쟁의 결과인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의 의미를 두 마디로 압축해 설명한다. ‘불간섭주의’와 ‘힘의 균형’이다. 유럽 최초 국제전쟁의 교훈과 지혜는 이후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유지된다. 불간섭주의와 힘의 균형은 키신저가 말하는 레알폴리틱의 양대축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키신저가 대화를 이어나가는 동안 놀란 것은 그의 엄청난 에너지이다. 특유의 바리톤 음성과 독일식 발음으로 인해 미국인도 알아듣기 어려운 영어지만, 강조하고 싶은 말이나 핵심적인 문장을 얘기할 때는 소리를 높이고 표정도 다채롭게 바꿨다. 특히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손과 팔, 그리고 몸을 전부 활용하는 것이 인상 깊었다. 91세 노인이 손과 팔을 휘두르며 64분간 강연과 대화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책에 대한 설명이 끝난 뒤 청중의 질문이 이어졌다. 6개 질문 중 4개가 중국 관련 문제이다. 중국 내 개혁문제, 중·미관계, 중·일관계, 중국과 북한에 관한 문제이다.

키신저는 현재의 중국이 미국의 이해관계와 어긋나는 나라라고 말하지 않았다. 북한의 핵 문제도 두 나라의 협력을 통해 풀어나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만약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상충해 적대관계에 들어갈 경우 두 나라는 물론 전 세계가 불행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책에서 키신저는 세상 흐름과 무관하게 자신의 가치관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곳으로 두 나라를 예로 들었다. 중국과 이슬람권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외국이 중국과의 접촉에 직접 나선 경우는 전부 15건에 달한다고 한다. 18세기 유럽 열강들의 개방 요구는 대표적 경우이다. 중국은 외국과 접촉한 15건의 사건 가운데 10개를 전쟁으로 해결했다고 키신저는 분석했다. 중국은 천성적으로 베스트팔렌조약(1648년)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라라는 점을 강조한다.

중·일관계의 경우 세계가 아닌 동북아에 그칠 문제라고 전망한다. 기본적으로 볼 때 작은 섬을 둘러싼 중·일 간의 긴장은 태평양이 아닌 동아시아 내 국지적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일본이 들으면 가슴이 철렁거릴 얘기겠지만, 한국인 역시 같은 입장이라 볼 수 있다. 중·일 간의 분쟁은 중·일 간의 문제일 뿐이며, 장차 있을지도 모를 한·중 간의 분쟁도 한·중 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 레알폴리틱에 근거한 아시아관(觀)이기 때문이다. 키신저는 하루아침에 남베트남(월남)을 버리고 호찌민 공산주의자와 평화조약을 맺은 인물이다. 덕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베트남을 버리면서 그 여파는 주변국 모두에 확산된다. 캄보디아 라오스에 이어, 멀리 동아시아 한반도에까지 이어진다. 길게 보면 지미 카터 대통령이 제시한 주한미군 철수와 이후의 박정희 암살사건은 현실주의 외교가 키신저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할 수 있다.

키신저는 책에서 한반도 문제를 다루고 있다. 1950년 한국전 부분이다. 미군이 1950년 말 북진(北進) 당시 원산에서 마지막 전선을 구축했다면 중공군의 참전도 막아내면서 결국 한국이 통일할 수 있었을 것이라 강조한다. 미군의 피해도 줄이고, 압록강 근처까지 쫓겨갔던 김일성 공산정권도 주민이탈과 함께 붕괴됐을 것이라 말한다. 한국 신문을 보면 키신저가 책 속에서 이순신을 언급했다는 점에 주목하는 듯하지만, 내용 속의 주체는 이순신이나 이승만, 한국군이 아니다. 중국이 주인공이다. 중국의 어제와 오늘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재료로 쓴 사례가 한국이다.

키신저가 다룬 한반도 관련 부분은 7쪽에 불과하다. 전체 420쪽 중 2%도 안 된다. 중국에 관한 것은 책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키신저가 말하는 레알폴리틱, 데탕트, 라프로쉬망은 바로 소국의 희생을 전제로 한 대국 간의 논리일지 모른다. 중국이 세계의 경제대국 군사대국으로 커가는 상황에서 한국은 물론 일본조차도 세력균형을 위한 카드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 키신저 국제정치론의 이면에 있다. 키신저는 공화·민주 지지자 모두가 싫어하는 인물이다. 동시에 공화·민주를 떠나 미국인 대부분이 존경하고 좋아하는 세계 외교 무대의 교과서에 해당한다. 반면교사로 받아들일지, 보고 배워야 할 교훈으로서의 교과서로 받아들일지 여부는 각자의 세계관에 따라 다를 듯하다. 믿고 싶지 않겠지만, 미·중 나아가 중·일 사이에 끼인 세력균형 속의 카드 중 하나가 한국일지 모르겠다. 91세 노인의 발언이 온몸에 와닿는 이유일 듯하다.

키워드

#워싱턴 통신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