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정부세종청사 3층에는 기획재정부(부총리 겸 장관 최경환) 예산실이 있다. 올여름 이곳에는 줄잡아 수천 명의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 관계자들이 내년도 예산을 더 받아내기 위해 찾아왔다. 회의실마다 한 테이블에 예산실 사무관이 한 명 앉고, 그 주변을 예산을 타려고 찾아온 공무원들이 에워싸고 설득하는 장면이 여름 내내 이어졌다.

이런 밀고 당기기를 거쳐 정부는 9월 23일 376조원 규모의 2015년도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핵심 실무자인 임기근(46) 기재부 예산총괄과장은 기자에게 “본격적으로 이듬해 정부 예산안을 짜기 시작하는 6월부터 확정되는 9월까지 석 달 정도는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낸다”고 말했다. 올해도 임 과장을 비롯한 170여명의 예산실 공무원은 각 부처나 지자체에서 손을 벌리는 수많은 사업들을 심의하느라 매일 야근은 물론이고 주말도 반납했다.

예산안을 짜는 작업은 한마디로 ‘전쟁’이다. 한 푼이라도 더 받아가려는 부처 및 지자체들과, 국비를 균형 있게 배분하려는 예산실이 치열한 기싸움을 벌인다.

송언석(51) 기재부 예산실장을 비롯한 예산실 간부들이 직급이 높은 ‘민원인’을 만나는 시간은 점심시간 직후인 오후 1시 반~2시다. 타 부처나 지자체 고위 간부들이 찾아와 대면하고 예산을 요청하는 시간이다. 한 팀에 주어지는 시간은 5분 정도. 5분 안에 자신들이 하려는 사업이 왜 필요하고 얼마가 필요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한다. 지난 8월 예산실에 찾아왔던 한 지방자치단체 관계자는 “미팅 전날 스마트폰의 스톱워치 기능을 켜놓고 하고 싶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 연습했다. 그랬는데도 제대로 하고 싶은 말을 효과적으로 했는지 얼떨떨하다”고 말했다.

예산을 따내려는 쪽에서는 위아래 가릴 것 없이 수시로 물밑 접촉을 시도한다. 예를 들어 지자체가 다리를 놓기 위해 예산을 받으려는 경우 실무자들은 기재부 국토교통예산과장과 담당 사무관을 밀착 마크해야 하고, 간부들은 따로 장·차관, 예산실장에게 공을 들여야 한다. 익명을 요구한 예산실의 한 관계자는 “실무 담당자의 의견이 갈수록 힘을 얻는 추세다. 톱다운(top-down) 효과를 노려 장·차관들을 상대로 고공 플레이만 한다고 해서 예산을 딸 수 있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장·차관이나 도지사가 예산실의 과장들에게 직접 전화해서 예산을 달라고 하거나, 다른 부처의 1급 간부가 예산실 사무관을 상대로 설득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건 이 때문이다.

지자체의 예산 담당 공무원들은 기재부 예산실 공무원들의 고향·출신학교를 줄줄이 꿰면서 친구나 친척을 동원해 줄을 대는 ‘맞춤형 로비’도 한다. 예산실의 한 과장은 “다른 부처에서는 안면이 있는 행시 동기를 보내 무언의 압박을 한다”며 “하지만 친분이 있어 예산을 주려고 하더라도 심의 과정에서 예산 편성 원칙에 맞지 않는 사업이면 걸러지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중앙정부 부처보다는 지자체가, 지자체 중에서는 수도권보다는 지방에서 예산 요구를 강하게 한다는 게 중론이다. 지자체장의 연임 여부가 예산 확보와 연계돼 있고, 수도권보다는 지방의 지자체가 재정자립도가 낮아 국비를 타내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부처 중에서는 국토교통부, 보건복지부, 농림축산식품부 등 사업을 벌이는 부처가 법무부, 공정거래위원회 등 관리·조사 기능을 하는 부처들보다 예산 확보에 적극적이다.

지자체가 예산실을 설득하지 못하면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을 통해 우회적으로 공략한다. 국회의원들은 다음 선거를 준비하려면 지역구 예산을 많이 따야 하기 때문에 지자체의 ‘SOS’에 적극적으로 화답한다.

특히 정부가 작년부터 도로·철도 등 SOC(사회간접자본) 예산 증가를 억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국회의원들이 더 열심히 뛴다. 한국이 G20(주요 20개국) 국가 중 단위면적당 길이가 고속도로 1위, 철도 6위이기 때문에 기재부는 현재 진행 중인 철도·도로 공사는 계속하되 새로 건설하는 것은 줄이자는 생각이다.

정부 각 부처에서 올린 2015 예산안 설명서가 여의도 국회 사무처에 쌓여 있다. ⓒphoto 조선일보 DB
정부 각 부처에서 올린 2015 예산안 설명서가 여의도 국회 사무처에 쌓여 있다. ⓒphoto 조선일보 DB

예산실 관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국회의원들은 고압적이기보다는 “(지역구 사업에) 한 푼도 배정을 안 해 주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니 좀 봐달라”며 사정하는 경우가 많다. 예산실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정부 고위 관계자는 “국회의원이 전화로 호통치듯이 빨리 오라고 해서 갔다. 그랬더니 상석(上席)에 앉게 하고 ‘잘 봐달라’고 해서 머쓱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예산실의 한 관계자는 “정치인이 전화하면 나중에 어떤 인연이 될지 몰라 잘 대해줘야 한다는 은근한 압박이 생긴다”라며 “그 정치인이 나중에 내 앞길을 막을 수도 있고 앞길을 틔워줄 수도 있는 것 아니겠냐”고 했다.

지자체가 정부 부처와 함께 ‘협공’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항만을 새로 개발한다면 해양수산부 공무원들과 해당 지역의 지자체 공무원들이 각자 두 갈래로 예산실 공략에 나선다. 예산실의 한 과장은 “원칙에 맞지 않는 사업에 대해 예산 반영을 거절하면 지자체의 예산담당자들도 서운해하기보다는 프로답게 논리나 통계를 보강해서 다시 공격해온다”고 했고, 또 다른 과장은 “예산 많이 딴다고 승진하는 것도 아닌데 열의를 가지고 설명하는 사람들을 보면 지역발전을 위해 애쓴다는 충정이 느껴진다”고 했다.

올해는 6·4 지방선거로 새로 지자체장들이 뽑혔기 때문에 서로 ‘예산 폭탄’을 맞아보겠다며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게 예산실 관계자들의 공통적 반응이다. 지자체장들은 기재부를 방문할 때 미리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지역 취재진과 함께 와서 예산을 따기 위해 공들이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애쓴다.

새로 취임한 광역단체장들이 기재부 출신들을 경제 담당 부시장으로 영입해 예산실과의 ‘대화 통로’로 삼는 경향이 두드러졌다는 것도 특징이다. 서병수 부산시장은 김규옥 전 기재부 기획조정실장을 경제부시장으로 영입했다. 김 부시장은 기재부에서 예산총괄과장, 예산총괄심의관을 지낸 정통 예산관료다. 유정복 인천시장도 기재부 2차관을 지낸 배국환씨를 정무부시장으로 임명했다. 배 부시장 역시 예산제도과장, 예산총괄과장을 지내 예산안을 짜는 과정을 꿰뚫고 있는 인물이다.

윤장현 광주광역시장은 현직 기재부 간부를 경제부시장으로 추천해 달라고 정부에 요청해 예산실에서 잔뼈가 굵은 우범기 국장을 스카우트했다. 김기현 울산시장은 이태성 기재부 재정관리국장을 경제부시장으로, 이낙연 전남지사는 우기종 전 기재부 녹색성장기획단장을 정무부지사에 임명했다. 기재부의 한 간부는 “예전에 모시던 상사가 예산을 요청하면 아무래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전관 예우’ 효과가 어느 정도 있다는 얘기다.

예산안을 짜는 작업은 작년부터 정부세종청사에서 이뤄지고 있다. 이런 지리적 변화와 맞물려 과천 시대와는 예산안을 협의하는 풍경도 사뭇 달라졌다. 기재부가 경기도 과천에 있을 때는 늦은 밤까지 예산실 복도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경우가 흔했지만, 숙박시설이 없는 세종시에서는 밤이 되면 썰물처럼 빠진다. 세종청사와 가까워진 정부대전청사의 부처들이나 충청 지역의 지자체들이 예전보다 자주 찾아온다. 특히 계룡대가 세종시까지 차로 30분 안에 닿을 수 있기 때문에 예산을 따려는 군복 차림의 장교들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반면 거리가 멀어진 수도권으로는 예산실 사무관이 상경해서 예산 협의를 하는 ‘방문 심사’를 시작했다. 여럿이서 세종시까지 내려오는 번거로움을 덜어준다는 취지로 예산실 사무관 1~2명이 KTX를 타고 올라간다.

인사치레로 들고 오는 선물도 조금 달라졌다. 여전히 음료수나 커피, 빵이 주종을 이루지만 세종시로 옮긴 후로는 호두과자가 부쩍 늘었다고 한다. 세종시 오는 길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호두과자를 사오기 때문이다.

지역토산품을 가져와 성의 표시를 하는 지자체들도 있지만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 이런 선물은 집에 가져가야 하기 때문에 찜찜해서 안 받으려 한다. 예산실의 한 주무관은 “사무실에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간식을 사다주는 게 부담도 없고 고맙다”고 했다.

1990년대까지는 술자리에서 예산 로비가 이뤄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풍경은 싹 사라졌다. 예산실 관계자와 식사 약속도 안면이 있는 사이가 아니면 잡기가 어렵다. 예산실 관계자들은 “워낙 바쁜 데다 오해가 생기기 쉽기 때문에 점심을 가까운 데서 후다닥 먹고 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예산실이 막강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바깥에서는 인기 있는 부서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것은 오해다. 원체 업무가 빡빡하기 때문에 사무관들이 예산실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사무관들 사이에서는 업무가 고급스럽다는 국제금융이나 전문성이 두드러지는 세제실에 비해 예산실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진다는 게 중론이다. 예산안을 짜는 것 외에도 중기재정계획을 만들어야 하고 대(對)국회 업무 등이 끊이지 않기 때문에 예산실이 주말이라도 쉬면서 숨을 돌릴 수 있는 때는 연말연초에 두 달 정도다.

올해 추석 때도 예산실 공무원들은 거의 전원이 추석 당일 하루만 쉬고 근무했다. 예산실의 한 사무관은 “현 정부 출범 첫해였던 작년에 공약가계부를 만들고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했던 것에 비하면 올해는 그나마 조금 나은 편이었다”며 “예산안을 국회가 빨리 통과시켜 줘야 연말에 숨을 돌릴 수 있는데 여야가 다투고 있어서 걱정”이라고 했다.

예산실 관계자들은 예산안을 짜는 작업이 고통스럽지만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임기근 예산총괄과장은 “무거운 책임감을 지고 있지만 즐거움도 느껴보려고 애쓴다”고 말했다. 임 과장은 “밖에서는 예산실이 ‘갑’ 노릇을 한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예산을 짜는 일은 각 부처와 지자체, 국회로부터 각자의 입장을 듣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소통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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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석 조선일보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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